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0
310화 4장. 혈풍은 사천성에서 불어온다(1)
아미산(峨嵋山)은 사천성의 성도 남쪽에 있는 아미현에 위치한 산이었다. 본래 도교의 성지였지만, 아미파(峨嵋派)가 자리를 잡은 이후로는 불교의 성지로 변모했다.
풍광이 수려해서 볼 곳이 많지만 산 정상에는 늘 한기가 감돌고, 구름과 안개에 덮여 있어 부처의 후광이라 불리는 불광(佛光) 현상을 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아미산을 유명하게 한 것은 구대문파 중 하나인 아미파가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여승들이 주축이 된 금정사와 남자 승려들이 주축이 된 복호사를 한데 묶어 아미파라고 부른다. 대외적으로는 여승들의 문파로 인식이 되어 있지만, 아미파에는 상당수의 남자 승려들이 있었고, 그들의 무위는 여승에 못지않았다.
아미파의 현 장문인은 정명 사태였다. 그녀는 근 이십여 년이나 무리 없이 아미파를 잘 이끌어 왔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언제나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것으로 유명한 정명 사태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러니까 은엽과 소천, 율희가 정말 당문에 잡혀 있다 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장문인. 어서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보고를 하는 이는 바로 복호사의 주지인 광운 신승이었다.
여승이 주축인 아미파의 특성상 장문인이 되지는 못했지만 그의 무공은 오히려 정명 사태를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광운 신승 역시 정명 사태 못지않게 넉넉한 미소로 유명했지만, 지금 그의 얼굴에 평소의 온기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그들은 심각했다.
정명 사태의 제자인 은엽 사태와 정소천, 소율희의 실종 때문이었다. 원래 돌아오기로 한 시간이 훨씬 지났음에도 그들은 아미파로 귀환하지 않았다.
세 사람 모두 아미파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기재들이었다. 그녀들의 실종은 아미파를 발칵 뒤집어 놓기 충분했다.
그들이 귀환하지 않자 아미파에서는 사람들을 풀어 그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믿기 힘든 정보를 얻었다.
바로 당문이 그들을 잡아갔다는 것이다. 하지만 정명 사태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당문은 아미파의 오랜 동맹이었다.
비록 사정에 따라 서로 대립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결코 정해진 선을 넘지 않고 오랜 세월을 지내 왔다. 그런데 이제 와서 당문이 아미파의 제자들을 납치했다고 하니 쉽게 믿어지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정명 사태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미타불! 그들이 대체 왜?”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장문인. 한시라도 빨리 사람을 보내 항의하고 그들을 데려와야 합니다.”
“사실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요. 어떤 이유에서라도 본문의 제자를 당문이 감금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그렇습니다.”
“당장 당문에 보낼 인원을 뽑으세요.”
“제가 직접 가겠습니다.”
“광운 사형께서 직접 가시려구요?”
정명 사태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광운 신승을 바라봤다. 광운 신승은 아미파 최후의 보루였다. 때문에 어지간한 일로는 절대 움직이는 법이 없었다. 그런 그가 직접 움직이겠다는 것은 그만큼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아무래도 제가 직접 움직이는 것이 나을 듯싶습니다. 근래 들어 천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광운 사형께서 그렇게 결정하셨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요. 조심해서 다녀오십시오.”
“예! 장문인. 다녀와서 따로 보고드리겠습니다.”
광운 신승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였다.
댕! 댕! 댕!
갑자기 밖에서 큰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비상사태 때만 울리는 종소리였다.
정명 사태와 광운 신승의 표정이 변했다.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급히 밖으로 뛰어나왔다.
정명 사태가 밖에 있던 제자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지금 산문 밖에 침입자들이…….”
“침입자?”
정명 사태와 광운 신승은 제자의 대답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산문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들은 순식간에 산문에 도착했다.
산문에서는 아미파의 제자들과 녹의를 입은 무인들이 대치를 하고 있었다.
정명 사태의 시선이 녹의를 입은 무인들을 향했다. 사천성에서 녹의를 입는 무인들은 단 한곳밖에 없었다.
“당문?”
그녀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광운 신승 역시 안색이 변한 것은 마찬가지였다.
정명 사태가 목청을 높였다.
“당문이 연통도 없이 아미산에는 어쩐 일인가?”
“오랜만입니다. 정명 사태.”
그때 당문의 무인들 사이에서 중년의 무인이 걸어 나와 포권을 취했다.
“당신은?”
“당문의 당천양입니다. 정명 사태.”
“천독당주?”
정명 사태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당천양은 당문의 천독당주였다. 천독당은 천기당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조직 중 하나였다. 사천성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그 이름을 모를 수가 없었다.
“당 대협께서 어인 일로 이 많은 이들을 이끌고 아미산을 오르신 것이오?”
그녀의 눈에는 경계의 빛이 가득했다. 그러자 당천양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가주님께서 정명 사태께 전하라는 말씀이 있어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당가주가?”
정명 사태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당가주께서 무슨 말씀을 전하라 하셨소.”
“가주님께서는 정확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미파는 십 년간 봉문하라.”
“봉문?”
정명 사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아미파의 수백 년 역사 동안 단 한 차례도 봉문을 한 적이 없었다. 화산파처럼 크게 타격을 입은 일도 없었을뿐더러 강호의 공분을 산 적도 없었다. 당연히 봉문을 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하물며 아무런 관련도 없는 타 문파의 협박 때문에 봉문을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정명 사태보다 광운 신승이 먼저 노성을 터트렸다.
“당가주가 미친 모양이구나. 감히 아미파에 봉문을 하라는 망언을 하다니.”
“저희 가주님께서는 아미파를 각별히 생각하셔서 그렇게 말씀하신 겁니다.”
“당사일은 어디에 있느냐? 내가 직접 만나겠다.”
“가주님께서는 지금 청성산에 가셨습니다.”
“청성? 설마 청성파에도 봉문을 권하러 간 것은 아니겠지?”
“역시 광운 신승은 대단하시군요. 거기까지 꿰뚫어 보시고.”
“정말 청성파에도 봉문을 권하러 갔다고? 당사일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어찌나 분노했는지 광운 신승이 거친 콧김을 뿜어냈다. 그것은 다른 아미파 제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파의 봉문을 말하는 당사일의 태도에 분개했다.
정명 사태가 공력을 끌어 올리며 말했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당장 아미산을 내려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큰 횡액을 당할 테니.”
“죄송합니다, 정명 사태. 저희도 가주님의 지엄한 명을 받고 왔기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내려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감히!”
정명 사태가 살기를 발산했다. 그것은 광운 신승과 다른 아미파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놈들 감히 아미파를 능멸하다니. 내 용서하지 않으리라.”
웅웅!
광운 신승이 공력을 끌어 올리자 일대의 공기가 요동쳤다. 아미파 최고의 고수다운 위용이었다. 하지만 당천양의 입가에 어린 미소는 지워지지 않았다.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겠다면 말리지는 않겠습니다. 이후로 일어나는 모든 사태는 두 분의 책임입니다.”
“내 한 가지만 묻겠네. 도대체 당문이 이러는 이유가 무엇인가? 아미와 당문, 청성, 그간 잘 지내 왔지 않은가?”
“세 문파가 공존하기엔 사천성은 너무 좁지 않습니까?”
“겨우 그런 이유로…….”
광운 신승과 정명 사태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그들은 눈앞에서 일어나는 당문의 행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명 사태는 애써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마지막으로 묻지. 내 제자들을 당문에서 가둬 둔 것 맞는가?”
“맞습니다.”
당천양의 태연한 대답은 간신히 억누르던 정명 사태의 화를 폭발시켰다.
“당문의 썩을 무리들을 이 땅에서 몰아내라.”
그녀의 외침이 아미산에 울려 퍼졌다.
“우와아아!”
아미파의 제자들이 함성을 내지르며 당문의 무인들을 향해 달려갔다.
그 순간 당천양이 손을 들었다. 그러자 당문의 무인들이 품에서 어린아이 팔뚝만 한 원통을 꺼내 아미파의 무인들을 겨눴다.
혈루관혼침(血淚貫魂針)이라는 이름의 금용암기였다. 당문에서 만들기는 했으되 사용하기는 엄격하게 금지된 물품이었다.
퓨퓨퓨퓩!
수백, 수천 개의 은침이 발사되어 아미산의 하늘을 어지러이 수놓았다.
아미산에 지옥이 열리고 있었다.
***
녹의를 입은 무인들의 손에는 어린아이 팔뚝만 한 은색 원통이 들려 있었다. 담호는 그것이 당문의 금용암기인 혈루관혼침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단운향의 곁으로 한 남자가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녹의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쫙 찢어진 눈이 유독 매섭게 보이는 남자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권마! 오늘 이곳이 너의 무덤이 될 것이다.”
“…….”
“똑똑히 기억하거라. 내 이름은 당군양. 네놈의 숨통을 끊을 이름이니까.”
당군양이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뱀처럼 차가우면서도 소름 끼치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의 눈이 살기로 붉게 번들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비친 담호는 그물에 갇힌 고기나 마찬가지였다. 담호는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강 한가운데 고립되어 있었다. 담호의 무공이 제아무리 천지를 진동시키더라도 그가 빠져나갈 구멍은 존재하지 않았다.
담호가 당군양을 바라봤다.
“역시 당문이 마교와 손을 잡았나?”
“그렇다.”
당군양이 더 이상 숨길 것도 없다는 듯이 대답했다.
“왜지?”
“이해관계가 일치했으니까.”
“겨우 그런 이유인가?”
“그 이상의 이유가 필요할 것 같으냐? 천만에! 이보다 더 사소한 이유로도 악마와 손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다. 본문은 이제 좁은 사천성을 벗어나 천하를 웅비할 것이다.”
“마교와 손을 잡고?”
“그렇다.”
남들은 모두 사천삼주라 하며 당문을 떠받들었다. 하지만 당문의 사람들은 사천성을 좁다고 여겼다. 청성파, 아미파와 공존하기엔 당문의 야망이 너무 컸다.
담호의 시선이 당군양의 곁에 서 있는 단운향을 향했다. 그녀는 표독스러운 눈으로 담호를 노려보고 있었다.
“넌 오늘 이 자리에서 반드시 죽는다, 권마.”
“…….”
“네가 빠져나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 절망 속에서 울부짖어라, 권마여. 호호호!”
그녀의 원한 어린 웃음소리가 처절하게 강가에 울려 퍼졌다. 그녀의 머리가 산발되어 흩날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소름 끼치게 무서웠다.
“죽여랏!”
퓨퓨퓨퓩!
그녀의 외침에 당문의 제자들이 일제히 혈루관혼침을 발사했다. 수백, 수천 개의 은침이 허공을 가르며 쏘아졌다.
순간 담호가 발을 크게 굴렀다.
콰아앙!
담호가 타고 있던 운마도강선이 태풍이라도 만난 것처럼 크게 요동치고 강물이 분수처럼 치솟아 올라 시야를 가렸다.
혈루관혼침은 강물을 뚫고 운마도강선에 박혔다. 운마도강선이 벌집처럼 구멍이 뻥뻥 뚫리고 사공들의 처절한 비명이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하지만 물보라가 가라앉은 운마도강선 어디에도 담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냐?”
사람들이 담호의 행방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쾅!
그 순간 단운향과 당군양이 타고 있던 배가 굉음과 함께 크게 흔들렸다.
“뭐냐?”
“무슨?”
배위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급히 배 아래쪽을 바라봤다. 수면과 맞닿은 배의 벽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그 짧은 순간 담호가 몸을 날려 배의 벽을 뚫고 난입한 것이다.
콸콸콸!
담호가 들어온 구멍으로 강물이 미친 듯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놈이 배에 탔다.”
“막아!”
갑판에 타고 있던 이들이 놀라 소리쳤다.
“크아악!”
“켁!”
그 순간 배 아래쪽에서 사람들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콰콰콰!
커다란 배가 미친 듯이 요동쳤다. 그리고 진동은 점점 더 커져 갔다.
단운향과 당군양의 안색이 싹 변한 그 순간이었다.
쾅!
폭음과 함께 갑판이 부서지며 담호가 튀어나왔다. 어느새 그의 전신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붉게 물든 피풍의를 흩날리며 담호가 그들을 향해 쇄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