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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89화 (28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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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9화 5장. 기연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찾아온다(2)

태극수사(太極修士) 고주월은 별호처럼 도가의 고수였다. 도가의 가장 오래된 일맥인 전진교(全眞敎)의 공부를 이어받아 특히나 내공이 심후했다.

고주월은 무척이나 의협심이 강해서 위기에 처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고 했다. 평생 수많은 의협을 행했기에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정의맹의 결사대에 포함되었을 때 누구도 놀라지 않았다.

사마(邪魔)를 끔찍이도 증오하는 고주월의 성향이라면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고 봐야 했다. 그래서 고주월이 마지막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는 소식이 알려졌을 때 많은 이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고주월은 그렇게 수십 년 동안이나 죽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 고주월이 오랜 세월을 격하고 다시 세상에 나타났다. 그것도 다른 사람으로 분해서.

“대체?”

기예화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가 알고 있는 고주월은 영웅이었다. 정마대전을 종식시킨 결사대의 일원이니 당연히 영웅 대접을 받아야만 했다.

생존 사실을 알렸다면 수많은 강호인들의 추앙을 받았을 이가 오히려 정체를 숨기고 활동하고 있었다니. 이 사실을 어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을 잡기 힘들었다.

“고주월 대협이 왜 인피면구를 쓰고 하오문을 겁박한 것일까요?”

기예화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그에 음유경의 눈이 빛났다. 그녀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때마침 담호도 그녀를 보고 있었기에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음유경이 기예화에게 말했다.

“우리 아무래도 이 일에 관해서 심각하게 의논해야 할 것 같네요.”

“무슨 말인가요?”

“기 소저도 알아 둬야 할 것 같으니 지금 말할게요.”

음유경은 기예화에게 천사교에 대해서 말했다. 그녀의 말이 길어질수록 기예화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 갔다.

처음엔 불신으로, 그다음엔 의문으로, 그리고 마지막에는 수긍하는 표정으로.

한 사람의 표정이 짧은 시간 이렇게 다채롭게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예화의 얼굴을 보면 알 수 있었다.

그제야 기예화는 그간의 의문이 속 시원히 풀리는 느낌이었다.

하오문의 부문주가 되면서 그녀는 더욱 많은 정보를 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오히려 마교와 강호 무림 간의 대전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연일 악화일로로 치닫는 것도 그랬고, 뜬금없이 삼 년이라는 시간의 공백기를 가진 것도 그랬다. 하지만 중간에 천사교의 개입이 있었다면 모든 것이 설명된다.

“그러니까 중간에 천사교의 농단이 있었다는 거네요.”

“저희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천사교는 어떤 곳인가요?”

기예화는 진심으로 궁금했다.

음유경의 설명으로 천사교가 존재한다는 것은 납득할 수 있었지만, 그들이 마교와 강호 무림의 충돌을 통해 무엇을 이루고자 하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유경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저희도 알지 못해요. 본교 이전에 존재했던 종교 집단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들에 대해서 알려진 것은 하나 없어요. 어떤 신앙을 추구하는지, 그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음!”

“한 가지만은 확실해요. 그들이 본교와 강호의 충돌을 끝없이 획책하고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음 소저는 지금 태극수사 고 대협이 천사교에 포섭되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군요. 맞나요?”

“맞아요.”

“확신하시나요? 고 대협이 변절해서 마교에 포섭된 것일 수도 있잖아요.”

“그럴 가능성은 희박해요. 세상에 알려졌다시피 신교는 힘을 숭상해요. 강자가 횡포를 부리는 것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변절자는 오히려 증오를 해요. 하물며 당사자가 정의맹의 결사대에 속했던 인물이라면 더 말할 나위 없죠.”

“으음!”

기예화가 침음성을 흘렸다. 음유경의 말이 일견 타당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굳은 얼굴로 담호와 음유경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말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그들의 뜻을 알아차렸다. 그들이 왜 천사교라는 비밀을 가르쳐 주었는지.

“하오문의 협력을 원하는 건가요?”

“맞아요.”

“후우! 정말 놀랄 만한 일이군요. 마교의 성녀와 협력이라니? 만일 강호인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본문을 강호의 공적으로 지목할 거예요.”

“그래서 거절인가요?”

“하오문의 부문주로는 거절이에요. 하지만 제 개인적으로는 당신과 협력하고 싶네요.”

기예화는 알고 있었다. 지금쯤 연화루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죽었을 것을. 공적으로는 부문주와 수하에 불과했지만, 기예화는 그들 모두를 아꼈다.

그녀가 데리고 있는 기녀들 중 좋아서 몸을 파는 여인은 없었다. 저마다 사연이 있었고, 대부분 불행한 이유 한두 가지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기예화는 그녀들의 복수를 하고 싶었다.

음유경이 힘주어 말했다.

“그럼 결정된 거네요.”

“네!”

두 여인이 협력을 약속했다.

기예화와 음유경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

현소 진인의 얼굴에 감격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앞에 사십여 개의 검은 단환이 놓여 있었다. 단환에서는 짙은 매화향이 흘러나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화산파의 무가지보라 할 수 있는 매화신단(梅花神丹)이었다. 하나만 유출되어도 세상이 떠들썩해질 수 있는 보물이 무려 사십여 개나 놓여 있는 것이다.

그의 시선이 앞에 있는 종리연과 방진보를 향했다.

“모두 고생했다. 그리고 고맙다.”

“아니에요.”

“헤헤!”

두 사람은 안색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지난 며칠 동안 두 사람은 밤잠 한번 제대로 자지 못했다. 매화신단을 만드는데 전력을 다했기 때문이다.

초췌한 것은 비단 두 사람뿐만이 아니었다. 그들의 뒤에는 삼십육매화검수들이 퀭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매화신단을 만드는 데 일조를 했기에 큰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혈령사자의 침입은 그들에게 큰 경각심을 갖게 만들었다. 만일 현소 진인의 도력이 아니었다면 혈령사자의 사술에 큰 피해를 입었을 터였다.

현실적으로 현재 화산파의 제자들이 단기간 안에 현소 진인만큼의 도력을 쌓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무력이라도 높여야 했다.

단시간에 무력을 높이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적어도 화산파 제자들이 알고 있는 한도 내에서는 말이다.

그것은 바로 매화신단이었다.

명경이 매화신단을 복용해 내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했다는 것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 때문에 현소 진인은 남은 약초들을 모조리 탈탈 끌어 모아 매화신단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첫 매화신단을 만드는 데는 무려 사흘이나 걸렸고, 결과물도 겨우 다섯 개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미 한 번 해 본 일이었다. 두 번째부터는 한결 수월하게 매화신단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간도 훨씬 단축되었다. 대신 매화신단을 만드는 데 동원된 이들이 초주검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현소 진인이 말했다.

“모두의 노력 덕분에 매화신단 사십여 개가 완성되었다. 종리 소저와 너희들의 피땀이 매화신단에 녹아 있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고, 하늘도 알고 있을 것이다. 정말 모두 고맙다.”

“아닙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삼십육매화검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매화신단을 만들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약재를 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화산파의 전 제자들에게 매화신단을 한꺼번에 복용시키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이 그저 슬플 뿐이구나. 허나 내 분명히 약속하겠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다른 제자들에게도 매화신단을 만들어 복용시키겠다고.”

“무량수불!”

현소 진인의 선언에 삼십육매화검수들이 감격한 표정을 지었다.

오직 선택받은 이만 복용할 수 있는 매화신단이었다. 약재를 구하는 것부터가 쉬운 일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많은 이의 피땀이 요구되는 귀물이었다. 그런 엄청난 물건을 전 제자에게 복용시키겠다는 현소 진인의 배포가 그저 놀라울 뿐이었다.

현소 진인이 곁에 서 있던 운경을 불렀다.

“장문인.”

“예! 사숙.”

“장문인과 명경이 한 알씩 복용하시오.”

“무량수불! 저는 굳이 복용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도 마찬가집니다. 오래전에 한 알을 복용했으니 이번에는 넘어가도 됩니다.”

운경과 명경이 놀라서 사양했다. 하지만 현소 진인은 완고했다.

“두 사람이야말로 본파의 실질적인 핵심이오. 두 사람이 강해야만 화산에 든든한 뿌리가 내릴 수 있소. 그러니 사양 말고 복용하시구려.”

현소 진인이 이렇게 나오자 두 사람도 더 사양할 수가 없었다.

“알겠습니다.”

“그리하겠습니다.”

결국 두 사람이 공손히 매화신단 한 알씩 받았다.

현소 진인이 이번에는 삼십육매화검수의 수장이라 할 수 있는 원명을 불렀다.

“원명.”

“예! 태상 장로님.”

“나머지 매화신단은 너희들이 복용하거라.”

“감사합니다.”

“매화신단을 만드는 데 종리 소저와 진보가 얼마나 큰 심혈을 쏟아 부었는지 너희들이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반드시 약효를 모조리 흡수해야 할 것이다.”

“명심하겠습니다.”

원명이 고개를 숙여 서른여섯개의 매화신단을 받았다.

그의 등 뒤에서 삼십육매화검수들이 눈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원명은 그들에게 매화신단을 건네주기 전에 먼저 종리연과 방진보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고맙습니다, 종리 소저. 진보야, 이 은혜 잊지 않으마.”

“두 사람의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원명의 뒤를 이어 삼십육매화검수들이 일제히 한 목소리로 감사를 표했다. 그에 종리연과 방진보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두 사람 모두 공치사를 듣는데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현소 진인이 그런 두 사람을 보며 빙긋 웃었다.

“두 사람도 고생했으니 한 알씩 복용하거라.”

“예? 아니에요. 그럴 수 없어요.”

“저도 그럴 수 없어요.”

두 사람이 손사래를 치며 극구 사양했다.

매화신단은 화산파를 위한 영약이었다. 만드는 데 일조를 하지만 자신들이 복용한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현소 진인이 그런 두 사람의 손에 매화신단을 억지로 한 알씩 쥐어 주었다.

“사실 이건 뇌물이란다.”

“뇌물?”

“그래! 너희들이 아니면 누가 또 매화신단을 만들 수 있겠느냐? 그러니 이 매화신단을 복용하고 힘을 내서 다시 만들어 달라는 뜻이다. 제발 이 늙은이의 염치없는 소망을 들어다오.”

“아!”

그제야 두 사람이 거의 동시에 탄성을 내뱉었다. 그들은 더 이상 매화신단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래도 부담스러운 마음에 뒤를 돌아보니 삼십육매화검수들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종리 소저와 진보는 매화신단을 복용할 자격이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저희는 신경 쓰지 마시고, 복용하십시오.”

그들의 미소에 두 사람은 그나마 부담을 지울 수 있었다.

짜악!

현소 진인이 손바닥을 쳐 주의를 환기시켰다.

“어차피 복용해야 한다면 미룰 이유가 없다. 우선 삼십육매화검수들 먼저 매화신단을 복용하거라. 장문인과 명경, 그리고 화산파의 전 제자들이 호법을 설 것이다.”

“존명!”

“태상 장로님의 명을 받드옵니다.”

삼십육매화검수들이 일제히 대답했다.

밖에는 화산파의 전 제자들이 이중 삼중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들이 경계를 서고 있는 지금이 가장 안전했다. 그럼에도 운경과 명경은 혹시나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경계 태세를 갖췄다.

삼십육매화검수들이 일제히 매화신단을 복용한 후 운공에 들어갔다. 그들은 오직 매화검수에게만 전수되는 상청심공(上淸心功)을 운공했다. 그 때문에 그들이 내뿜는 기운은 대동소이했다.

그들은 서두르지 않고 서서히 매화신단의 약효를 흡수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갔다.

‘아!’

방진보와 종리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삼십육매화검수들의 몸에서 새하얀 운무가 발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운공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였다.

매화신단의 효능은 실로 대단해서 그들은 짧은 순간 엄청난 양의 내공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데 기연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츠으으!

서른여섯명의 매화검수들이 발산한 운무가 서로의 모공을 드나들기 시작한 것이다.

원명이 발산한 운무가 원공의 모공을 드나들었고, 마찬가지로 원공의 몸에서 흘러나온 운무가 다른 매화검수의 몸을 드나들었다.

그들이 발산하는 운무는 내공의 결정체였다. 서로의 내공이 합쳐져 더 큰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서른여섯 명 모두 상청심공이라는 공통의 심공을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제 운무는 삼십육매화검수를 완전히 뒤덮은 채 일렁이고 있었다. 그들은 같은 기운 아래 호흡하고, 흡수했다.

강대한 기운에 혈맥에 쌓인 탁기가 씻겨 나가고, 전신의 혈도가 막힘없이 개통됐다.

마치 절대고수가 벌모세수(伐毛洗髓)를 해 준 것과 같은 효과를 보는 것이다.

그들의 기운은 그야말로 눈덩이처럼 순식간에 불어났고, 운무는 마치 천하의 모든 기운을 잡아먹을 듯 일렁였다. 그것은 천하의 현소 진인도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다.

현소 진인의 노안에 뿌연 습막이 어렸다.

‘원시천존이시여!’

화산에 일대 기연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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