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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02화 (30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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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2화 1장. 하얀 눈 위에 피로 그림을 그리다(2)

검율천을 바라보는 지수현의 눈엔 오직 독기만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흘깃 바라본 정천악이 피식 웃었다.

“이제야 남은 미련마저 털어 버린 모양이군.”

“시끄러워!”

“흐흐!”

지수현의 가시 돋친 외침에도 정천악은 웃기만 했다. 만족스러웠기 때문이다.

사랑을 거절당한 여인의 분노가 더 무서운 법이다. 지금 지수현의 상태가 그랬다.

임독오, 백온우, 서문하경, 남장옥이 정천악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다가올수록 검율천의 눈빛이 더욱 칙칙하게 변했다.

“후우!”

깊고 무거운 숨이 흘러나왔다.

친구와의 만남은 반가워야 마땅하건만 지금 그의 가슴은 커다란 바위를 얹어놓은 것처럼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검율천의 시선이 정천악 곁에 서 있는 임독오를 향했다.

“오랜만이구나.”

“…….”

“독오.”

“나를 그렇게 부르지 마라. 네가 그렇게 빠져나갔을 때 우리의 인연은 끝이 났으니까.”

임독오의 싸늘한 목소리가 비수처럼 검율천의 가슴을 후벼 팠다. 검율천의 눈에 언뜻 안타까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허나 그것도 잠시, 이내 그의 눈빛이 묵직해졌다.

“그래! 끝났지. 우리의 인연은…….”

검율천은 더 이상 변명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임독오만큼은 끝까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목숨까지 걸었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은 실패로 돌아갔고, 임독오를 두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남겨진 임독오가 어떤 지옥을 겪었는지 눈에 훤히 보였다. 그래서 그의 증오도 이해 가 갔다.

“나는 너를 죽일 것이다. 율천.”

“…….”

“너를 죽임으로써 신교 천하를 열 것이다.”

츠으으!

임독오의 전신에서 갑자기 짙은 운무가 발산되어 일렁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운무가 아니었다. 모래알보다 미세한 먼지였다.

검율천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은혼사를 완성했구나.”

“그래! 너를 죽이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참아 냈다.”

은혼사(隱魂沙)는 말 그대로 모래였다. 실제 모래보다 수십 배는 더 작고, 미세한 알갱이로 이뤄진.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한 모래들은 매우 특별한 성질을 가지고 있어 다루기에 따라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무기가 될 수 있었다.

은혼사를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일단 모공에 흡수해야 했다. 아무리 모래보다 미세하다고 하지만 이물질이 모공으로 흡수하는 과정이 순탄할 리 없다.

생살이 찢기고, 뼈를 깎는 극한의 고통이 찾아온다. 이 과정을 견딜 수 있는 자가 없어 마교에서는 이제껏 은혼사를 흡수한 이가 나타나지 않았다.

임독오는 마교의 역사 수백 년 이래 처음으로 은혼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든 무인이었다. 그의 모공과 피부 아래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양의 은혼사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콰콰콰!

일렁이던 은혼사는 어느새 폭풍이 되어 임독오 주위를 휘돌고 있었다. 임독오를 중심으로 모래 폭풍이 몰아치고 있는 것이다.

검율천은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을 직감했다.

임독오 하나만 해도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정천악과 지수현, 백온우, 남정옥까지 상대해야 한다. 그들이 가진 병기도 임독오의 은혼사만큼이나 무서우면서도 치명적이었다. 거기다 그들이 데리고 온 수하들 수백 명까지.

“후우!”

검율천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런 그의 눈에 결연한 빛이 떠올랐다.

언제고 이런 순간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자신의 생각보다 그 순간이 더 빨리 찾아왔을 뿐.

검율천이 고개를 슬쩍 돌려 곁에 있는 단공월을 바라봤다.

“노야! 제가 함께할 수 있는 곳은 여기까지인 듯싶습니다.”

“나도 자네와 싸우겠네.”

“저와 얽힌 악연입니다. 푸는 것도 제 몫입니다.”

“자네?”

“죄송합니다. 노야!”

검율천의 대답에 단공월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결의를 느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단공월이 눈을 떴다.

“고맙네! 이 늙은이를 믿고 예까지 데려다줘서.”

“아닙니다.”

“그럼 먼저 가겠네. 꼭 뒤따라오시게. 자네도 진실을 알아야 하지 않겠나?”

“그럴 겁니다. 먼저 가십시오.”

“꼭 다시 보세.”

단공월이 검율천의 어깨를 두들겨 준 후 자리를 떴다.

“어림없다.”

“아무도 이곳을 떠나지 못한다.”

정천악의 수하들이 단공월을 막으려 했다.

쿵!

그 순간 검율천이 크게 발을 굴렀다.

강렬한 진각에 대지가 비명을 지르며 진동했다. 그에 정천악의 수하들이 멈칫했다.

“내 허락 없이는 아무도 이곳을 지나가지 못한다.”

그의 음성에 더 이상의 흔들림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흔들림이 없는 외침은 사자의 포효가 되어 절명애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검율천의 사자후에 모두의 안색이 싹 변했다.

거대한 사자(獅子)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검율천은 커다란 어금니를 드러낸 사자, 그 자체였다.

그의 압도적인 존재감에 정천악이 눈을 빛냈다.

“그래, 그래야지. 그 정도는 되어야 사냥하는 맛이 있지.”

그때 백온우가 슬며시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풍월제를 이대로 보낼 거야?”

“그 늙은이는 우리의 몫이 아니다.”

“그럼?”

“잊었느냐? 누가 함께 왔는지.”

“마모?”

“그래! 저 늙은이는 그녀의 몫이다.”

정천악의 대답에 백온우가 검율천을 노려봤다. 그에게 당한 상처가 아직도 그를 아프게 자극하고 있었다.

“그럼 마음껏 싸울 수 있겠군. 난 예전부터 저 자식이 마음에 안 들었다고.”

“그럼 사자 사냥을 시작해 볼까.”

정천악이 고갯짓을 하자 이제까지 대기하고 있던 수하들이 일제히 검율천을 향해 달려들었다.

촤하학!

“사자 사냥이다.”

“죽여라!”

그들이 휘두른 검이 공기를 발기발기 찢으며 날아왔다.

검율천이 공력을 끌어올린 채 그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어느새 그의 전신에는 막강한 강기가 생성되어 있었다.

‘속전속결.’

시간을 끌수록 불리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 때문에 검율천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기로 결심했다.

“챠아앗!”

콰앙!

대기가 폭발했다. 검율천에게 달려들던 무인들이 산산이 부서져 튕겨 나갔다. 격돌하는 순간 검율천이 몸에 두른 반탄강기를 폭발시킨 것이다.

피가 튀고 뼛조각이 비산했다. 순식간에 수십여 명의 무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반탄강기를 저렇게 이용하다니.”

“역시 싸움 감각 하나만큼은 발군이군.”

오죽했으면 적인 십병마저 감탄사를 토했을까?

정천악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허나 오늘 놈이 이 자리에서 죽는단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모두 준비해.”

어차피 지금 검율천을 공격하는 수하들은 그의 힘을 빼놓기 위한 제물에 지나지 않는다. 제아무리 검율천이 대단한 무인일지라도 결국은 인간에 불과했다.

인간인 이상 언젠가는 지칠 것이고, 그때가 십병이 공격하는 순간이 될 것이다.

***

“후우!”

단공월이 걸음을 옮기다 말고 문득 뒤를 돌아봤다.

콰아앙!

저 멀리서 터진 폭음이 이곳까지 생생하게 전해졌다. 그만큼 격렬하게 싸우고 있다는 증거였다.

단공월은 검율천이 무사하길 빌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검율천의 말처럼 그가 할 일이 따로 있었고, 단공월이 할 일이 따로 있었다.

지금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해야 할 때였다.

‘미안하네.’

단공월은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그는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아주 오래전에.

그때는 다시 이곳에 오게 될 줄 몰랐다.

단공월은 이제는 희미해진 기억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의 눈이 빛을 발한 것은 저 멀리 커다란 바위가 보였을 때였다. 마치 코끼리가 웅크리고 앉은 것 같은 형상의 새까만 바위였다.

“흑상암(黑象巖).”

검은 코끼리 바위, 그래서 그의 친우가 흑상암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흑상암은 길잡이나 마찬가지였다. 흑상암을 보자 흐릿하던 기억이 선명하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단공월은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큰 나무를 끼고 돌기도 하고, 거대한 돌무덤을 지나기도 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서 도착한 곳은 절명애 아래에 존재하는 폐허였다.

규모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넓은 폐허는 간간이 주춧돌만 보일 뿐, 원래의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휴!”

폐허를 보자마자 먼저 한숨이 흘러나왔다.

단공월의 얼굴엔 회한의 빛이 가득했다.

“여기를 또 오게 되다니.”

그가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길 때였다.

슈우우!

갑자기 맹렬한 파공성이 울려 퍼졌다.

단공월이 고개를 들어 허공을 바라보자 거대한 바위가 그를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단공월은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자 옷 속에서 그의 몸을 휘감고 있던 은빛 쇠사슬이 풀려나왔다.

촤르륵!

마치 고개를 든 독사처럼 은빛 쇠사슬 십여 다발이 바위를 향해 쏘아져 나갔다.

쿠와앙!

쇠사슬과 바위가 허공에서 격돌했다.

“흐읍!”

그 충격으로 단공월이 서너 걸음을 뒤로 물러났다. 그가 물러난 자리에 깊은 족적이 패여 있었다. 그만큼 그가 받은 충격은 적잖았다.

단공월의 얼굴에 그늘이 내려앉았다.

“하하하!”

그가 바위라고 생각했던 물체가 앙천광소를 터트리며 공중제비를 하고 있었다. 바위가 아니라 사람이었던 것이다.

쿵!

바위만큼이나 거대한 남자가 둔중한 소리와 함께 바닥에 착지했다. 남자를 바라보는 단공월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비록 내상 때문에 전력을 다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적잖은 공력이 투입된 공격이었다. 그런데도 상대는 별다른 타격을 입은 것 같지 않았다. 그만큼 만만치 않은 상대란 뜻이었다.

남자가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상처를 입었다 해도 호랑이라 이건가? 손속이 맵군.”

“그댄 누군가?”

“늙은이의 목을 딸 사람.”

“허언이 심하군.”

“왜? 늙은이가 사신제 중 한 명인 풍월제라서?”

남자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단공월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자신의 정체를 알면서도 이렇게 나온다는 것은 상대가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믿어도 좋아요. 그가 당신의 목을 딸 테니까요.”

갑자기 여인의 차가운 음성이 단공월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어느새 남자 뒤쪽으로 붉은 면사를 쓴 신비한 분위기의 여인이 나타나 있었다.

붉은 면사 여인의 등장에 단공월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녀가 입을 열기 전까지도 존재 자체를 인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대는 누군가?”

“누군 거 같나요?”

“…….”

“괜찮아요, 이해해요. 모를 수도 있죠. 전 단운향이라고 해요. 저를 아는 사람들은 마모라고 부르죠.”

“단운향?”

“당신이 비열하게 암습했던 그분의 여인이죠.”

“교주의 여인이란 말인가?”

“그래요.”

“영광이라고 해야 하나?”

“그래야 할 거예요. 나를 직접 움직이게 만들었으니까.”

붉은 면사의 여인, 단운향이 싸늘히 대답했다.

그녀의 몸에서는 북풍한설 같은 한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인이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기 마련이다. 하물며 단운향처럼 강한 여인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었다.

단운향이 앞으로 나섰다.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뭔가?”

“왜 이곳을 당신의 무덤으로 선택한 거죠? 이곳에 무엇이 있기에.”

“진실!”

“진실?”

“그렇다네. 이곳엔 진실이 있지.”

“흥! 그게 무엇이든 간에 당신의 죽음과 함께 묻히겠군요.”

“그럴 일은 없을 걸세.”

단공월이 공력을 끌어올렸다.

그런 단공월의 모습을 보며 단운향이 혀를 찼다.

“늙어 죽지도 않는 괴물이 허세는…….”

그녀가 곁에 있는 석무강을 바라봤다.

단공월이 늙은 괴물이라면 석무강은 젊은 괴물이다.

북철왕(北鐵王) 석무강.

십삼지파 중 하나인 벽암류의 주인, 그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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