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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292화 (2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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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2화 6장.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2)

남자는 무척이나 말랐다. 어찌나 말랐던지 광대뼈가 툭 불거져 나오고 두 눈은 움푹 들어가 음산함을 더했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이었다. 남자의 옷은 무척 괴상했다. 적갈색으로 피풍의와 비슷했는데, 바람이 불지 않는데도 제멋대로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꼭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남자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바닥에 남은 흔적을 살피고 있었다. 그런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역시 설산으로 향했나?”

그가 고개를 들어 북쪽을 바라봤다. 그러자 광활한 평원 넘어 우뚝 서 있는 설산이 보였다.

만물이 생동하는 봄이었다. 그 증거라도 보여 주듯 평원에는 녹음이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하지만 저 멀리 보이는 산은 계절을 부정이라도 하듯이 새하얀 눈에 덮여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리 멀어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는 무척이나 먼 거리에 존재했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설산을 신성한 산이라 부르며 경외했다.

남자가 설산을 보며 눈을 빛낼 때였다.

사락!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여인이었다.

그녀의 모습 역시 평범한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멀리 보이는 설산처럼 새하얀 장포 위로 폭포수처럼 검은 머리카락이 쏟아져 내리고, 검은 머리카락 아래 주먹만 한 조그만 얼굴이 자리하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피부와 반쯤 내리깔고 있는 눈썹 아래 자리한 얼음처럼 차가운 눈동자가 유독 인상적인 미인이었다. 그녀의 허리에는 마치 얼음을 얼려놓은 것 같은 검이 걸려 있었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여인을 바라봤다.

“하경.”

“그의 흔적은 찾았나요?”

남자가 대답 대신 저 멀리 보이는 설산을 바라봤다. 그것으로 대답이 되었다.

“설산으로 갔군요."

“거기밖에 선택지가 없었겠지.”

“정말 설산으로 갔다면 오히려 수월해지겠군요.”

“그렇게 생각하나?”

“아닌가요?”

“그 정도의 남자가 아무런 계산도 없이 설산으로 향하지는 않았을 터.”

남자의 대답에 여인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남자의 이름은 백온우, 마룡포(魔龍袍)라는 이름을 가진 마병(魔兵)의 주인이었다.

겉모습은 삐쩍 말라 볼품이 없었지만 결코 우습게 볼 존재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는 추적에 능통했다.

십병의 우두머리인 정천악조차 추적과 은신, 침투에 관해서는 한 수 접어줄 정도였다.

백온우는 십병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여인, 서문하경 역시 백온우처럼 십병 중 한 명이었다.

십병(十兵)은 무기가 아닌 사람을 의미했다. 인간의 몸으로 신병이기만큼이나 강력한 살상력을 가진 열 명의 인간이 바로 십병이었다.

서문하경의 허리에 달린 빙옥도(氷玉刀)는 백온우의 마룡포에 뒤지지 않는 마병이었다. 그만큼 끔찍한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서문하경의 무력이었다.

겉보기엔 여리하게 보이지만 그녀의 무력은 십병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했다. 그 때문에 백온우조차도 그녀를 경시하지 못할 정도였다.

백온우가 물었다.

“천악은?”

“이미 이곳에 와 있어요.”

“그런가? 그답군.”

“원래 성격이 그렇잖아요. 모든 것을 자신이 챙겨야만 만족하는 사람이니까요.”

“하긴 그러니까 십병의 우두머리가 된 거겠지. 어쨌거나 천악까지 합류했다면 일이 쉬워지겠군.”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요. 당신도 봤잖아요. 그의 무위를.”

“말이 되지 않을 정도로 강했지.”

백온우가 고개를 끄덕이며 마룡포를 들췄다. 그러자 선혈로 붉게 물든 옆구리가 보였다. 그에게 당한 상처였다.

마룡포로 전신을 보호했는데도 이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 마룡포가 없었다면 즉사했을 것이다.

“허나 놈은 지치고 상처 입었다. 놈은 반드시 우리 손에 죽을 것이다.”

“십병이 모두 동원된 이상 그가 살아남는다는 것은 불가능해요. 하지만 조심해야 해요. 쥐도 궁지에 몰리면 덤비는데, 하물며 그 정도의 강자라면 더 말할 나위 없죠.”

“그렇겠지. 내가 궁금한 것은 그 정도의 강자가 어떻게 이제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느냐 하는 거다. 그것도 본교 출신이라는데.”

백온우의 말에 서문하경이 살짝 눈을 찌푸렸다. 그리고 백온우는 그런 그녀의 반응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너는 알고 있었나보군.”

“…….”

“그러고 보니 너도 천금마옥 출신이었지? 그렇다면 놈을 몰랐다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군.”

백온우가 눈을 빛냈다.

“맞아요. 나는 그를 알고 있었어요.”

“그래서 놈을 동정하는 것은 아니겠지?”

“동정한다구요? 내가 왜요?”

“아닌가?”

“흥! 같은 공간에 함께 머물렀다고 해서 모두가 친한 것은 아니에요. 하물며 그처럼 음흉한 자와는…….”

서문하경의 목소리엔 은은한 적개심이 담겨 있었다. 실제로 ‘그’를 언급하면서부터 그녀의 반응은 눈에 띄게 격해진 상태였다.

“그럼 됐군.”

백온우가 고개를 주억거리며 몸을 돌렸다. 원하는 대답을 들었으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그런 백온후의 등을 바라보며 서문하경이 눈을 빛냈다.

‘재수 없는 새끼.’

십병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어린 시절을 천금마옥에서 보낸 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

서문하경은 전자였고, 백온우는 후자에 속했다.

그들 사이엔 묘한 간극이 존재했고, 가끔 이렇게 입안에 씹히는 조그만 돌멩이처럼 껄끄럽기도 했다.

백온우가 앞서 걸으며 말했다.

“서두르지. 놈이 또 어떤 수작을 부릴지 모르니까.”

“알겠어요.”

서문하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따랐다.

앞서 걷던 백온우가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곧 마모께서 도착하실 것이다.”

***

담호와 음유경, 신무월은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신무월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말을 타는 대신 배를 타고 이동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다행히 도강언에서 목리 인근까지 강이 연결되어 있었기에 음유경은 배 한 척을 통째로 빌렸다.

사공의 솜씨는 무척이나 출중해서 혼자서도 배를 능숙하게 배를 몰았다. 덕분에 신무월은 배를 타고 있는 내내 가부좌를 틀고 운공을 할 수 있었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도 신무월의 집중력은 흐트러지지 않았다. 그는 체내 한쪽으로 몰아 두었던 독기를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었다.

음유경은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담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담호는 선수에 석상처럼 서 있었다.

팔짱을 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그의 뒷모습은 화산을 연상시켰다.

헤아릴 수없이 오랜 세월을 그 자리에서 버텨 온 거악(巨岳)과도 같은 그의 모습은 화산과 완벽하게 일치했다.

‘화산권마.’

이제 사람들은 담호를 단순히 권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화산이라는 두 글자를 붙여 화산권마라 부른다.

화산의 역사상 담호처럼 강렬한 존재감으로 천하에 우뚝 섰던 무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곧 화산이었고, 화산이 곧 담호였다.

그런 담호와 함께하는 것은 무척이나 든든하면서 부담스러웠다.

이제까지 그랬듯 담호를 통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지금 동행도 이해가 일치했기 때문이지, 담호가 순수한 마음에서 음유경을 도우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든든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불안한 마음이 어느 정도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휴!”

음유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들어 한숨이 부쩍 는 음유경이었다. 하지만 정작 음유경은 그런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심경은 복잡했다.

‘사……부.’

애써 잊어버리고자 했던 그 얼굴과 이름이 불현듯 떠올랐다.

어린 시절 자신을 보듬어 안던 그녀의 따스했던 품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났다. 그 당시 그녀는 정말 헌신적으로 음유경을 보살폈었다.

어린 음유경에게 그녀는 어미 대신이었고, 세상의 모든 것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은 적으로 맞서야 한다는 사실이 그녀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갑자기 밀려드는 한기에 음유경이 양어깨를 움츠리며 두 손으로 감쌌다.

그때 사공의 목소리가 모두의 상념을 깼다.

“이제부터는 두 개의 강이 합쳐져 하나로 흐르니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아마 배들도 많이 늘어날 겁니다.”

담호는 고개를 들었고, 신무월도 운공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휴!”

신무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불과 하루 사이에 그의 안색은 많이 좋아져 있었다. 아직도 독기가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정도면 움직이는 데는 지장이 없을 것 같았다.

신무월이 음유경에게 다가갔다.

“사저.”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다행이야.”

“마음고생하게 해서 죄송할 뿐입니다.”

“아니야!”

음유경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에 내린 그늘은 쉽게 펴질 줄 몰랐다.

신무월은 그런 음유경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사저.”

“으응? 왜?”

“괜찮습니까?”

“괜찮아.”

“휴! 괜찮을 리 없잖습니까?”

신무월이 한숨을 내쉬었다. 언제나 웃음과 여유가 가득하던 신무월이었다. 그런 신무월의 마음조차 심란한데 음유경이 멀쩡하다면 오히려 이상했다.

“나는 그들 중 일부만 알고 있지만 사저는 그들 모두를 알고 있잖습니까? 그들과 다시 만난다는 사실 자체가 고역일 겁니다.”

“그래! 마음이 그리 편치는 않아.”

“그게 당연한 겁니다.”

“하필 그들이 십병이란 이름으로 나타나다니.”

“그러게 말입니다.”

음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었다.

십병이라는 이름 아래 뭉친 그들은 한때 음유경의 동료였고, 정을 나누던 친우들이었다. 비록 가는 길이 달라 어린 시절 헤어졌다지만 이제와 그들과 검을 겨눠야 한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지옥이 펼쳐질 겁니다.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해요.”

예전의 친구들이 적이 되었다. 그들에게 검을 겨누기 위해서는 이쪽도 단단한 각오가 필요했다.

신무월은 그 점을 말하고 있었다.

음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어. 단지…… 마음이 아플 뿐이야.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해합니다.”

“휴우! 목리까지는 얼마나 더 가야 하지?”

“이대로만 간다면 이삼 일 안에 도착할 수 있을 거예요.”

“부디 늦지 않아야 할 텐데.”

“걱정하지 마십시오. 대형은 그렇게 쉽게 당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누군지 잊었습니까?”

“그래! 그는 불굴이니까.”

음유경의 대답에 신무월이 미소를 지었다.

불굴(不屈).

검율천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절대 굴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래서 그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신무월의 시선이 문득 선수에 서 있는 담호를 향했다.

제아무리 잔잔한 강물이라 할지라도 배는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요동치고 있었다. 그런 배 위에서도 담호는 한 치도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몇 시진째 보여 주고 있었다.

‘저자 역시 불굴의 길을 걷는 남자.’

지금까지 보여 준 담호의 행보가 그랬다. 이제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비록 노선은 다르지만 담호는 단 한 번도 물러나거나 우회한 적이 없었다. 오직 앞만 보고 묵묵히 걷는 그의 행보는 신무월조차도 감탄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대형과 저 남자는 언젠가 정상에서 맞붙게 될 것이다.’

한 산에 두 마리의 호랑이가 있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더구나 두 마리의 호랑이가 다른 호랑이들에 비할 수 없을 만큼 크고 흉포하다면 말이다.

신무월이 고개를 저으며 음유경에게 말했다.

“선실로 들어가시죠. 지금은 조금이라도 쉬면서 체력을 비축해야 할 때입니다.”

“그래야겠지.”

음유경이 고개를 끄덕이며 신무월과 함께 선실로 들어갔다.

홀로 남은 담호는 그들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사공의 말처럼 두개의 강이 합류하고 있었다. 더불어 강 위에 떠 있는 배도 눈에 띄게 많아졌다.

담호가 타고 있는 배처럼 그리 크지 않은 배도 있었고, 수많은 이들을 태울 수 있는 거대한 운마도강선도 보였다.

그중 제법 큰 선박 한 척이 눈에 띄었다.

배 자체는 평범했다. 하지만 배 위로 언뜻 보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평범하지 않았다.

일반적인 배에서 볼 수 있는 선원들 대신 커다란 방갓을 눌러쓰고 피풍의로 전신을 가린 여인들이었다.

그녀들은 숙련된 사공처럼 노련하게 배를 몰며 강을 헤쳐 나가고 있었다.

배의 선수에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서 있었다. 붉은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과 담호의 시선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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