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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3화 6장.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되어 있다(3)
“흐음!”
붉은 면사의 여인이 흥미롭다는 눈을 빛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에 조그만 배가 있었다. 그녀가 타고 있는 배와 비교도 할 수 없는 조그만 배. 그 위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강바람에 펄럭이는 검은 피풍의를 걸친 남자였다. 바람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카락 때문에 진면목을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사나운 눈빛만큼은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두 사람이 탄 배가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갔다.
크기가 다른 만큼 속도 또한 비교할 수 없었다. 남자가 탄 배가 거북이라면 그녀가 탄 배는 새만큼이나 빨랐다.
순식간에 그들은 멀어졌고, 남자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남자의 잔영이 남아 눈에 어른거렸다.
‘누구지?’
면사 사이로 드러난 여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파일 때였다.
“왜 그러십니까?”
선실 안에서 장대한 체구의 남자가 걸어 나왔다.
적갈색의 장발에 부리부리한 두 눈, 그리고 사위를 압도하는 엄청난 존재감과 기세를 가진 사십 대 후반의 남자였다.
마치 커다란 수사자가 걸어 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나타나자 배를 몰던 여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예를 표했다.
붉은 면사의 여인이 남자를 보며 말했다.
“좀 쉬셨나요?”
“덕분에 푹 쉬었습니다. 그런데 강에 뭐가 있기에 그리 유심히 바라보시는 겁니까? 뭐,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몸은 좀 어떻나요?”
“하하! 근질거리는 것 빼곤 괜찮습니다.”
“그거 다행이네요.”
면사에 가려지지 않은 여인의 눈이 곡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지 여인의 눈가엔 희미한 주름이 보였다. 하지만 면사와 주름으로도 여인의 아름다움을 완전히 숨길 수는 없었다.
남자는 잠시 여인을 바라보다 주변으로 눈길을 주었다.
강을 중심으로 그림 같은 풍광이 펼쳐져 있었다. 야트막한 구릉이 끝없이 이어져 있었고, 그 위로 짙은 녹음이 드리워져 있었다. 구릉 위에는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전설에 나오는 무릉도원이 있다면 이런 풍경일까 싶을 정도로 인상적이었다.
“좋군!”
남자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풍광을 감상했다. 붉은 면사의 여인은 그런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북철왕.’
그때 그녀의 상념을 깨우는 목소리가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뱃일을 하는 여인들의 목소리와 함께 배가 선착장에 도착했다.
붉은 면사의 여인이 선착장으로 내려가며 말했다.
“너희들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거라.”
“예!”
그녀들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붉은 면사의 여인과 남자가 걸음을 옮겼다.
선착장을 지나 한참을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들의 눈앞에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비탈진 산기슭을 따라 수많은 논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이제 막 모를 심었는지 논에는 벼들이 새싹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곳에서 모를 심고 있는 노인이 있었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채 모를 심고 있는 노인의 머리카락은 마치 눈이 내린 듯 새하얬다. 노인에게선 마치 선인처럼 탈속한 풍모가 엿보였다.
붉은 면사의 여인이 노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노인의 움직임이 딱 멎었다.
“노야.”
“…….”
“저 운향이에요.”
그녀의 말에 노인이 한숨을 내쉬며 뒤돌아봤다.
“네가 어찌 이곳까지 왔느냐?”
“‘우연히’라고 말하면 당연히 믿지 않겠죠?”
“네가 얼마나 철두철미한 아이인지는 내가 잘 알고 있다.”
“맞아요. 하지만 이번엔 진짜예요. 근처에 있는 목리에 볼일이 있거든요. 노야가 이곳에 머물고 계시다는 것은 우연히 알았구요.”
“우연히라…….”
노인은 믿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붉은 면사의 여인이 노인을 향해 포권을 취했다.
“소녀 단운향이 전검류의 주인을 뵈어요.”
“성녀……. 아니, 이제는 마모라 불러야 하나? 실로 오랜만이구나.”
노인은 바로 천오경이었다.
삼 년 전 화산에서의 싸움 이후 모습을 감췄던 그가 이곳에 은거하고 있었던 것이다.
천오경은 미간을 찌푸린 채 단운향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단운향이 얼굴을 가리고 있던 붉은 면사를 걷었다.
삼십 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아름다운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너는 여전히 어여쁘구나.”
“저도 나이를 먹었는걸요. 이젠 더 이상 주름을 억누르는 것도 쉽지 않아요.”
“원래 천리를 거스르는 것은 쉽지 않은 법이다.”
“겨우 얼굴의 노화를 누르는 것 정도로 천리를 어긴다고 할 수 있을까요? 적어도 노야처럼 피바람을 일으켜야죠.”
“너?”
“삼 년 전 종남과 화산에서 일으키신 혈겁 인상적이었어요. 덕분에 본교의 숨통이 트였으니 도움도 되었구요.”
단운향이 싱글싱글 웃었다. 반대로 천오경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었다.
만일 다른 사람이 그의 앞에서 이런 말을 했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는 단운향였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단운향은 수줍음 많던 어린 소녀였다. 전대 성녀의 손에 이끌려 천오경에게 인사를 하러 왔던 아이.
유독 천오경을 따랐고, 실제로 열 살 때까지 전검류에서 수학을 했었다. 단운향의 무공 기초를 잡아 준 이도 바로 천오경이었다. 그렇기에 누구보다 단운향을 아끼고 사랑했었다.
어리기만 했던 소녀는 성녀가 되었고, 마교의 몰락을 지켜봤다. 그리고 성녀라는 거추장스러운 지위를 버리고 마모가 되었다.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천오경에게 단운향은 아픈 손가락과 같았다.
천오경이 자신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노야, 그렇게 한숨 쉬실 필요 없으세요. 오늘은 진짜 인사만 드리러 온 거니까요. 말씀드렸다시피 용무는 다른 곳에 있거든요.”
“무슨 일이냐?”
“말씀드리면 도와줘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
“호호! 농담이에요. 그리 경계하실 필요 없어요. 그러지 않으셔도 노야의 도움은 기대하지 않아요. 대신 힘이 되어 줄 만한 분을 모셔왔지요.”
순간 이제까지 단운향의 등 뒤에서 침묵하고 있던 남자가 앞으로 나섰다.
“인사하는 것이 늦었습니다, 노야! 저 석무강입니다.”
외모만큼이나 박력 있는 목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마치 사자가 포효를 하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천오경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북철왕…… 자네가 움직인 것인가?”
“노야께서 화산에서 한바탕 몸을 풀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하하하!”
석무강이 호탕하게 웃었다. 하지만 천오경은 웃을 수가 없었다.
“으음! 벽암류가 움직이는 건가?”
“하하하! 전검류가 움직였는데, 벽암류라고 가만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천오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벽암류(碧巖流).
전검류와 마찬가지로 마교 십삼지파 가운데 하나였다. 전검류처럼 일인전승으로 전해지는 유파였다.
일인전승으로 내려온다 함은 그만큼 강력한 무위를 소유하고 있다는 뜻. 벽암류의 계승자들은 북쪽의 철왕, 그래서 북철왕(北鐵王)이라 불린다.
단운향의 미소가 짙어졌다.
“노야 덕분이에요. 노야가 전례를 만들어 준 덕에 그동안 망설이던 분들도 이렇게 모실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
“그래서 겸사겸사 감사의 인사도 할 겸 찾아왔어요.”
천오경이 단운향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아직도 날 원망하는 것이냐? 내가 삼십 년 전 총단이 침입당했을 때 나서지 않아서.”
“설마요? 말씀드렸잖아요. 감사한다고. 왜 믿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단운향이 곱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아프게 천오경의 가슴에 박혔다.
‘업보구나.’
***
배가 목리 인근 선착장에 정박했다.
낡은 선착장과 조그만 규모의 마을이 담호 등을 맞이했다.
담호는 흑귀를 데리고 배에서 내렸고, 음유경과 신무월이 그 뒤를 따랐다.
무척이나 조그만 마을이었다. 가구 수라고 해 봐야 겨우 백여 채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제법 정갈한 것이 괘나 정성스럽게 가꾼 것이 분명했다.
이곳에 마을을 가꾼 이들은 한족이 아닌 원주민들이었다. 이들은 머리에 큰 가죽 모자를 쓰고, 가죽으로 만든 상의를 입었는데, 특히 몸에 많은 장신구를 차고 있었다.
원주민들은 이곳 목리에서 논을 개간하거나, 말과 양 등을 키우면서 자유롭게 살았다. 그런 자유로운 기질 때문이지 모르지만 그들은 외지인에 대해 그리 반감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외지인을 더욱 극진히 대접하는 풍습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담호 등을 바라보는 원주민들의 눈에는 두려움이 담겨 있었다. 단순히 외지인이기 때문이라고 보기엔 그들의 반응이 너무 격정적이었다.
“대체?”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의 반응에 음유경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다 어느 한 곳에 시선이 딱 멈췄다.
원주민이 십여 명 정도 모여 있는 그곳에 ‘그’가 있었다. 그것도 의자에 앉은 채.
그는 마치 유람을 나온 것처럼 의자에 편히 앉아 두 사람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음유경과 신무월은 한눈에 그를 알아봤다.
“동……화운.”
“하하! 오랜만에 보는데 알아보는군. 두 사람 모두 반가워.”
동화운이라 불린 사내가 싱글싱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하지만 그의 인사를 받는 음유경과 신무월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신무월의 표정은 썩어 문드러질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동화운.”
“오랜만이야, 무월. 그리고 성녀도…….”
동화운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평범한 체구에 평범한 얼굴이었다. 웃는 얼굴이라는 것을 제외하면 그리 특출해 보이는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그나마 특징이 있다면 허리에 차고 있는 한 쌍의 동발(銅鈸)이었다.
동발은 솥뚜껑처럼 생긴 원반이었다. 서로를 부딪치면 경쾌한 쇳소리가 나는데, 이 때문에 주로 연주에 사용됐다.
챙그랑!
동화운이 움직이자 동발이 부딪치며 맑은 쇳소리가 났다. 동화운은 그 소리를 즐기는지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반대로 음유경과 신무월의 안색은 더욱 경직됐다.
예전부터 동화운은 전령과도 같은 존재였다.
동화운이 나타나면 십병도 근처에 있다는 뜻이다.
신무월이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자 동화운이 피식 웃었다.
“그놈의 의심은 여전하군. 뭐, 어느 정도 이해는 한다만…….”
“동화운.”
신무월이 이빨을 뿌득 갈며 동화운을 향해 발을 내디딜 때였다. 동화운이 코끝을 찡그리며 말했다.
“나라면 그러지 않을 거야.”
“무슨 개소리냐?”
신무월이 개의치 않고 동화운에게 다가갈 때였다.
콰르르!
“으아악!”
동화운의 근처에 있던 원주민의 몸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아 오르며 처절한 비명을 질렀다.
같은 마을 주민의 몸에서 불길이 치솟아 바닥을 나뒹구는데도 다른 마을 주민들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은 공포로 일그러져 있었고, 눈에서는 굵은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무슨?”
방금 전까지 멀쩡하던 사람이 눈앞에서 불에 타 죽는 끔찍한 광경에 신무월이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이내 어떤 사실을 떠올리고 욕설을 내뱉었다.
“개새끼! 아직도 그 버릇을 고치지 못한 거냐?”
“쯧! 여전히 입이 거칠구만. 나는 대화를 하러 온 것뿐인데.”
“네가 대화를?”
신무월이 살벌한 기세를 발산하며 동화운에게 다가가려 했다. 그러자 동화운이 고개를 흔들며 손가락을 튕겼다.
“끄아아!”
그 순간 근처에 있던 주민 한 명이 다시 시뻘건 불길에 휩싸였다. 그 충격적인 모습에 음유경과 신무월의 몸이 석상처럼 딱 굳었다.
어린 시절 동화운의 별명은 화염마(火焰魔).
살아 있는 생명체에 불을 붙이고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을 보고 즐기는 가학적인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엔 조그만 벌레, 쥐 등으로 시작했지만 점차 대상이 큰 동물로 옮겨 갔고, 종국에는 사람을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사람을 효율적으로 불태우기 위해 화기(火器)를 연구했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 낸 것이 구천화혼탄(九天火魂彈)이라는 이름의 소형 벽력탄이었다. 겉보기에 구천화혼탄은 조그만 쇠구슬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는 매우 특별하게 제조한 화약과 각종 재료가 들어 있다.
구천화혼탄은 매우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특수한 음공에 의해 격발장치가 작동된다.
일단 구천화혼탄이 터지면 지옥화라는 불꽃을 피워 내는데 일단 몸에 붙으면 절대 꺼지지 않는다.
무공을 익히는 것과 별개로 순전히 자신의 욕망을 위해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던 지옥화를 만들어 낸 그의 집념은 공포스러울 정도였다. 그래서 또래의 친구들에게도 배척받아 외톨이로 생활해야 했다.
동화운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흐흐! 이해해 달라구. 난 겁쟁이라서 이 정도의 안전장치는 해 놔야 안심할 수 있거든.”
“설마 모든 마을 사람들에게 구천화혼탄을 먹인 거냐?”
“아! 나도 그렇게 악마는 아니라구. 내 주위에 있는 녀석들에게만 먹였지. 그 정도로도 충분하거든.”
구천화혼탄은 사탕만 한 크기였다. 강제로 먹이면 배를 가르기 전에는 빼낼 방법이 없었다.
“왜?”
“말했잖아. 마음 편히 대화를 하고 싶다고. 이 정도의 안전장치를 해 놓지 않으면 네가 미친 멧돼지처럼 날뛸 것이 분명하니까.”
“대화?”
“그래! 대화.”
동화운이 주변을 둘러보며 킥킥 웃었다.
마을 사람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기분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