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2
312화 4장. 혈풍은 사천성에서 불어온다(3)
“헉헉!”
단운향의 입에서 단내 섞인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고, 전신에서는 굵은 땀방울이 쉴 새 없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미친 듯이 고동치고 있었지만 그녀는 결코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담호가 그녀를 추적해 오고 있었다. 비록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짐승의 노린내가 바람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산 것을 잡아먹고 사는 포악한 짐승만이 갖고 있는 역한 숨결에 그녀는 금방이라도 토할 것만 같았다.
멈추면 죽는다.
힘들다고 쉬는 순간 그는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와 등줄기를 물어뜯을 것이다.
단순히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등줄기를 따라 소름이 올라왔다.
‘짐승! 놈은 오직 죽이고, 잡아먹기 위해 태어난 짐승이야. 어디서 그런 자가…….’
생각할수록 진저리가 쳐졌다.
그녀에게 이렇게 두려움을 준 자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다. 교주 척관혈은 그녀에게 존경의 대상이었지, 두려움의 대상은 아니었으니까.
‘달라! 그자는 달라. 정상적인 인간은 분명 아니야.’
설마 투쟁의 대지인 마교에서 자란 자신이 이렇게 생각하게 될 줄은 미처 몰랐다. 그만큼 단운향이 담호에게서 느끼는 두려움은 엄청난 것이었다.
단운향은 달리고 또 달렸다. 전신의 공력을 모조리 끌어 올려 경공을 펼치는 데 투입했다.
그녀의 몸은 마치 바람처럼 빠른 속도로 달려 나갔지만, 단운향은 그래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몰랐다. 겨우 일각밖에 안 지난 것 같기도 했고, 몇 시진이 훌쩍 지난 것 같기도 했다. 그만큼 그녀는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단운향의 얼굴에 갑자기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토록 간절히 오고자 했던 목적지가 바로 앞에 보였기 때문이다.
비탈진 산기슭을 따라 수많은 논들이 계단식으로 늘어서 있는 그림 같은 풍광이 인상적인 조그만 마을이었다.
그곳에 그녀가 그토록 찾던 사람이 있었다.
무릎까지 바짓단을 걷어 올린 채 논을 돌보고 있는 노인이었다. 그는 논에 난 잡초를 뽑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노야!”
단운향이 있는 힘껏 그를 불렀다.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신선처럼 탈속한 풍모를 풍기는 노인은 바로 천오경이었다.
단운향은 십삼지파 중 하나인 전검류의 주인이자 세상의 번잡스러운 일을 뒤로하고 은거한 노강호를 찾아온 것이다.
“운향아.”
천오경이 미친년처럼 행색이 엉망인 단운향을 보고 살짝 놀랐다가 이내 얼굴을 굳혔다. 그녀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가 굳은 표정으로 논에서 걸어 나왔다.
“노야!”
“또 어인 일이냐? 무슨 일이 있었던 게냐?”
“허억! 허억! 모두, 모두 죽었어요.”
단운향이 천오경의 품에 쓰러지듯 안긴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죽다니? 누가?”
“석무강도…… 당문도…… 제 수하들도 모두 죽었어요.”
천오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석무강? 북철왕이 죽었다고?”
“예!”
“누가 그를 죽였단 말이냐?”
벽암류의 젊은 주인 석무강. 비록 자신에 비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천하를 오시할 만한 절대고수였다. 그렇게 쉽게 남에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권……마.”
“권마? 화산파의 그 권마 말이냐?”
“허억! 네!”
단운향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힘들게 대답했다.
천오경의 얼굴은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화산……권마.”
어찌 그 별호를 모를까?
아무리 강호에서 벗어나 있다 해도 풍문은 바람을 타고 흘러 들어온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젊은 권마의 전설은 늙은 그의 심장을 다시 두근거리게 할 만큼 자극적이었다. 무엇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권마가 현소 진인의 제자라는 것이다.
한 잔의 술로 의형제가 되었던 현소 진인. 지금도 눈을 감으면 신선 같은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천오경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업보구나.”
아무리 세상의 인연이 그물처럼 촘촘하게 얽혀 있다지만 이리도 질기고 성긴 줄은 몰랐다.
쿠우우!
그 순간 바람이 불어왔다.
천오경은 바람 속에 담긴 광포한 살의를 느꼈다.
그의 시선이 단운향이 달려온 방향을 향했다. 그곳에서부터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다그닥!
희미한 말발굽 소리가 바람에 섞여 있었다.
눈에 공력을 집중하자 저 멀리서 새까만 말을 타고 오는 검은 옷의 남자가 보였다.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는데도 짙은 혈향이 훅 하고 코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정신이 다 어질어질해질 만큼 강렬한 혈향에 천오경이 미간을 찌푸렸다.
‘저자가 현소의 제자?’
천오경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내저었다.
화산파는 현문 정종의 도가 문파였다. 당연히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무인에게선 도가 특유의 신묘한 기운이 느껴져야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현소 진인이었다.
현소 진인에게서는 마주하는 것만으로 기분을 청량하게 만드는 기운이 물씬 느껴졌다. 하지만 저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에게서는 오직 파괴와 살육의 기운만이 느껴졌다.
“어떻게 현소에게서 저런 제자가 나왔는지 모르겠구나.”
천오경은 탄식 어린 음성을 토해 냈다.
다그닥! 다그닥!
말발굽 소리가 점점 더 커지고 급기야 담호가 바로 그의 지척에 도달했다.
푸르르!
흑귀가 힘껏 투레질을 했다. 흑귀 역시 천오경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담호의 시선이 아직 천오경의 품에 안겨 있는 단운향을 향했다.
“으으!”
그의 눈빛을 받는 것만으로 단운향이 진저리를 쳤다. 그런 단운향의 모습에 천오경이 잠시 눈을 감았다.
그가 아는 단운향은 누군가에게 쉽게 겁을 집어먹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마음이 약한 여인이었다면 성녀라는 직책을 버리고 스스로를 마모라고 칭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담호의 살기가 그녀의 정신을 갉아먹고 있었다. 그리고 천오경의 평정심도 흔들고 있었다.
담호의 시선이 천오경을 향했다.
“당신은?”
“내 이름은 천오경일세.”
“천오경?”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담호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그의 반응에 천오경이 눈을 빛냈다.
“나를 아는 모양이군.”
“알아.”
“역시 그렇군.”
“내 친구의 사부를 죽였으니까.”
“친구라면?”
“초연운.”
“백전문의 초연운 말인가?”
“맞아!”
“아!”
천오경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터트렸다.
그는 운명이 너무 가혹하다고 생각했다.
의형제인 현소 진인의 제자인 것도 모자라 초연운과 연관이 되어 있다니. 악연도 이런 악연이 없었다.
담호가 흑귀에서 내렸다.
흑귀의 엉덩이를 치자 알아서 저 멀리 달려갔다. 강에서 싸움이 벌어졌을 때도 알아서 강물로 뛰어들어 위험을 피했던 흑귀였다. 흑귀는 이번에도 알아서 여파가 미치지 않는 먼 곳으로 피하고 있었다.
담호가 말에서 내리자 더욱 강한 혈향이 느껴졌다. 마치 피에 굶주린 짐승을 눈앞에 둔 기분이었다.
천오경이 애써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말했다.
“그 아이의 일은 미안하게 생각한다네. 그래도 후회는 하지 않는다네. 왜 그런 줄 아나?”
“내가 이유를 알아야 하나?”
“강호에서 은원은 반드시 풀어야 하기 때문이네. 나는 나의 은원을 해결했을 뿐이네. 거기에 초연운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은 없네.”
“거짓말!”
“뭐?”
“모든 은원엔 개인적인 감정이 들어가. 단지 그렇지 않은 척 그럴듯하게 포장할 뿐이지. 마치 당신처럼.”
“으음!”
담호의 독설에 천오경은 할 말을 잃었다.
한순간에 그의 표정이 수십 번이나 변했다.
당혹, 분노, 회한, 미련, 그 외에도 수많은 감정들이 떠올랐다 사라져 갔다.
담호는 말없이 그런 천오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천오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휴! 자네 말이 맞네. 난 위선자네. 겉으론 탈속한 듯 행동하고 다녔지만, 결국 개인적인 원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네. 미안하네.”
“나한테 미안할 것 없어.”
담호의 시선이 아직 천오경의 품에 안겨 있는 단운향을 향했다. 그러자 천오경이 단운향을 자신의 등 뒤로 숨겼다.
“자네는 이 아이에게 원한이 있나 보군.”
“…….”
담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침묵마저도 천오경에겐 훌륭한 답이 되었다.
“그래! 그랬으니까 자네가 예까지 쫓아왔겠지. 허허!”
“…….”
“내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자네가 들어줬으면 좋겠네.”
“…….”
“이쯤에서 돌아가게.”
순간 담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자 천오경이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것 아네. 하지만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이쯤에서 돌아가면 모든 은원을 잊겠네.”
“잊는다?”
“그래! 석무강을 죽인 것, 이 아이를 궁지에 몰아넣은 것, 그 외에도 많은 원한을 잊겠네.”
“…….”
“자네의 사부를 생각해서 하는 말이네. 현소와 나는 의형제라네.”
“그래서?”
“현소와의 정리를 생각해서 하는 말일세.”
“당신이 죽으면 사부가 슬퍼할까?”
“…….”
담호의 차가운 말에 천오경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짧은 몇 마디 말속에 수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천오경은 자신이 담호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몇 마디 말로 담호를 물러나게 한다? 불가능한 일이다.
아마 그의 사부가 직접 오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를 물러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결국 피를 봐야겠다는 건가?”
“그쪽에서 먼저 시작한 전쟁이야.”
“하늘 높은 줄 모르는구나. 네가 강한 것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네가 강호 최강은 아니다. 너무 강하면 꺾이기 마련이고, 때로는 물러나는 것을 택하는 것이 훨씬 더 현명한 법이라네.”
천오경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어떤 말을 하더라도 담호가 듣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담호처럼 맹수의 눈빛을 한 자는 한번 결정하면 결코 마음을 돌리거나 번복하지 않는다.
오직 앞만 보고 달려가는 부류.
설령 그 길의 끝에 절벽만이 존재하더라도 전속력으로 달려가 추락을 선택할 그런 인간이었다.
‘그야말로 최악의 상대.’
무공을 익힌 무인들에게는 꿈에서 보기 두려울 정도로 끔찍한 악몽 같은 상대가 바로 담호 같은 자였다.
천오경이 근처 바닥에 놓여 있던 낫을 집어 들었다.
날도 제대로 서 있지 않은 낡은 낫이었다. 하지만 천오경의 손에 들리는 순간 낫은 천하의 그 어떤 명검 못지않은 예기를 흘리기 시작했다.
천오경이 낫을 든 채 단운향에게 말했다.
“멀리 피하거라.”
“노야!”
“쉽지 않은 싸움이 될 것이다.”
단운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설마 천오경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단운향이 급히 천오경에게서 멀어졌다. 담호는 그 모습을 보면서도 움직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천오경의 전신에서 산천을 압도하는 막대한 기세가 흘러나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수많은 상대와 싸웠던 담호였다. 개중에는 세상을 풍미하던 절대고수도 다수 존재했다. 하지만 그중 누구도 천오경과 같은 압도적인 기세를 풍기지는 못했다.
세상에 염증을 느껴 은거를 택했던 거인의 기세는 담호의 피부에 소름이 올라오게 하기 충분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담호는 타인에게 두려움을 주는 사람이었지,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었다.
마치 눈앞에 거대한 벽이 서 있는 것 같았다.
넘을 엄두조차 나지 않는 거대한 벽이.
하지만 담호는 웃었다.
소름 끼치도록 환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