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8
288화 5장. 기연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1)
연화루를 벗어난 기예화의 흔적을 쫓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녀 딴에는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하지만 문사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다.
문사는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천하에 드문 추적술의 소유자였다. 그는 아무리 작은 흔적이라도 놓치지 않는 예리한 안목을 갖고 있었고, 공기 중에 남은 희미한 향기를 구별할 수 있는 민감한 후각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 덕분에 기예화를 추적하는 것은 그에게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손쉬운 일이었다.
“어디 마음껏 도주해 봐라. 그래 봤자 나의 손바닥 안일지니.”
본래 궁지에 몰린 짐승은 극한까지 모는 것이 아니라 했다. 쥐도 궁지에 몰리면 이빨을 드러내는 법, 하물며 무공을 익힌 사람을 추적하는 일이었다. 여유를 두고 진행해야 조그만 이빨에 물리지 않는 법이다.
그래서 문사는 여유를 두고 기예화를 쫓았다.
흐릿한 발자국, 꺾인 풀잎, 공기 중에 희미하게 떠도는 그녀의 체취, 그 모든 것이 단서가 되었다. 그렇게 모든 단서를 모아 최종적으로 다다른 곳은 제법 커다란 객잔의 별채였다.
“이곳이 새로운 여우굴인가?”
본래 영악한 여우일수록 여분의 굴을 많이 마련해 두기 마련이었다. 그래서 기예화에게도 여분의 굴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쯧! 똑똑한 것들일수록 자신의 머리를 과신하기 마련이지.”
그가 혀를 차며 어둠에 잠긴 별채의 담을 넘었다.
사락!
옷자락이 담벼락을 가볍게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별채의 바닥에 착지했다.
쿠웅!
“헛!”
순간 문사가 기함을 했다.
담을 넘자마자 역한 노린내가 느껴졌다. 그의 후각은 아무 냄새도 맡지 못했지만, 그의 뇌는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날것을 잡아먹고 생존한 짐승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지배자의 냄새였다.
몇 해 전 태산의 깊은 산속에서 마주쳤던 대호의 냄새가 이랬다.
불빛 한 점 없는 칠흑 같은 어둠 너머 무언가 있다. 대호 못지않은 역한 노린내를 풍기는 그 무언가가.
그러나 문사는 걱정하지 않았다.
비록 태산의 대호가 대단하긴 했지만 결국 그의 손에 처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그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자신했다. 그만큼 스스로의 무공을 믿었다.
“얼마나 큰 대호인지 보자.”
그가 어둠을 향해 걸음을 옮길 때였다. 갑자기 일대의 공기가 어둠 쪽으로 일제히 쫙 빨려 갔다. 마치 거대한 아귀가 숨을 들이쉬는 것처럼.
“큿!”
문사의 안색이 변하는 순간이었다.
쿠와아아!
빨려 들어갔던 공기가 일제히 밀려나왔다. 거친 바람에 문사의 몸이 흔들릴 정도였다.
그 순간 어둠 속에서 주먹 하나가 튀어나왔다.
“헛!”
문사가 기겁을 하며 팔을 들어 주먹을 막았다.
콰지끈!
“큭!”
비명과 함께 문사의 주먹이 수수깡처럼 부서져 나갔다. 전신을 관통하는 충격에 문사가 기겁을 하며 뒤로 물러났다.
화아악!
순간 다시 강렬한 풍압이 밀려와 문사를 중심으로 회오리쳤다. 너무나 강렬한 바람에 문사의 몸이 순간적으로 허공으로 한 자가량 떠올랐다.
“무슨?”
문사가 경악을 하는 그 순간 어둠을 뚫고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어둠과 구별되지 않는 새까만 머리카락과 감정 없는 검은 눈동자, 그리고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칠흑 같은 피풍의를 걸친 남자가.
“권마?”
문사가 눈을 크게 치뜨며 호신강기를 펼쳤다. 하지만 호신강기를 채 반도 펼치기 전에 남자, 담호의 몸이 그에게 직격했다.
콰앙!
“컥!”
굉음과 함께 문사의 몸이 뒤로 튕겨져 나갔다.
마치 포탄처럼 쏘아진 그의 몸은 그대로 별채의 담벼락을 뚫고 나갔다.
“챠앗!”
바닥에 내팽개쳐지기 직전 그가 바닥에 손을 짚으며 몸의 균형을 되찾았다.
비록 담호에게 기습을 당해 기세가 꺾이긴 했지만 그 역시 고수라 자부하는 무인이었다. 내장이 진탕되는 중상을 입었지만, 순식간에 공력을 끌어 올려 담호의 이 격에 대응했다.
어둠을 뚫고 담호가 쇄도했다.
보통 이렇게 상대의 기세를 꺾으면 어지간한 무인들은 대화를 시도하기 마련이다.
‘웬 놈이냐?’, ‘정체를 밝혀라.’ 등등의…….
하지만 담호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기세를 잡았을 때 단숨에 숨통을 끊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고, 독행류가 지향하는 바였다.
독행류는 단순히 비무를 위한 무공이 아니라 살상을 위한 무공이었다.
쩌엉!
단공벽이 공기의 결에 충격을 줬다. 공기를 타고 전해진 충격은 문사의 고막을 파열했다.
“크윽!”
고막이 찢어지고 반고리관에 충격이 가해지자 순간적으로 문사의 움직임이 더뎌졌다.
고막 안에 자리를 잡은 반고리관은 몸의 회전과 가속을 느끼는 감각기관, 따라서 타격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반응이 더뎌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담호는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문사는 고수였다. 그것도 상승의 경지에 이른 고수. 그 정도의 고수가 반고리관이 흔들렸다고 해서 무력화될 리 없었다. 그저 잠시 멈칫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담호에겐 그 찰나의 시간이 억겁의 시간보다 길게 느껴졌다.
담호의 장심이 문사의 가슴에 흡착됐다.
츄화하학!
이어서 오지암파경이 펼쳐졌다. 나선형의 경력이 문사의 가슴을 뒤틀었다.
“크아악!”
이번만큼은 고통을 참지 못하겠는지 문사의 입에서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온몸이 해체되는 고통이 전신을 지배했다. 보통의 고수라면 이 정도에서 무너졌을 터. 하지만 문사는 자신의 무위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최후의 발악을 했다.
“챠핫!”
그가 양손을 활짝 펼치자 엄청난 거력이 뿜어져 나왔다. 묵 빛의 기류는 그대로 담호를 격중 했다.
천라신장(天羅神掌).
문사가 익힌 최고의 수법이었다.
장력이 그물처럼 촘촘히 퍼진 채 상대를 덮쳐 피할 곳이 없었다. 문사는 이 정도라면 담호를 저승길 동무로 데려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대는 담호였다.
우웅!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떨렸다. 초진동 방호기공인 방패(防牌)가 펼쳐진 것이다.
천라신장의 기운은 방패에 닿는 순간 햇살을 받은 눈꽃처럼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그 순간 문사의 머릿속에 문득 든 생각 하나.
‘호굴이 아니라 마굴(魔窟)이었구나.’
그것이 생전 그가 마지막 한 생각이었다.
쾅!
굉음이 터지고 그의 가슴이 터져 나갔다.
“컥!”
외마디 신음과 함께 문사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몇 바퀴나 구르던 몸이 멈췄을 때는 이미 숨이 끊어진 후였다.
“아!”
그제야 별채에 숨어 있던 기예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과 거친 호흡이 그녀가 얼마나 급박한 상황에 처했었는지를 보여 주었다.
연화루를 탈출한 그녀가 제일 먼저 떠올린 이는 바로 담호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곳 도강언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바로 담호가 머무는 곳이었다. 그래서 전력을 다해 이곳으로 달려왔다.
문사가 만일 조금만 더 서둘렀다면, 그래서 이곳 별채에 도착하기 전에 막아섰다면 운명이 바뀌었을지 몰랐다.
“고마워요.”
기예화가 담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담호는 대답 대신 바닥에 쓰러져 있는 문사를 바라봤다. 그때 별채 안에서 음유경이 모습을 드러냈다.
같은 별채에 머물다 보니 소란을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음유경의 등장에 기예화의 얼굴에 긴장의 빛이 떠올랐다. 음유경의 정체는 알지 못했지만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를 통해 범상치 않은 존재임을 눈치챘기 때문이다.
‘도대체 저 여인은 또 누굴까?’
담호와 함께 동행하는 여인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강호의 주목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음유경이 담호의 곁에 서며 입을 열었다.
“누군지 알겠나요?”
“아니!”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음유경의 시선이 기예화를 향했다. 의견을 묻고 있는 것이다.
기예화도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모르겠어요.”
“정말인가요?”
“진짜예요. 그런데 그쪽은 누구신가요?”
기예화가 대답하다 말고 음유경의 정체를 물었다. 그에 음유경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진실을 말해도 되는지 묻는 것이다.
담호가 대답했다.
“내가 말하지. 이쪽은 마교의 성녀 음유경, 그리고 이쪽은 하오문의 부문주인 기예화.”
“…….”
“…….”
각자의 신분에 놀란 두 여인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담호가 그녀들의 신분을 증명해 주었다. 천하에서 가장 신뢰가 가는 사람이.
기예화가 먼저 한숨을 내쉬었다.
“휴! 모든 정보력을 동원해도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이리 쉽게 내 앞에 나타나다니.”
“동감이에요. 기 소저.”
“어쨌거나 이렇게나마 뵙게 되어 반가워요, 음 소저.”
“저도…… 반가워요.”
두 여인이 포권을 취했다.
각자 처한 입장이야 달랐지만, 어쨌거나 지금은 대립할 이유가 없는 두 사람이었다.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은 통성명을 했다.
그녀들이 그렇게 인사를 하고 있을 때 담호는 물끄러미 문사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두 여인도 문사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별다른 특색이 없는 문사였다. 죽었어도 밋밋한 얼굴이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담호가 손을 뻗어 문사의 목을 잡았다. 그러자 무언가 손끝에 걸렸다. 담호는 그대로 손을 들어 올렸다.
찌이익!
순간 문사의 얼굴 가죽이 찢겨져 담호의 손에서 덜렁거렸다.
그 모습을 본 기예화가 중얼거렸다.
“인피면구?”
사람의 얼굴 가죽으로 만든 인피면구는 무척이나 정교해서 육안으로 구별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특히 담호가 들고 있는 인피면구의 정교함은 상상 이상이었다.
“인피면구라니.”
음유경의 표정이 경직됐다.
인피면구를 만드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보통은 죽은 사람의 얼굴 가죽을 벗겨 특별한 공정으로 만드는 것이 대다수였지만, 그렇게 만든 인피면구는 그리 정교하지 않았다.
역시 가장 정교한 인피면구는 살아 있는 사람의 가죽을 벗긴 것이었다. 생기가 온전히 보존되기 때문에 산 자와 표정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멀쩡히 살아 있는 자의 얼굴 가죽을 벗기기 때문에 강호의 공분을 살수밖에 없었다.
담호가 들고 있는 것도 분명 살아 있는 자의 얼굴 가죽을 벗긴 것이 분명했다. 그만큼 정교해서 오랫동안 정보 계통에서 종사해 온 기예화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인피면구가 벗겨진 후 드러난 문사의 본얼굴은 무척이나 청수했다. 젊었을 적에는 제법 미남이라고 불렸을 법한 또렷한 이목구비에 희끗희끗한 수염과 눈썹, 그리고 오른쪽 관자놀이에 난 커다란 점이 유독 인상적이었다.
기예화가 문사의 얼굴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았다. 떠오르는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인가? 하지만 그는 예전에 죽었을 텐데.”
“왜 그래요? 아는 사람인가요?”
“그게…….”
음유경의 질문에 기예화가 말끝을 흐렸다. 그만큼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담호의 시선이 기예화를 향했다.
“말해. 누구야?”
“그게…… 전체적인 특징은 제가 아는 어떤 사람과 똑같아요. 하지만 그는…….”
“누구지?”
“태극수사(太極修士) 고주월의 용모가 딱 이랬어요. 강호에서 알아주는 미남이었지만 오른쪽 관자놀이에 나 있는 커다란 반점 때문에 매력이 반감되는.”
“그런데 뭐가 문제지?”
“저희 하오문이 파악한 바로는 그는 삼십여 년도 전에 죽었어요.”
담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죽었다?”
“네!”
“그런데 사실은 살아 있었다 이 말인가?”
“맞아요.”
이제까지 기예화의 말을 듣고 있던 음유경이 입을 열었다.
“그게 문제인가요? 죽음을 위장해 은거하는 이들이 흔치는 않아도, 아주 없는 경우는 아니니까요.”
“대다수의 경우는 그렇죠. 하지만 이번에는 특별해요.”
“왜죠?”
“일차 정마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마교의 총단을 급습했던 정의맹의 결사대. 고주월은 바로 그 결사대에 포함되어 있던 무인이에요.”
“그런…….”
“마교의 총단에서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이에요. 그는…….”
일순 장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