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
285화 4장. 초록은 동색이나, 따로 놀기도 한다(1)
은엽 사태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 가득 담호의 모습이 들어왔다. 당일랑과 무혼랑들의 피를 뒤집어쓴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담호의 모습은 도저히 같은 인간처럼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어디서 저런 자가?”
불진을 잡고 있는 손등에 굵은 힘줄이 돋아났지만 은엽 사태는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전신에 다 소름이 올라왔다.
‘마인(魔人).’
지금 그녀의 뇌리를 가득 채운 생각이었다.
명문 정파인 당문의 무인들을 몰살시킨 담호가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이지 않았다.
문득 그녀와 담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담호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녀가 움찔했다. 단지 눈빛을 마주하는 것만으로 명문 정파인 아미파의 대제자가 위축된 것이다. 은엽 사태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그래서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기죽지 않기 위해 공력까지 실었다.
허리를 쫙 펴고, 기세를 끌어 올려 노성을 토해 냈다.
“감히 사천성에서 당문의 무인들을 죽이다니. 그대는 강호의 도의를 어찌 무시하는가?”
아미파 대제자다운 위엄이었다.
심후한 공력이 담긴 그녀의 외침은 거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한밤중의 난리를 피해 멀찌감치 도주했던 이들이 그녀의 외침을 듣고 벌벌 떨었을 정도였다.
문제는 담호였다. 그녀의 사자후가 통할 만한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은엽 사태의 사자후를 듣고도 그는 표정의 변화가 없었다. 마치 감정이 없는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담호의 모습이 은엽 사태의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등 뒤로 굵은 땀방울이 흘러내려 그녀의 옷을 적셨다.
“사저.”
곁에 있던 정소천과 소율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들 역시 담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기가 질리고 만 것이다.
아미파라는 거대 문파에서 보호만 받고 자랐던 그녀들이었다. 그런 그녀들이 어디서 이런 처참한 광경을 보았을까?
담호에게 죽임을 당한 당문의 무인들이 독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까마득하게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만큼 담호가 보여 준 무위와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은엽 사태는 그녀들에게 기둥이 되어 주어야 했다. 결코 흔들리는 모습을 보여 줘서는 안 됐다. 그래서 더 강하게 나갔다.
“대답하라. 그대가 누구인지.”
“…….”
“그대는 감히 아미파를 무시하는 것인가?”
은엽 사태는 담호가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아미파라는 이름을 믿었다.
구대문파 중 하나이면서 사천성 삼대 거두 중 하나인 아미파의 찬란한 위명을.
“그대가 왜 당문의 무인들을 공격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나와 함께 아미파로 가면 정당한 심문을 받게 해 주겠다.”
“…….”
순간 담호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러자 담호의 반경 수십 장이 마치 겨울이 온 것처럼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부르르!
갑작스러운 한기에 은엽 사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육감이 위기를 경고하고 있었다.
‘물러서야 한다.’
머릿속에선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지만, 그녀의 자존심이 발목을 붙잡고 있었다.
그때 처음으로 담호가 입을 열었다.
“아미파라고?”
“그렇다!”
“당문과 한패인가?”
“무슨?”
은엽 사태가 발끈하려 했다. 하지만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담호의 눈동자를 보는 순간 그럴 수 없었다.
‘죽는다.’
담호의 눈동자 속에서 그녀는 자신이 죽는 환상을 보았다. 극도의 위기감이 예감을 넘어선 예지력을 발휘하게 만든 것이다.
그제야 은엽 사태는 깨달았다.
눈앞의 남자는 당문이나 아미파라는 이름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단 사실을.
그에겐 적이냐 아니냐가 중요하지, 구대문파나 오대세가라는 허울뿐인 이름 따윈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제야 은엽 사태의 눈을 가리고 있던 편견의 막이 날아가고 담호가 명료하게 보였다.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피풍의에 가려져 그녀가 놓쳤던 것. 바로 담호의 다리였다.
당문의 무인들을 상대할 때는 미처 인지하지 못했지만, 그는 분명 다리를 조금씩 절고 있었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현 강호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평가되는 자의 별호가 떠올랐다.
“권……마?”
“…….”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문에 은엽 사태는 오히려 그가 권마라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신은 분명 화산에 칩거했을 텐데.”
지난 삼 년 동안 담호가 화산을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은 천하가 알고 있었다. 은엽 사태와 아미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뇌리 속엔 은연중 담호가 화산에 은거해서 나오지 않을 거라는 선입견이 박혀 있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극명한 담호의 특징을 보고서도 미처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담호가 은엽 사태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다리를 살짝 저는 모습이 보였다.
이젠 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저렇게 다리를 저는 모습에 속아 그를 우습게 보았던 자들이나 폄하했던 이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이젠 천하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다리를 저는 무인이라면 반드시 조심하고, 두 번 세 번 주의를 기울여라. 그가 권마일지도 모르니.
당금 강호에 퍼진 권마의 전설이었다.
은엽 사태는 이제 평정을 유지할 수 없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가 담호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다리에 힘이 빠져 제대로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물었잖아. 당문과 한패냐고?”
마치 짐승의 으르렁거리듯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려져 나오는 나직한 목소리가 은엽 사태의 고막을 불길하게 파고들었다.
은엽 사태는 자신의 대답 여하에 따라 아미파의 운명이 갈린다는 사실을 깨닫고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저.”
정소천과 소율희가 불안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은엽 사태의 대답 여하에 따라 그녀들도 담호를 적으로 돌려야 할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나마 정소천은 애써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직 어린 소율희는 두려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어제 자신이 그토록 살갑게 대했던 남자가 이렇게 무서운 사람인 줄은 정말 몰랐다.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대든다더니 자신의 꼴이 딱 그랬다.
‘저 남자의 눈에 나는 어떻게 보였을까?’
소율희는 자신이 저승 문에 발을 디뎠다 나왔음을 깨닫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은엽 사태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미파는 누구의 편도 아닙니다.”
“당문의 편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저희 아미파는 정의의 편입니다.”
“웃기는군.”
담호의 말 한마디에 은엽 사태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녀는 몇 번이나 변명을 하려 입술을 달싹였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마침내 담호가 그녀의 앞에 섰다. 은엽 사태는 담호의 기도에 짓눌려 꼼짝도 하지 못했다.
은엽 사태는 담호에게서 짐승의 노린내를 맡았다. 산 것을 물어뜯고 살아남은 포악한 것들만이 가질 수 있는 날것 그대로의 노린내를.
그제야 은엽 사태는 담호가 자신과 본질적으로 다른 부류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격이…… 아니, 종(種)이 달라. 이 남자는…….’
은엽 사태는 이를 악물었다. 잇몸이 터져 피가 흘러내렸지만 은엽 사태는 그런 사실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눈동자에 초점이 사라져 가고 있었다. 담호에게서 흘러나오는 날것 그대로의 거친 살기가 그녀의 이성을 잠식해 가고 있는 것이다.
“그, 그만하세요.”
압박감을 견디다 못한 정소천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뽑았다. 이대로 담호의 존재감에 잠식당했다가는 정신이 붕괴되고 만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담호의 시선이 정소천을 향했다. 창공처럼 푸른 눈동자가 보였다. 두려움이 담긴 것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직 투지가 담겨 있었다. 정신의 일각이 붕괴된 은엽 사태와는 사뭇 달랐다.
하지만 겨우 그뿐이었다. 그 이상을 기대하기는 힘들었다.
그때였다.
“휴! 담 대협. 제가 말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보다 못한 음유경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라고 아미파의 행보가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담호에게 폐인이 되거나 죽는 모습을 지켜볼 수는 없었다.
담호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아미파의 제자들은 숨을 죽인 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여기서 담호가 어떤 결정을 내리느냐에 따라 그들의 운명이 갈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음유경의 간절한 눈빛에 담호가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제야 세 사람을 짓누르던 가공할 압력이 사라졌다.
“후아!”
은엽 사태가 이제껏 참아 왔던 숨을 겨우 터트렸다. 그것은 정소천과 소율희도 마찬가지였다.
음유경이 그런 그녀들을 보며 말했다.
“보다시피 당문은 독인을 제조했어요. 명문 정파인 당문에서 독인을 제조했다는 것은 강호의 공분을 살 수 있을 만큼 큰 문제예요. 혹시 아미파에서는 이 사실을 간과할 생각은 아니겠죠?”
“그건 아니에요. 하지만…….”
은엽 사태가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뭐죠?”
“당문도 무언가 사정은 있을 거예요. 당문은 사천성의 정신적인 지주, 가끔은 정사를 오가는 행위를 하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를 표방하는 문파니까요.”
“정도를 표방한다고 해서 모두가 옳은 길을 가는 것은 아니죠. 인면수심의 무리는 어디에도 있는 법이니까요.”
“그건…….”
“나는 아미파에 이 이상 구구절절 설명할 생각이 없어요. 단지 전후사정을 잘 따져서 생각해 보라고 말하고 싶어요. 무작정 우리가 나쁘다고 말하지 말고.”
음유경의 목소리는 매우 조곤조곤했다. 하지만 거역하기 힘든 위압감과 힘이 담겨 있었다.
은엽 사태는 그런 음유경의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부디 잘 판단하세요. 그리고 옳은 결정을 내리길 빌어요.”
“좋아요. 백번 양보해서 우리가 이 일을 넘어간다고 쳐요. 하지만 당문은 결코 가만있지 않을 거예요.”
“겨우 그 정도인가요?”
“무슨?”
“백번 양보한다고요? 당신은 결코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돼요. 아미파의 대제자잖아요. 구대문파 중 하나이자 사천성의 정신적인 지주인 아미파의. 당신의 말처럼 아미파가 오직 정의만을 본다면 당문의 눈치를 봐서는 안 돼요. 안 그런가요?”
“…….”
은엽 사태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녀의 고개를 숙였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음유경의 말은 그녀의 가슴속 깊은 곳에 눈감고 있는 양심을 자극했다.
그녀의 머릿속에 수많은 상념이 스쳐 지나갔다.
아미파, 청성파, 당문.
다른 지역이었다면 패주가 되었을 만한 문파들이 무려 세 개나 사천성에 몰려 있었다.
어느 때는 대립을 하다가도, 어느 때는 하나로 힘을 합치기도 하면서 그렇게 그들은 사천성에서 공존했다.
수백 년이나 되는 세월을 그렇게 부대끼다 보니 어느새 서로에게 영향을 받거나 영향을 주면서 동색(同色)으로 물들어 갔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어지간한 일은 알아서 이해해 주고, 대변해 주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그래서 독인을 보고서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거니 하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
은엽 사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눈을 떴다.
은엽 사태가 눈을 떴을 때 그녀의 앞에는 더 이상 담호와 음유경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떠났어요.”
대답을 한 이는 바로 정소천이었다.
은엽 사태가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 사이 담호와 음유경은 자리를 떴다. 하지만 정소천은 감히 그들을 붙잡을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내가 큰 실수를 했구나.”
“사저?”
“그들 말이 맞았어. 나는 그들을 추궁하기보다 당문이 독인을 만들었다는 사실에 더 신경을 썼어야 해. 너희들을 보기 부끄럽구나.”
“아니에요.”
정소천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소율희도 마찬가지였다.
소율희가 담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권마라니 정말 상상도 못 했어요. 그렇게 무서운 사람이었다니.”
그녀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너뿐만이 아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강호는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갱이처럼 많다더니 그 말이 사실이었어.”
“그가 우리 아미파에 적개심을 가지면 어떡하죠?”
소율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정소천과 은엽 사태를 바라봤다.
은엽 사태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라도 잘 수습해 봐야지.”
“어떻게요?”
정소천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일단 당문 무인들의 시신을 수습하자꾸나. 그런 후 본문에 연락을 해야지. 그러면 장문인이 판단을 하실 게다.”
“그럼 실종자들을 찾는 건 미루는 건가요?”
“그래야겠지. 이쪽이 급하니.”
그때였다.
“저것 좀 보세요.”
소율희가 손가락으로 시신들을 가리켰다. 무심코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던 은엽 사태와 정소천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치이익!
당문 무인들의 시신이 메케한 독연을 내뿜으며 녹고 있었다. 그들의 몸은 순식간에 독혈이 되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갔고, 세 사람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