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1
301화 1장. 하얀 눈 위에 피로 그림을 그리다(1)
계절은 봄을 지나 여름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데, 가의천은 마치 한겨울 설원에 알몸으로 서 있는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제기랄!’
마치 칼바람을 알몸으로 맞는 것처럼 전신의 살가죽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담호의 전신에서는 음습한 냄새가 풍기고 있었다. 혼탁하기 그지없는…… 사람의 심령 기저까지 흔드는 혼돈의 냄새가.
지잉!
머릿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아주 오래전, 아무런 힘도 없던 그때…….
무기력하게 주저앉아서 죽음을 기다렸어야 했을 그때 맡았던 음습한 냄새가 딱 이랬다. 그래서 알고 있었다.
이 음습하면서 혼탁한 냄새의 정체가 무엇인지.
죽음이 찾아오는 전조(前兆).
가의천이 피를 토할 것처럼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인정할 수 없다. 네놈이 죽음, 그 자체라도 된단 말이냐? 나는 더 이상 무기력한 어린아이가 아니다. 나는 네놈을 죽일 것이다. 네놈을 죽임으로써 죽음을 극복할 것이다.”
가의천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폭발적인 광기(狂氣)였다.
염수강이 이를 꽉 깨물었다. 어찌나 힘껏 깨물었는지 잇몸 사이로 붉은 선혈이 흘러나왔다.
광기는 두려움을 없애게 만들고 투지를 고취시킨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두려움을 느끼기에 스스로의 이지를 날려 버린 것이다.
‘죽음을 물고 오는 짐……승.’
그제야 그는 담호의 실체를 알 것 같았다.
자신들이 경험한 지옥은 진정한 지옥이 아니었다.
담호와 싸우고 있는 이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지옥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지옥은 이제 시작되고 있었다.
꽈악!
그가 주먹을 꽉 쥔 그 순간에도 담호는 서서히 걸어오고 있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들이 그렇게 비웃었던 절룩이는 걸음으로.
그때는 비웃었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었다. 턱 근육은 제멋대로 실룩거리고, 눈가는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권……마.”
무심히 들어 넘겼던 그의 별호 두 자가 가슴에 사무치게 다가오고 있었다.
가의천이 광기에 휩싸인 채 중얼거렸다.
“병신 새끼가…….”
그는 담호를 인정할 수 없었다.
그가 그토록 경시했던 절름발이 따위에게 밀리고 있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마치 자신의 인생을 통째로 부정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어디서 병신 새끼가……. 나는 절대 인정할 수 없어. 인정할 수 없다고.”
“네 인정 따윈 필요 없어.”
“뭐?”
담호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다리를 저는 게 어떻단 말인가?
인생을 살다 보면 뜻하지 않게 항거불능의 사태와 맞닥트리기도 한다. 담호가 다리를 다친 것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단지 큰 사고였을 뿐이다.
문제는 그런 사고를 당한 후 어떻게 행동하느냐였다.
비록 다리를 절지언정 담호는 단 한순간도 자신의 인생을 포기하거나 비관하지 않았다. 묵묵히 삶의 파고를 헤쳐 지금 이 자리에 섰다.
다리를 조금 전다고 해서 그의 삶의 가치가 훼손되지는 않는다.
가의천 따위가 이해를 하지 못한다고 해서, 또 비웃는다고 해서 담호의 삶이 폄하가 되는 것은 아니다.
쿵!
바닥에 깊은 족적이 패였다.
담호가 걸어온 삶의 족적이었다.
무겁고도 깊었다. 그래서 깊은 울림이 담겨 있었다.
그의 눈과 걸음은 가의천과 염수강을 향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감히 담호의 눈과 걸음걸이에 담긴 깊은 울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제야 염수강은 자신들이 우습게 본 남자가 이제까지 만나 온 그 어떤 존재와도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무섭다.’
그 직후 썰물처럼 한꺼번에 밀려드는 오한. 마치 몸살에 걸린 것 같았다. 그리고 담호가 해일처럼 밀려왔다.
“큭!”
가의천은 특유의 경공을 펼쳐 담호의 공격을 피하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부러진 왼쪽 다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담호의 손바닥이 그의 가슴에 흡착됐다. 이어 나선형의 경력이 발산됐다.
오지암파경(五指巖破勁)이 펼쳐진 것이다.
촤화학!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가의천이 뒤로 훌훌 날아갔다. 그런 그의 가슴에 나선형의 피멍이 생겨났고, 내장이 진탕되었다.
아득한 고통에 가의천의 정신이 일순 날아갔다.
“의천!”
염수강이 가의천을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멀쩡한 손으로는 현현마옥수를 펼치고, 손가락이 부러진 팔로는 가의천의 몸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담호의 공격은 한 손으로 막아 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쾅!
파성추와 현현마옥수가 격돌하며 두 사람의 몸이 충격으로 들썩였다.
염수강은 가의천의 몸을 붙잡은 채 물러났고, 담호는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차이가 두 사람의 운명을 갈랐다.
콰콰콰!
담호의 몸 주위로 폭강이 휘돌았다. 폭마경을 펼친 것이다.
그 순간 염수강은 거대한 폭풍을 보았다.
그의 망막을 가득 채운 채 확대되는 폭강의 기류.
쿠와아앙!
천지를 울리는 거대한 굉음과 함께 한 덩이 혈구가 튕겨 나갔다. 염수강이었다.
얼굴이 짓뭉개지고, 온몸의 뼈란 뼈가 모조리 부서져 어긋나 있었다. 원래의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짓이겨진 시신의 주인은 바로 염수강이었다.
“수강!”
뒤늦게 정신을 차린 가의천이 소리쳤다. 하지만 이미 숨이 끊어진 염수강은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가의천의 시선이 담호를 찾았다.
“개새끼야! 네가…… 컥!”
콰직!
그 순간 가의천의 복부에 담호의 주먹이 꽂혔다.
가의천의 동공이 지진이라도 난 듯 크게 흔들렸다. 순식간에 그의 동공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간신히 부여잡은 정신의 끈이 또다시 날아갔다. 그리고 담호의 무릎이 그의 복부에 작렬했다.
가의천이 그렇게 비웃었던 왼발이었다. 걸을 때는 힘을 주지 못해서 절 수밖에 없지만, 무릎 공격을 하는 데는 그 어떤 문제도 없었다.
쾅! 쾅! 쾅!
담호의 무릎이 연이어 가의천의 복부에 작렬했다.
가의천의 하체가 마치 가죽부대처럼 들썩거렸다. 너무 큰 고통은 통각마저 마비시킨다. 지금 가의천의 상태가 그랬다.
한 번, 두 번, 세 번……. 도대체 몇 번이나 무릎 공격을 했는지 몰랐다. 심장이 터지기 직전이 되어서야 담호는 공격을 멈췄다. 그리고 힘껏 잡았던 가의천의 멱살을 놓았다.
스르륵!
가의천의 몸이 미끄러져 내렸다.
그의 복부와 하체는 걸레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처참하게 짓이겨져 있었다. 복부는 터져서 내장 조각과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고, 두 다리는 뼈마디가 잘게 부서져 흐느적거리고 있었다.
담호가 가의천의 시신을 무심히 내려다봤다.
“어디 또 한 번 비웃어 봐.”
***
설산에 들어선 순간 계절은 봄에서 겨울로 넘어갔다. 공기는 급속도로 차가워지고, 바람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휘몰아쳤다.
“괜찮으십니까?”
“난 괜찮네. 아직 자네가 걱정할 정도는 아냐.”
검율천의 걱정 어린 말에 단공월이 미소를 보여 줬다. 하지만 그의 안색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몸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다. 평상시라면 이 정도 추위 정도야 옷을 벗고도 웃을 수 있었지만, 지금은 뼈에 사무치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단공월이 이제 부쩍 가까워진 절명애를 올려다봤다. 그의 목적지가 멀지 않았다.
“저곳에…….”
피이잉!
그 순간 미세한 소성이 울려 퍼졌다.
칼바람에 섞여 공력을 집중해도 구별하기 힘든 미세한 소리였다. 하지만 단공월의 초인적인 감각은 그 미세한 소성을 잡아내고 반응했다.
촤르륵!
그의 몸에서 은빛 쇠사슬이 흘러나와 전면을 가렸다. 뒤이어 ‘텅’ 하는 쇳소리와 함께 유성추(流星錐)가 튕겨 나갔다.
그 모습을 본 검율천의 눈이 빛났다.
유성추를 본 순간 어느 한 여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수현?”
“나도 있다.”
뒤이어 우렁찬 목소리와 함께 가공할 경력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순간 검율천이 뇌격술(雷擊術) 제일식인 벽력층층(霹靂層層)의 초식을 펼쳤다.
“챠앗!”
그의 앞에 뇌전의 벽이 형성됐다.
직후 두 개의 힘이 격돌했다.
콰아앙!
검율천의 몸이 뒤로 주르륵 밀려났다.
그가 발을 디딘 대지에 깊은 고랑이 생겨났다.
“천악!”
검율천이 허리를 피며 입을 열었다.
“율천!”
순간 허공에서 묵직한 음성과 함께 거한이 떨어져 내렸다. 정천악이었다.
뒤이어 유성추를 날렸던 여인, 지수현이 나타났다.
정천악을 보았을 때도 꿈쩍하지 않던 검율천의 눈빛이 지수현의 등장에 흔들렸다.
“천악, 수현.”
“여전하구나, 율천.”
정천악의 시선이 검율천의 얼굴에 꽂혔다.
검율천의 표정이 더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십병, 그중에서도 가장 만나기 싫었던 두 사람이 그의 눈앞에 나타났다.
정천악의 시선은 사나웠고, 지수현의 눈빛은 서글펐다.
검율천은 잠시 눈을 감았다.
순간적으로 수많은 상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 명은 한때 믿고 의지했던 친구였고, 다른 한 명은 한때 마음이 흔들렸던 사람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쫓아오다니.”
“누구도 십병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다. 설령 율천, 너라고 할지라도.”
“천악!”
“내 이름을 부르지 마라, 더러운 변절자여. 감히 음지에서 본교를 노리다니. 내 진즉에 그럴 줄 알았다. 그래서 네놈을 그렇게 싫어했던 것이다.”
정천악이 노성을 토해 냈다. 검율천을 노려보는 그의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불길이 토해져 나올 것 같았다.
지수현이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봤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우리를 버리고 나서 선택한 것이 겨우 이건가요? 율천.”
“수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요. 이쪽으로 와요.”
지수현이 손을 내밀었다.
흔히들 섬섬옥수라고 부르는 빙어처럼 새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었다. 남자라면 거부하기 힘든 마력을 가진 그런 손이었다. 하지만 검율천은 단호히 그 손을 거부했다.
“늦었다.”
“율천!”
“그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다. 내가 있을 곳은 이곳이다.”
검율천이 단공월의 곁에 섰다.
순간 지수현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또다시 나를 거절하다니.”
예전의 수치스러운 기억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났다.
정천악이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어차피 네 녀석이 마음을 돌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녀석이었다면 이미 이십 년 전에 나의 손을 잡았겠지.”
“잘 아는군.”
“차라리 숨어서 더 힘을 기르는 것이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너에게도 한 줌의 기회가 있었을지 모르지. 네가 구한 저 늙은이가 결국 네 명줄을 재촉한 셈이다.”
정천악의 시선이 우두커니 서 있는 단공월을 바라봤다.
단공월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내가 아무리 상처를 입었다고 하나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은 몰랐구나.”
“허세 부리지 마라, 늙은이.”
“허세?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너희 둘로는 부족하단다.”
단공월의 전신에서 폭발적인 기세가 흘러나왔다.
비록 상처 입고 지치긴 했지만 그는 풍월제(風月帝)였다.
사신제의 일원이었고, 강호의 최고 정점에 선 절대고수였다. 그 존재감은 여전했다. 하지만 정천악은 그런 단공월을 비웃었다.
“상처 입은 늙은 호랑이의 자존심인가? 좋아! 그렇다면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 주지.”
따악!
그가 손가락을 튕기는 순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인영들이 그의 등 뒤로 나타났다.
검율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단순히 정천악의 등 뒤로 나타난 이들의 숫자가 많아서가 아니었다. 그들 중에 익숙한 얼굴들이 다수 보였기 때문이다.
“독오, 온우, 하경, 정옥…….”
십병, 그 나머지…….
과거의 인연이 악연으로 꼬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