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
286화 4장. 초록은 동색이나, 따로 놀기도 한다(2)
담호와 음유경은 객잔으로 돌아오는 내내 말이 없었다. 각자의 상념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침묵은 객잔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계속됐다.
먼저 입을 연 이는 바로 음유경이었다.
“담 대협.”
담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다.
음유경의 얼굴에는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당문의 독인…… 혹시 이상한 점 못 느끼셨나요?”
“실혼인을 말하는 건가?”
“역시 알아차리셨군요.”
“이미 경험해 봤으니까.”
“그렇군요.”
음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담호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역시 마교인가?”
“그런 것 같아요. 실혼인을 만드는 방법은 오직 신교에만 전해져 오니까요.”
“그렇군.”
“신교에서 중죄를 지은 사람을 처벌하는 방법 중 하나예요. 자신의 죄를 뉘우치지 않는 자의 이지를 빼앗고 십 년 이상의 노역형에 처하는 것. 일단 실혼인이 되면 영혼이 속박된 자의 명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겉보기엔 정상적인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제대로 된 판단을 할 수가 없어 주어진 명령만 따르게 돼요.”
음유경의 얼굴에 은은한 분노가 떠올랐다.
실혼인을 만드는 것은 마교에서도 금기시되는 일이었다. 정말 커다란 죄를 짓지 않았다면 절대로 쓰지 않는 방법이기도 했다.
“실혼인을 만드는 방법은 극비 중의 극비예요. 신교에서도 실혼인을 제조할 수 있는 이는 극히 한정이 되어 있어요. 당연히 외부로 누출시키는 것은 절대 금지예요.”
“그런데 당문에서 실혼인이 만들어졌다는 거군.”
“네!”
대답을 하는 음유경의 목소리엔 힘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엔 자괴감이 가득했다.
신교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했던 그녀였다. 비록 세상에서는 마교라 손가락질받고 있었지만, 그 뜻만큼은 숭고하다고 자부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의 자존감과 자부심은 바닥에 처박혀 진흙탕을 나뒹굴고 있었다.
“실혼인을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에요. 본교 역시 수많은 세월을 연구해 실혼인을 만드는 방법을 완성시켰어요. 당문이 아무리 독과 암기에 정통한 문파라고 하지만 실혼인을 만드는 방법을 단시간 안에 완성시키는 것은 불가능해요. 당문 전체가 본교와 손을 잡았는지, 아니면 그들 중 일부가 변절한 것인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관계된 것은 분명해요.”
음유경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쉬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했지만, 자꾸만 불길한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사천성에서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아요. 율천의 실종에, 당문의 실혼인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쉽게 넘길 것이 없어요.”
그녀의 말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성에 들어오면서부터 느낀 것이지만 이곳에는 알 수 없는 암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이 단지 마교에 국한된 것인지, 아니면 천사교까지 개입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란 것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혼돈(混沌)의 바다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너무 혼탁해서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
“일랑이 죽었습니다.”
조심스럽게 들려온 목소리에 당사일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뚝뚝!
들고 있는 붓에서 먹물이 흘러내려 화선지를 검게 물들였다. 이제껏 공들여 그린 난 그림이 먹물에 물들어 망가졌지만, 당사일은 미동조차 없었다.
당사일이 움직인 것은 그로부터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는 붓을 그대로 화선지 위에 내려놓고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사십 대 중반의 중년인이 부복을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심복인 당추혼이었다.
당사일이 입을 열었다.
“그럼 무혼랑도 죽었겠군.”
“그렇습니다.”
“시신은?”
“모두 녹았습니다. 흔적은 남지 않았으니 심려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음!”
당사일의 눈빛이 깊이 침잠됐다.
당추혼은 말없이 그런 당사일을 바라보았다.
“좋지 않군.”
“죄송합니다.”
“무혼랑들로도 버거운 상대였나?”
“…….”
당추혼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당사일의 말이 스스로에게 건네는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곤란하군. 곤란해!”
당사일은 그렇게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잠시 후 그의 시선이 당추혼을 향했다.
“놈의 정체는 파악됐느냐?”
“확인 중에 있지만 한 명은 대충은 짐작이 갑니다.”
“누구냐?”
“권……마입니다.”
“권마? 화산에 처박혀 있는 것이 아니었나?”
당사일의 눈이 번뜩였다.
“처음 행적이 광원에서 노출된 것으로 보아 촉도를 넘어온 듯합니다.”
“흐음!”
“죄송합니다. 모든 것이 놈의 정체를 일찍 파악하지 못한 제 탓입니다.”
쿵!
당추혼이 이마로 바닥을 찧었다. 이마가 터져 피가 흘렀지만 당추혼은 움직일 줄 몰랐다.
당사일은 그런 당추혼의 모습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권마는 누구보다 마교와 많이 싸운 자. 그만큼 마교에 대해서도 많이 알고 있겠지. 어쩌면 그는 우리가 마교와 연관이 있는 것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른다.”
“설마 그럴 리가…….”
“모든 가정은 항상 최악을 상정해야 하는 법이다.”
당사일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그에 당추혼은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네가 죄송할 게 무에 있겠느냐? 화산에 처박혀 있던 권마가 이 멀리 사천성에 모습을 드러낼 줄 어떻게 알고. 문제는 권마가 본가를 건드렸다는 것이지. 독룡단에 이어 무혼랑까지. 이대로 그를 내버려 두면 본가의 체면이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물론이고, 마교와의 관계까지 드러나겠지.”
“어떻게 할까요?”
“권마, 참으로 귀찮은 상대구나.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것이 야생의 들짐승 같아. 그런 존재를 상대로 싸우면 이쪽의 피해도 만만치 않을 터. 우리의 손을 더럽히는 것보다는 그들의 힘을 빌리는 것이 더 나을 터.”
“그럼?”
“그들에게 연통을 넣거라.”
“그리하겠습니다.”
“권마, 더 이상 그 이름을 듣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구나.”
“저어…….”
마지막으로 당추혼이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자 이번엔 당사일의 얼굴에 살기가 떠올랐다.
“또 무슨 일이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꼭 알려 드려야 할 사실이 있기에.”
“말하거라.”
“목격자가 있습니다.”
“누구냐?”
“그게…… 아미파의 제자들입니다.”
“아미파?”
“어떻게 할까요?”
당추혼은 숨을 죽인 채 당사일의 입이 열리기만 기다렸다.
***
은엽 사태는 정소천 등과 함께 객잔을 떠났다.
“사저, 이렇게 빨리 떠날 필요가 있나요? 차라리 시간을 두고 그들과 접촉을 하는 것이 어떤지?”
“사매.”
“네?”
“모르겠어?”
“뭐를 말인가요?”
“좋든 싫든 우린 당문의 행사에 개입하고 말았어.”
“무슨?”
“독인은 강호에서 금기시하는 존재야. 물론 법으로 금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암묵적으로 금기시하고 있지. 그리고 당문은 그런 암묵적인 규칙을 깨트렸고.”
은엽 사태의 말에 정소천의 표정이 살짝 상기됐다.
“사저는 지금 당문이 우리에게 위해를 가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럴 가능성도 있다는 거지. 사매도 알다시피 당문은 워낙 폐쇄적인 곳이어서 한 치의 예측도 불허하니까.”
“하지만 너무 비약적인 생각이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그에 대응해야 하는 것이 강호인의 삶이야.”
은엽 사태의 표정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이성을 잃는 법 없이 냉정한 은엽 사태가 이 정도의 표정을 짓는 것은 그만큼 사안이 크게 중하다는 의미였다.
“일단 장문인에게 이곳에서 벌어진 일을 알리는 것이 급선무야. 그 후 장로 회의에서 어떤 판단을 내리든 우리는 따르면 그뿐이고.”
“휴우! 아직 실종자에 대한 어떤 단서도 찾지 못했는데, 이대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네요.”
“어쩔 수 없잖아. 사천성에서 당문의 동향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으니까.”
“알고는 있는데…….”
정소천이 말끝을 흐렸다.
머리로는 알고 있는데, 마음은 여전히 납득이 되지 않는다고 할까? 하지만 대제자인 은엽 사태가 결정한 이상 따라야만 했다.
‘그나저나 그 남자는…….’
문득 담호가 떠올랐다.
마치 어둠의 화신처럼 새까만 복장에 권마라는 별호에 어울리는 과격한 손속. 정소천은 그런 남자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여승들이 주축이 된 금정사와 남자 승려들이 주축이 된 복호사를 한데 묶어 아미파라고 부른다. 대외적으로는 여승들의 문파로 인식이 되어 있지만, 아미파에는 상당수의 남자 승려들이 있었고, 그들의 무위는 여승에 못지않았다.
특히 복호사의 주지인 광운신승의 무력은 실로 가공할 정도여서 현 아미파 장문인인 정명 사태마저도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정소천은 이제까지 광운신승의 무력이 최고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담호의 무위를 직접 목도한 순간 생각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광운신승도 강하지만, 담호는 더 강했다. 무공의 고하 문제가 아니었다. 손속, 분위기, 기세, 그리고 마음가짐 자체가 달랐다.
담호라는 인간은 마치 누군가를 죽이기 위해 태어난 것 같았다. 일단 그가 기세를 발하면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정소천 역시 그런 담호의 기세에 압도당했다. 그의 가공할 살기 앞에 그녀는 촛불처럼 위태로웠다. 감히 천하의 그 누가 담호의 적수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마저 들 정도였다.
‘그런 남자가 왜 사천성에 온 걸까? 그도 우리처럼 실종자를 찾아온 것일까?’
정소천의 조그만 머릿속에 온갖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확신하지 않았기에 감히 입 밖으로 내뱉을 수 없었다.
그때였다.
“웬 놈들이냐?”
갑자기 은엽 사태의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울려 퍼졌다. 그에 정소천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을 바라봤다.
그들이 가는 길 앞에 일단의 무리가 막아서 있었다. 그 때문에 비좁은 관도 어디에도 그녀들이 통과할 만한 공간이 보이지 않았다.
한눈에 보아도 그들이 일부러 관도를 점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에 정소천이 암암리에 공력을 끌어 올리며 경계했다.
“사저.”
소율희가 두려운 표정으로 정소천의 곁에 섰다. 정소천은 말없이 소율희의 어깨를 두들겨 줬다.
그때 은엽 사태의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웬 놈들이냐고 묻지 않았더냐? 감히 아미파 제자들의 앞을 막아서다니.”
“하하! 이거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때 관도를 막아선 무리 사이에서 누군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앞으로 나왔다.
연녹색 무복을 입은 사십 대 후반의 장한이었다.
은엽 사태가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당문의 당천양 대협?”
“하하! 오랜만입니다, 은엽 사태. 일전에 보고 한 오 년 만이지 싶은데.”
당천양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당문의 무인답지 않게 풍채가 좋은 당천양이었다. 그래서 은엽 사태 역시 그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안면을 튼 사이였지만 은엽 사태는 경계를 풀지 않았다. 당천양이 당문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천독당(千毒堂).
당문에 존재하는 모든 독을 연구하고, 새로운 독을 만들어 내는 곳이었다. 암기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천기당(千器堂)과 더불어 당문의 가장 핵심 조직이었다.
당천양은 천독당의 당주였다. 결코 쉽게 밖으로 나올 사람이 아니었기에 은엽 사태의 경계심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천양 대협이 어떻게?”
“하하! 이것 참으로 대단한 우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은엽 사태를 찾고 있었는데 말입니다.”
“소승을 찾았다구요?”
“그렇습니다.”
“왜?”
“본가의 가주님께서 뵙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모두…….”
당천양의 시선이 은엽 사태와 정소천, 소율희를 훑고 지나갔다. 그의 눈길을 받는 순간 소율희가 진저리를 치며 정소천 뒤에 숨었다.
은엽 사태가 당천양의 눈길을 정면으로 받으며 말했다.
“거부권은 있나요?”
“글쎄요!”
당천양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