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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84화 (28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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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4화 3장. 떨쳐 버릴 수 없는 악연도 있다(3)

“도, 도망쳐!”

“살려 줘!”

독의 범위에서 벗어나 겨우 살아남은 이들이 도주하면서 거리는 순식간에 아수라 지옥도로 변했다.

무혼랑의 몸에서 흘러나온 혈류는 무서운 기세로 거리를 잠식해 갔다. 순식간에 방원 삼십여 장이 죽음의 대지로 돌변했다.

음유경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했다.

독기에 노출된 눈과 피부가 아파 왔다. 그나마 내공으로 전신을 보호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중독되었을 것이다. 그만큼 무혼랑들이 내뿜는 독기는 무서웠다.

‘독인인가?’

음유경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천당문은 분명 독의 명가였다. 그들은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독을 연구했고, 엄청난 성과를 이뤘다. 그래서 모두가 당문을 두려워했다.

당문의 독은 오직 당문의 해약으로만 해독할 수 있다는 말이 정설로 통할 정도였으니까.

그만큼 당문의 독은 무서웠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당문은 독에 정통했지만, 어디까지나 용독자(用毒者)로서였지, 직접 독인이 되는 것은 꺼려 했다.

무림에는 선(線)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금기와 허용 사이에 존재하는 아주 가느다라고 희미한 선.

그 선은 턱없이 낮은 문턱에 걸쳐져 있어 쉽게 넘을 수는 있지만, 넘게 되면 전 무림의 공적이 될 수도 있어 위험했다.

당문은 강호인들이 자신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잘 알고 있었다. 두려움과 질시가 공존하는 그들의 눈빛은 당문에 굉장히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요구했다.

독인이 되는 것은 바로 강호인들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도덕성을 무너트리는 결과가 된다. 그렇게 되면 결코 지금처럼 당문이 독과 암기에 마음 놓고 집중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당문은 이제껏 독인을 키우지 않았었다. 그럴 필요도 없었고.

‘그런 당문이 직접 독인을 키웠다고?’

음유경이 고개를 저었다.

한 문파의 기조란 쉽게 바뀌지 않는다. 하물며 수백 년을 고집스럽게 독자 노선을 구축하고 있는 당문의 기조가 그렇게 쉽게 바뀔 리 없었다.

‘확인해 봐야 해.’

그녀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텄다.

음유경이 공력을 더욱 끌어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무위가 더욱 높아졌다.

쿠콰콰!

날카로운 검기가 폭풍처럼 사방으로 휘몰아쳤고, 장내가 초토화되었다.

그런 광경을 멀찍이서 바라보고 있는 자들이 있었다.

“우아아! 이게 무슨 난리래요?”

“도대체?”

음유경과 무혼랑의 대결을 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는 자들은 바로 아미파의 은엽 사태 등이었다.

소율희는 생전 처음 보는 엄청난 광경에 압도당했고, 정소천 역시 온몸에 전율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아미타불!”

은엽 사태가 자신도 모르게 불진(拂塵)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미파의 대제자로서 적지 않은 경험을 한 은엽 사태였다. 하지만 맹세코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처럼 험악한 싸움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소율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말려야 하지 않나요?”

“말린다고? 저 싸움을?”

정소천의 푸른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도 아미파에서 촉망받는 기재였지만,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에 개입할 자신은 없었다.

그때 은엽 사태가 말했다.

“아무래도 저들은 당문의 무인들 같구나. 괜히 개입해서 그들에게 책잡힐 필요는 없다.”

그녀의 눈에는 강한 경계심이 떠올라 있었다.

아미파가 당문에 뒤지는 전력을 가진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꺼려지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미파의 행사에 당문이 참견하는 경우도 드물었지만, 당문의 행사에 아미파가 개입하는 일은 더더욱 드물었다.

서로 소 닭 보듯 한다는 것이 더 옳은 표현일 것이다.

은엽 사태는 이번에도 그와 같이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괜히 사정도 모르면서 나서서 문제를 일으키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때 정소천이 급히 손으로 입을 막으며 말했다.

“독이에요. 사저.”

“어서 뒤로 물러나거라.”

은엽 사태가 안색이 변해 급히 소리쳤다.

그녀들은 서둘러 이십여 장 밖으로 피했다.

‘설마…… 독인인가?’

은엽 사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미파의 대제자답게 그녀는 금세 무혼랑들이 일반적인 무인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섣불리 독인이라고 속단할 수 없었다.

‘진짜 독인이라면?’

그녀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헝클어졌다.

정말 당문이 독인을 키운 것이라면 사천 무림의 균형이 흔들릴 수 있었다.

그때였다.

쩌엉!

갑자기 한 줄기 강렬한 기파가 거리 전체를 휩쓸고 지나갔다. 마치 폭풍에 휘말린 것처럼 아미파 제자들의 몸이 거세게 흔들렸다.

“흐윽!”

“무슨?”

은엽 사태와 정소천 등이 기파의 근원을 찾았다. 그런 그녀들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그곳에 그가 있었다.

칠흑처럼 새까만 피풍의를 걸친 남자, 담호가.

그의 손엔 무혼랑의 목이 잡혀 있었다. 무혼랑은 발버둥 치면서 그의 손을 벗어나려 했지만 힘이 거의 담겨 있지 않아 무의미한 움직임에 불과했다.

무혼랑의 사지는 역방향으로 꺾인 채 갈댓잎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기괴해 보였다.

“어떻게?”

당일랑은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무혼랑은 결코 저렇게 쉽게 잡힐 존재가 아니었다. 무력은 둘째치고 그들의 몸은 온통 독으로 이뤄져 있었으니까.

무혼랑의 몸을 잡은 것만으로도 담호는 중독이 되어야 했다. 하지만 담호의 몸 어디서도 중독 증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가 나머지 무혼랑들에게 소리쳤다.

“뭐하느냐? 어서 놈을 죽여라.”

잠시 멈춰 서 있던 무혼랑들이 다시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 순간 담호가 잡고 있던 무혼랑을 그들에게 던졌다.

쿠당탕!

무혼랑들이 동료의 몸을 미처 피하지 못해 한데 엉켜 뒹굴었다. 담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단공벽을 펼쳤다.

쩌어엉!

충격은 공기의 결을 타고 무혼랑들에게 전해졌다.

‘퍽’ 하는 소성과 함께 무혼랑들의 귀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고막이 찢어진 것이다.

보통의 인간이 이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면 분명 어떤 반응이라도 보였어야 한다. 하지만 무혼랑들은 인간이 보여야 할 법한 그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담호의 눈매가 좁아졌다.

‘실혼인(失魂人).’

이것으로 확실해졌다.

눈앞에 있는 무혼랑들에겐 이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강호에 나온 이래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전투를 치른 이가 바로 담호였다. 아마 담호만큼 많은 종류의 싸움을 한 이는 현 강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언젠가 이와 같은 이들과 싸운 적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마교.’

삼 년 전 지옥협에서 그의 발길을 끈질기게 붙잡았던 혈명대가 이랬다. 그들은 그 어떤 감정과 고통도 느끼지 못했고, 오직 명령에만 복종했다.

마지막 한 명이 죽는 그 순간까지도 그들은 부나방처럼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리고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무혼랑처럼.

순간 담호의 눈빛이 변했다.

그의 시선이 당일랑을 향했다.

“으으!”

살기가 담긴 그의 눈빛을 마주한 순간 당일랑은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났다. 단순히 눈빛을 본 것만으로 심혼이 아득히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하지만 당일랑은 순간적으로 정신이 날아갔었기에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어서 막아. 놈을 막으라구.”

당일랑이 무혼랑들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엉킨 몸을 풀어낸 무혼랑들이 다시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휘류우!

순간 담호의 몸에 한 줄기 기류가 휘돌았다. 폭마경이었다.

폭마경을 전신에 두른 채 담호가 무혼랑들에게 뛰어들었다.

쿠콰쾅!

화산이 터진 듯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사방으로 짓이겨진 시신이 튕겨 나갔다.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지만, 당일랑은 그게 무혼랑의 시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푸확!

무언가 폭발을 뚫고 나타났다. 담호였다.

검은 머리카락과 칠흑 같은 피풍의가 광풍에 미친 듯이 펄럭였다. 그가 무서운 속도로 당일랑을 향해 쇄도했다.

“으아아!”

당일랑은 괴성을 내지르며 품에서 급히 은색 원통을 꺼냈다. 어린아이 팔뚝만 한 원통의 끝 쪽에는 미세한 구멍이 십여 개 뚫려 있었다.

그가 원통의 표면에 있는 단추를 눌렀다.

퓨퓨퓨퓩!

순간 원통에서 새끼손가락 굵기만 한 은침이 발사되었다.

혈루관혼침(血淚貫魂針)이라는 이름의 금용 암기였다. 당문에서 만들기는 했으되 사용하기는 엄격하게 금지된 물품이었다.

퍼억!

담호 앞까지 도달한 은침이 갑자기 폭발을 일으키며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미세한 은침 수천 개를 토해 냈다.

허공이 수천 개의 은침으로 새까맣게 물들었다. 담호가 피할 공간은 어디도 존재하지 않았다.

“뒈져랏! 악마 같은 놈!”

콰앙!

그 순간 담호가 공력이 가득 담긴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담호의 주먹에 격중당한 대지가 비명과 함께 흙무더기를 토해 냈다.

사람의 키만큼이나 높이 흙벽이 일어나 담호를 에워쌌다.

“저럴 수가!”

당일랑의 눈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릅떠졌다.

은침이 흙무더기를 뚫지 못하고 우수수 떨어졌다. 설마 이렇게 간단하게 회심의 한 수가 무위로 돌아갈 줄 몰랐기에 당일랑의 경악은 극에 달했다.

흙무더기 속에서 담호가 튀어나왔다. 흙먼지를 뒤집어써서 얼굴을 구별할 수조차 없었지만 그것이 담호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담호의 장심이 당일랑의 가슴에 흡착되었다. 그리고 나선형으로 경력이 발산되었다.

쿠오오!

“케엑!”

비명과 함께 당일랑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상체를 보호해 주던 혈명패갑이 산산이 부서지면서 드러난 그의 가슴은 회오리 문양으로 살이 뭉개져 있었다.

오지암파경에 격중당한 흔적이었다.

당일랑이 바닥에 엎어진 채 피를 토해 냈다. 그런 그의 눈동자는 몽혼하게 풀려 있었다.

“우웨엑!”

그가 다시 한 번 속에 있는 모든 것을 게워 냈다.

생전 처음 느껴 보는 엄청난 고통이었다. 마치 온몸을 톱으로 썰어 내는 것처럼 고통스러웠다.

우웅!

귀에 이명이 울리고 뇌가 진탕되어 사물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그런 그의 눈에 누군가의 옷 끝자락이 보였다.

초점이 완전히 나간 눈동자였지만, 그래도 그것이 검은색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담호였다.

당일랑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들며 소리쳤다.

“아, 안 돼!”

그 순간 거역할 수 없는 강대한 힘에 그의 몸이 번쩍 들렸다. 당일랑이 허공에 뜬 채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담호가 당일랑의 멱살을 잡은 채 그의 눈을 바라봤다.

“당문이 실혼인을 제조했나?”

“으으!”

“말해!”

담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나지막했지만 영혼을 울릴 만큼 강한 힘을 담고 있었다.

당일랑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바지가 축축해지더니 노란 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극도의 공포 속에서 오줌을 싸고 만 것이다.

“커억!”

갑자기 당일랑이 피를 토하더니 눈이 돌아갔다. 그리고 숨이 끊어졌다.

담호의 눈이 좁아졌다.

오지암파경에 숨이 끊어질 만큼의 경력을 담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당일랑은 죽었다.

‘금제(禁制)인가?’

그때였다.

음유경을 상대하던 무혼랑들이 갑자기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무너져 내렸다. 그들의 숨은 끊어져 있었다.

음유경이 허무한 표정으로 숨이 끊어진 무혼랑들의 시신을 바라봤다. 애써 산 채로 제압하려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 것이다.

“이게 무슨?”

그녀가 급히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는 손에 들고 있던 당일랑의 시신을 던져 버렸다.

그의 눈에 우두커니 서 있는 아미파의 세 여인이 들어왔다. 경악으로 물든 그녀들의 얼굴에 두려움이라는 물결이 번져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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