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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03화 (30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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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3화 1장. 하얀 눈 위에 피로 그림을 그리다(3)

한쪽은 오래전부터 강호의 전설로 자리한 사신제 중의 일인.

다른 한쪽은 마교의 십삼지파 중 하나인 벽암류의 주인.

그들의 격돌은 실로 가공했다.

쾅! 쾅!

그들이 격돌할 때마다 바닥이 갈라지고 아름드리나무가 송두리째 뽑혀 날아갔다.

촤르륵!

단공월의 쇠사슬 십여 가닥이 뱀처럼 뻗어 나와 석무강의 요혈을 놀렸다. 그에 맞서는 석무강의 전신에는 태산처럼 굳건한 기세가 발산되고 있었다.

벽암류는 바위였다.

거대한 바위처럼 굳건하고, 흔들림 없는 것이 그 요체였다.

석무강은 그런 벽암류의 가르침에 충실한 남자였다.

콰아아!

그가 한 번씩 몸을 움직일 때마다 맹렬한 기세가 발산되었다.

“죽어랏! 늙은이.”

석무강이 맹렬히 몸을 날렸다.

쩌저정!

은빛 쇠사슬이 그의 몸을 어쩌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하지만 단공월은 추호도 당황하지 않고 손바닥을 펼쳐 그의 몸을 부드럽게 흘려보냈다. 그러면서도 은빛 사슬을 절묘하게 운용해 석무강을 공격했다.

“대단하구나.”

그 광경을 보며 단운향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비록 적이라고 하지만 단공월의 무위는 실로 가공했다. 십삼지파 중 하나인 벽암류의 주인을 상대로도 한 치도 밀리지 않았으니까. 그가 깊은 내상을 입고 지쳐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더욱 대단하게 느껴졌다.

“저 정도가 되니 교주께 상처를 입혔을 터.”

바꿔 말하면 교주와 싸워 내상을 입지 않았다면 석무강도 그의 상대가 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십삼지파의 주인들이라고 해서 무공이 모두가 똑같을 수는 없다. 그중에서도 고하는 나뉘기 마련이고, 특별하게 뛰어난 자도 존재하는 법이니까.

석무강은 분명 뛰어난 자였다. 젊은 데다가 무공 또한 십삼지파의 주인들 중 상위에 속할 만큼 강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성취였다.

그래서 그가 자신과 뜻을 함께하겠다고 했을 때는 무척이나 기뻤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노야.”

그녀가 지금 이 순간 떠올린 이는 다른 누구도 아닌 천오경이었다.

석무강과 같은 십삼지파의 하나인 전검류의 수장. 하지만 그의 무위는 석무강에 비할 수 없었다.

다른 십삼지파의 주인들이 모두 바뀌었을 때도 그는 여전히 전검류의 주인이었다.

단운향이 어렸을 때도 그는 여전히 그 모습이었고, 단운향이 나이가 든 지금도 똑같은 모습이었다.

마교 내에서도 그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아왔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마교와도 왕래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십삼지파 내에서 가지는 상징성은 상상외로 컸다.

단운향은 그런 천오경을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만 있었다면 석무강이 저렇듯 고생하지 않고서도 쉽게 단공월을 제압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나저나 저 늙은이가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이곳으로 기어 온 거지?”

단운향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어렸다.

그녀가 알기로 단공월은 이곳에 전혀 연고가 없었다. 굳이 중상을 입고 이곳까지 도주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단공월은 검율천을 끌어들이면서까지 이곳까지 왔다.

“그 이유가 뭐지? 저 늙은이가 목숨을 걸고 이곳까지 와야 할 이유.”

단운향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제야 주위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아주 오래전에 버려진 듯한 폐허였다. 간간이 보이는 주춧돌만이 예전의 영화를 말해 줄 뿐이다.

붉은 면사 위로 드러난 단운향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대체?”

그녀의 눈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마교의 성녀로 한평생 천하를 떠돈 단운향이었다. 때문에 천하 구석구석을 알고 있다고 자부했다.

그녀가 알기로 설산엔 민가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한여름에도 녹지 않는 만년설 때문이다. 그런 이곳에 이렇게 대규모의 폐허가 존재하다니.

‘이 정도 규모라면 능히 수백, 수천 명도 살았을 터. 그 정도의 인원이 살았다면 본교가 알지 못했을 리 없는데.’

단운향의 의혹이 짙어질 때였다.

콰아앙!

이제까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난 굉음이 울려 퍼졌다.

“무슨?”

단운향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절명애 아래 있던 거대한 바위가 부서져 사방으로 비산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석무강이 약간은 황당한 표정으로 주먹을 뻗은 모습이 보였다.

방금 전 석무강은 권강을 펼쳤다.

같은 강기라도 집약된 내공의 질에 따라 위력이 달라진다. 석무강 정도의 고수가 펼친 강기라면 당연히 그 위력도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단공월은 그런 석무강의 권강을 틀어 버렸다.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권강의 방향을 바꿔 절명애 밑에 있는 거대한 바위에 직격했다. 그렇게 석무강의 권강에 집채만 한 바위가 박살났다.

석무강이 그에 놀라 잠시 멈칫하는 사이 단공월이 바위를 향해 몸을 날렸다. 정확히는 바위가 부서진 후 모습을 드러낸 검은 동혈을 향해서였다.

단공월의 신형이 순식간에 동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석무강은 그제야 단공월이 자신의 힘을 빌려 동혈을 막고 있던 바위를 부순 사실을 깨닫고 분통을 터트렸다.

“늙은이가 감히 나를 희롱해?”

그는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단공월을 따라 몸을 날렸다.

“잠시만…….”

뒤늦게 단운향이 외쳤지만 석무강은 이미 동혈 속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단운향이 고개를 내저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검은 동혈이 꺼림칙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단운향도 동혈을 향해서 몸을 날렸다.

그들이 사라지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누군가 모습을 드러냈다.

헝클어진 흑발에 다 찢어진 흑색 피풍의를 걸친 남자, 바로 담호였다.

담호는 잠시 주위를 둘러봤다.

곳곳에 싸운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그가 도착하기 전에 누군가 이곳에서 싸운 것이 분명했다.

담호의 눈에 지옥의 입구인 양 입을 벌리고 있는 검은 동혈이 들어왔다. 담호는 망설임 없이 동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동혈에 들어서자마자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매우 오랫동안 봉인되어 있었던 듯 동혈에는 음습한 기운이 가득 느껴졌다.

저벅! 저벅!

담호의 발소리가 동굴의 벽에 부딪쳐 몇 배나 크게 증폭되어 울렸다. 울림은 쉬이 가라앉지 않고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

마치 동혈 전체가 거대한 울림판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도 담호는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지만 담호의 눈은 어둠 너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동혈 벽면에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과 그림들이 새겨져 있었다. 담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벽에 새겨진 그림을 바라봤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문양과 그림들은 무척이나 희미했다. 담호가 손을 대자마자 벽이 부서져 내릴 정도였다.

담호는 손을 떼고 그림을 바라봤다. 색이 바라고 흐려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는 그림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직 색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그림이 하나 있었다.

두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뱀. 몸통에는 커다란 한 쌍의 날개가 달려 있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쌍두비익사(雙頭飛翼蛇)였다.

쌍두비익사의 머리는 각자 다른 방향을 보고 있었는데, 유독 눈이 샛노랬다.

샛노란 눈동자는 너무나 생생해서 마치 쌍두비익사가 살아 있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담호는 한참이나 쌍두비익사를 바라봤다.

“두 개의 머리…….”

그 안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진실은 호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송곳과 같아서 언젠가는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담호가 그렇게 그림을 바라볼 때였다.

쿠웅!

갑자기 동굴 안쪽에서 강한 울림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강렬한 바람이 밀려왔다. 덕분에 담호의 머리카락과 피풍의가 펄럭였다.

쾅! 쾅!

뒤이어 격렬한 굉음이 동굴의 벽을 타고 울려 퍼졌다. 동굴 전체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진동했다. 천장에서 돌 부스러기가 떨어져 내리고, 바닥에 고인 물이 연신 튀어 올라 담호의 바지를 적셨다.

담호는 동굴 안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전신의 근육을 이완시킨 채 굉음의 진원지를 향해 한 걸음, 또 한 걸음 옮겼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비좁은 동혈이 끝나는 지점에서 희미한 빛이 보였다.

콰르르!

그곳에서 예의 굉음과 함께 거친 기류가 몰아치고 있었다. 담호가 그곳으로 걸어갈 때였다.

파앗!

갑자기 검은 인영 하나가 그곳에서 튀어나왔다.

선혈이 묻은 검을 들고 있는 인영이었다. 머리에 복면을 뒤집어쓰고 있는 검은 인영은 담호의 등장에 무척이나 놀랐는지 ‘헉’ 하고 숨을 들이켰다. 허나 그것도 잠시, 바로 담호를 향해 검을 맹렬히 휘둘렀다.

위잉!

좁은 동혈 안을 칼바람이 가득 채웠다.

담호가 주먹을 꽉 쥔 채 칼바람을 향해 뛰어들었다.

쾅!

파성추 한 방에 그토록 맹렬하게 불어오던 칼바람이 거짓말처럼 사그라들었다.

보통의 무인은 담호의 파성추 한 방에 전의가 꺾이고 만다. 하지만 담호를 습격한 검은 인영은 보통의 무인이 아니었다.

“제법이구나.”

묵직한 저음의 음성과 함께 복면인의 손에 들린 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쉬이이!

그의 검이 마치 독사처럼 담호의 요혈을 노리고 날아왔다.

흔히들 경지에 이른 무인이라면 검의 위력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자신도 모르게 검기나 검강 같은 수법을 운용하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복면인은 달랐다.

그는 검기 같은 것을 끌어올리지 않고도 검이 가진 묘리를 최대한 살렸다.

어둠 속에서 담호의 눈이 빛났다.

이제까지 수많은 무인들을 상대했던 담호였다. 그중에는 절대고수라 할 만한 자들도 다수 있었고, 검으로 일가를 이룬 무인들도 많았다.

복면인의 검공은 이제까지 담호가 상대한 그 어떤 검호(劍豪)들에 비해도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한 수 위라고 생각했다.

복면인이 펼치는 초식은 삼재검법이었다.

강호인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긋고, 찌르고, 베는 평범한 동작들. 그런데 복면인은 그런 세 가지 동작을 절묘하게 섞어 담호의 허점을 찌르고 있었다.

쉬이익!

어둠 속에서 날카로운 파공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검에 실린 역도가 범상치 않았다. 복면인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갈라져 비명을 질렀다.

복면인은 동혈 안을 완벽하게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가 나빴다. 그가 상대하는 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담호였다.

그가 충보를 펼쳤다.

그의 몸이 충차처럼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비좁은 동혈 안이었다. 피할 곳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힘과 힘의 충돌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

쾅!

“흐읍!”

충돌과 함께 복면인이 답답한 신음성을 흘렸다.

복면인의 입가로 혈흔이 내비쳤다.

순간 그의 눈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하필 이곳에서 권마와 마주치다니.’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상대가 누구냐고 천하의 모든 무인들을 붙잡고 물으면 백이면 백, 모두 권마라고 답할 것이다.

그것은 복면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직은 일러.’

언젠가 만날 상대였지만, 그래도 최대한 뒤로 늦추고 싶었던 것이 복면인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직접 부딪쳐 본 결과 권마는 강했다. 평범한 초식을 아무리 응용해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살 떨리는 위압감과 짐승 같은 눈빛이 그를 압박하고 있었다.

결국 복면인은 결정을 해야 했다.

“챠아앗!”

커다란 기합과 함께 그의 검이 변화를 일으켰다.

암흑 속에서 꽃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찬연한 봄의 시작을 알리는 새하얀 꽃송이.

순간 무감각하던 담호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매화(梅花)?”

복면인이 피워낸 꽃은 매화가 분명했다.

천하에 수많은 검공이 존재하고, 그들 중에 상당수는 꽃 형상의 검기(劍氣)를 발산하기도 한다. 하지만 매화를 발산하는 검공을 가진 문파는 천하에 단 한 곳뿐이다.

화산파(華山派).

그 외 어떤 문파도 매화를 피어 내지는 못한다.

담호는 한눈에 복면인이 펼치는 검공의 정체를 알아봤다.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

오직 화산파의 매화검수만이 익힐 수 있는 절정의 검공.

푸화학!

화산의 절학이 화산이 아닌 곳에서 화산의 제자가 아닌 자의 손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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