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306화 2장. 진실은 언제나 무겁게 다가오기 마련이다(3)
담호가 착 가라앉은 눈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일대는 그야말로 초토화가 되어 있었다. 그나마 간신히 형체를 유지하고 있던 폐허는 완전히 뒤집혀 있었고, 곳곳엔 파괴의 흔적이 역력히 남아 있었다.
검율천과 십병이 싸운 흔적은 대지와 폐허에 큰 상흔을 남겼다. 도저히 인간의 싸움이 벌어졌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일대의 지형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다.
땅거죽은 배를 드러내고 있었고, 곳곳에 보였던 커다란 바위는 그야말로 흔적도 남기지 못하고 사라져 있었다.
대지 곳곳에 그들의 격돌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검율천은 혼자서도 십병의 다섯을 상대로 막강한 무위를 발휘했다.
담호는 흔적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파과의 흔적은 더욱 격렬해졌다.
담호는 바닥에 남은 흔적을 통해 두 사람이 더 그들의 싸움에 합류했음을 알아냈다.
한 사람은 거의 흔적이 남지 않을 정도로 움직임이 가벼웠고, 다른 한 명은 발자국을 어지러이 남겼다. 그만큼 펼친 무공도 복잡하다는 증거였다.
담호는 이런 특징을 지닌 자들을 알고 있었다.
‘음유경, 신무월.’
음유경은 여자였기에 몸이 가벼웠고, 신무월은 다섯 개의 검을 무기로 사용하기에 움직임이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검율천과 십병의 싸움에 합류한 것이 분명했다. 그들이 합류한 이후부터는 흔적이 더욱 강렬해졌다.
공격하고, 방어하고, 협공하고, 분산하며 그들은 질주했다. 담호는 질주의 흔적을 따라 계속해서 걸음을 옮겼다.
끝이 나지 않을 것 같던 파괴의 흔적은 인근의 큰 강가에서 완전히 끊겼다. 담호가 면밀히 주변을 살폈지만, 어디서도 그들이 남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우두커니 서서 한참이나 강을 바라보던 담호가 몸을 돌렸다. 흔적이 완전히 끊겼다. 이 이상 그들을 추적하는 것은 무리였다. 차라리 이대로 돌아가는 것이 훨씬 나았다.
그가 아는 검율천은 남에게 쉽게 당할 자가 아니었다. 살아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을 찾아올 인물이었다. 그렇기에 담호는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담호는 강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얼마나 걸었을까?
푸르르!
갑자기 앞쪽에서 말의 투레질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잡털 하나 섞이지 않은 새까만 말이 보였다. 흑귀가 그를 찾아온 것이다.
흑귀가 반갑다는 듯이 다가왔다. 담호는 흑귀의 목을 몇 차례 두들겨 준 후 올라탔다.
흑귀를 타자 그제야 피로가 밀려왔다. 담호는 흑귀에 몸을 맡긴 채 운공에 들어갔다.
암혼심공(暗魂心功)을 운용하면서 그의 몸 주위에 뿌연 안개가 피어났다.
묵직한 기운이 단전에서 일어나 전신을 휘젓고 다녔다. 암혼심공으로 만들어진 기운은 마치 의지를 갖고 있는 생명체 같았다. 끊어진 곳을 잇고, 막힌 곳을 뚫으면서 상처를 회복시켰다.
화산파의 중천심결과 마교의 심공이 결합해서 만들어진 암혼심공은 이제 새로운 경지로 넘어서고 있었다.
막힘없이 끊이지 않고 내기와 외기가 서로 통하고 교합하는 무애상통(無碍相通)의 경지.
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내공을 더 이상 쌓는 것이 무의미했다. 외기가 내기와 동조하니 언제든 끌어다 쓸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담호의 경지가 그랬다. 그는 외기를 끌어와 자신의 몸을 회복하는 데 사용하고 있었다.
대주천을 두어 차례 한 것만으로도 담호의 몸 상태는 많이 좋아져 있었다. 창백하기만 하던 얼굴에도 어느새 혈색이 은은하게 돌아와 있을 정도였다.
담호가 눈을 떴다. 그렇지 않아도 새까만 눈동자가 더욱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눈을 뜬 담호가 주위를 둘러봤다.
그가 운공을 하고 있는 사이 흑귀는 어느새 설산 아래까지 내려온 상태였다. 하지만 이미 날이 어두워져 더 이상 움직이는 것은 힘들 것 같았다.
결국 담호는 적당한 곳을 찾아 운공을 하며 노숙을 했다.
나무를 주워 와 불을 지피고 바위에 등을 기댔다.
격렬하게 타오르는 붉은 불꽃이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드리웠다.
고된 여정이었다.
화산을 떠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수없이 싸우고, 피를 봤다. 그래도 담호는 힘들다 생각하지 않았다.
고난은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피를 흘리는 만큼 그는 강해지고, 더 독해졌다.
불씨를 뒤적거리는 그의 손등에 나 있는 수많은 흉터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상처를 덮은 딱지가 채 떨어지기도 전에 새로운 상처가 나고, 그렇게 쌓인 딱지와 굳은살이 굳어서 철갑처럼 변했다. 그의 손등은 인간의 손이라기보다는 짐승의 발바닥과 비슷했다.
담호의 삶이 그의 손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그의 투쟁의 삶이.
앞으로도 이 상처 위에 또 얼마나 많은 상흔이 아로새겨질지 모른다. 그렇게 쌓이고 쌓인 상처가 너무 무거워 언젠가는 무릎을 꿇게 될지도 몰랐다.
담호가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도 난 후회하지 않는다.’
아직 그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부모를 잃고, 화산에 들어온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어쩌다 보니 버려져 혈로를 걷게 된 것 역시 그가 원하는 삶은 아니었다.
삶의 변곡점은 예고도 없이 찾아왔고, 그를 이 길로 이끌었다.
이 험난한 길을 걷게 된 것이 그의 뜻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남을 탓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었다.
언젠가 꺾일지 몰라도, 그는 이 가시밭길을 계속해서 걸어갈 것이다.
그것이 그의 삶이었기에.
***
“형!”
방진보가 문득 중얼거렸다.
“왜 그럽니까?”
곁에 있던 숙수 한 명이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한참 요리를 하던 방진보가 갑자기 멍하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 아니에요.”
방진보가 고개를 저으며 다시 요리에 열중했다. 불에 달궈진 과자를 움직이며 순식간에 몇 가지 요리를 만들어 냈다.
수백인 분의 음식을 만드는 일이었다. 주방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마찬가지였다. 방진보를 도와 십여 명의 보조 숙수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고, 화덕마다 강렬한 불길이 치솟아 올라오고 있었다. 때문에 주방 안은 마치 찜통처럼 뜨거웠다.
모두가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피곤할 만도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모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보조 숙수라고 해도 그들 역시 화산파의 제자들이었다. 화산파의 부흥과 몰락을 모두 지켜본 이들이었다.
화산파가 혈겁을 당했을 때만 하더라도 그 어떤 희망도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현소 진인이 돌아온 후 화산파는 빠른 속도로 정비를 해 가며 예전의 위용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비록 세상 사람들은 그 사실을 모르지만, 화산파 안에서 생활하는 그들은 누구보다 그 사실을 절감하고 있었다.
희망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화산파는 빠른 속도로 성세를 회복하고 있었고, 오히려 어떤 면에서는 예전을 능가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눈으로 보았기에 화산파에 대한 믿음이 더욱 굳건해졌다.
지금은 변방으로 밀려났지만, 화산파는 다시 중원 무리의 중앙에 복귀할 것이다. 아니, 오히려 더욱 전성기를 누릴 거라는 확고한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그들은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뜨거운 열기에 숨이 좀 막히면 어떠한가? 자신들이 만드는 음식들이 사형제들의 영양분이 될 텐데.
몇몇 숙수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방진보가 요리하는 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젠 그들도 알고 있었다. 방진보의 요리가 보통 음식이 아니란 사실을.
방진보의 음식을 먹은 자는 모두 내력이 은근히 상승하는 경험을 했다. 단번에 그 효과를 느끼기는 힘들었지만, 그것이 수십, 수백 일을 이어지다 보니 쌓이고 쌓여 막대한 증진을 이뤘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모르지만 요리를 통해 화산파 제자들의 내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킨 것이다.
이젠 화산파의 제자들 모두가 그 사실을 알았다. 때문에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를 존경하고 화산파 내에서도 중요 인사로 취급받았다.
보조 숙수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방진보를 존경하면서도 비법을 알아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방진보의 요리는 단지 곁에서 지켜본다고 알아낼 수 있을 정도로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우선은 식자재의 조화를 이룰 줄 알아야 하고, 약초들에 정통해야 했다. 그리고 불을 자유자재로 다뤄야 했고, 무엇보다 오행군자공을 익혀 기운의 조화를 꾀할 줄 알아야 했다.
그 모든 것이 조화가 되지 않고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방진보처럼 내공을 증진시키는 요리를 할 수 없었다.
방진보는 아직 자신의 비전을 공개할 생각이 없었다. 아직도 연구해야 할 부분이 많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많은 부분이 불완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후!”
마침내 요리를 끝낸 방진보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아무리 방진보라 할지라도 이렇게 수백 명 분의 음식을 한꺼번에 만드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방진보가 보조 숙수들을 보며 말했다.
“저는 나가서 조금 쉴게요.”
“나머지는 저희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여긴 걱정하지 말고 쉬십시오.”
보조 숙수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그만큼 마음속 깊은 곳에서 방진보를 존경하고 있는 것이다.
방진보는 그들에게 인사를 하고 주방 밖으로 나왔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땀을 식혀 주었다.
“우와!”
방진보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온몸이 노곤했지만,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보야!”
“어, 누나?”
방진보가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종리연의 음성이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리자 사뿐사뿐 걸어오고 있는 종리연의 모습이 보였다.
종리연도 약간은 피곤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매화신단 다 만드셨어요?”
“아니! 조금 쉬려고.”
“그러세요. 누나, 요즘 잠도 많이 못 주무시잖아요.”
“너야말로 조금 쉬지 그래?”
“지금 그러고 있잖아요. 헤헤!”
방진보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그에 종리연도 같이 미소를 지었다.
그녀가 뜬금없이 말했다.
“좋다.”
“그쵸?”
“응!”
“헤헤!”
수년 동안 같이 고생해 온 두 사람이었다. 그만큼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기에 가볍게 툭 내뱉는 말속에 담긴 의미도 쉽게 이해했다.
종리연은 하루 종일 매화신단을 연단하는 일에 몰두했다. 방진보도 요리를 만드는 시간을 제외하면 그녀를 도와 매화신단을 만들었다. 그가 익힌 오행군자공은 매화신단의 약력을 끌어올리고 조화하는 데 최적의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진보야.”
“네?”
“나 산 아래 좀 잠깐 다녀올게.”
“왜요?”
“몇 가지 약초가 부족하네. 장 아저씨에게 부탁해 놨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 직접 가 보려고.”
종리연이 말하는 장 아저씨는 화음현에서 제일 큰 약초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이었다. 화산파가 봉문을 한 이후에도 종리연에게 꾸준히 약초를 댄 사람이기도 했다.
그의 아들도 화산파의 속가제자였기에 화산파에 대한 충성심은 무척이나 확고했다. 그래서 화산파에 필요한 약초라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반드시 구해 왔다.
그런 그가 이렇게 오랫동안 소식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럼 저도 같이 가요.”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방진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너는 왜?”
“헤헤! 저도 식자재 좀 구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그래?”
“우리 같이 내려가요.”
“그러자.”
종리연이 흔쾌히 허락했다.
사실 혼자 내려가는 것보다 둘이 내려가는 것이 훨씬 더 나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장문인인 운경에게 허락을 구했다. 잠시 고민하던 운경은 허락을 했다.
종리연과 방진보는 그도 대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그들은 완전한 화산파의 제자가 아니었다. 담호와의 친분 때문에 화산파에 머물면서 도와주는 것이지, 마음만 돌린다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렇게 쉽게 떠날 사람들은 아니지만 운경으로서는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종리연이 구하려는 약초는 매화신단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때문에 허락을 해야 했다.
두 사람에게 허락을 한 후 운경은 매화검수의 수장인 원명을 불렀다.
“부르셨습니까? 장문인.”
“원명.”
“말씀하십시오.”
“매화검수들 몇 명을 데리고 신의와 진보를 은밀히 보호하게.”
겨우 화산파의 코앞인 화음현에 내려가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운경은 절대 경계를 풀지 않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원명은 군말하지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 역시 종리연과 방진보가 얼마나 중요한 인사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그가 물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 두 사람을 위협하는 대상이나 존재가 있으면 어디까지 허용하시겠습니까?”
“그들의 안전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네.”
운경은 칼처럼 단호히 끊어 말했고, 원명은 그 안에 담긴 뜻을 알아들었다.
“알겠습니다. 목숨을 바쳐 그들을 보호하겠습니다.”
대답을 하는 원명의 목소리에 비장함이 물씬 풍겨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