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3
313화 5장. 삶의 의미를 죽음에서 찾는다(1)
담호는 천오경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쿵! 스르륵! 쿵! 스르륵!
담호 특유의 발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사람의 심령을 불길하게 자극하는 그 소리가 천오경의 심장 또한 자극했다.
천오경은 무척이나 오랜만에 자신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는 것을 느꼈다. 마교 내에서도 이 정도의 긴장감은 별로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있다면 교주인 척관혈을 보았을 때였다.
당시 척관혈은 아직 어렸고, 미완의 대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천오경의 상상을 뛰어넘는 천재였고, 엄청난 독기의 소유자였다.
일단 한 번 목표를 잡으면 절대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붙잡고 늘어져 결국은 원하는 바를 이루고 마는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그의 눈 속에는 세상을 압도하는 무게감이 담겨 있었다. 그래서 천오경을 전율케 만들었다.
변명 같지만 그래서 천오경은 마교의 일에 무심할 수 있었다. 그만큼 척관혈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천오경은 다시 그때의 전율감을 경험하고 있었다.
“후!”
그가 낫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상대는 진짜였다.
단순히 누군가의 제자, 어느 문파의 문도가 아니다.
그 자체로도 완성된 한 명의 무인. 그가 바로 담호였다.
다리를 저는 것 따위에 현혹이 되면 안 된다. 저 정도의 수준에 오른 무인에게 다리를 약간 저는 것 따윈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편견을 갖는 것이 더 위험했다.
천오경은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생각한 호승심을 담호가 강제로 끄집어낸 것이다.
그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좋구나!”
후웅!
산 정상에서 바람이 불어와 그의 옷자락을 흩날리게 만들었다. 바람에 휘감긴 그의 모습은 검선(劍仙), 그 자체였다.
팟!
그 순간 담호가 대지를 박찼다.
충보가 펼쳐진 것이다.
거대한 충차가 짓쳐 오듯 담호의 몸이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주변의 모든 것이 사라지고 오직 하나, 담호의 모습만이 망막에 남았다.
천오경이 낫을 가볍게 그었다.
위에서 아래로 그저 가볍게 손을 흔들었을 뿐이다.
슈가악!
순간 담호는 세상이 두 동강 나는 듯한 환상을 보았다. 아니, 환상이 아니었다.
모든 것이 잘려 나가고 있었다.
대기도, 그의 앞의 공간도.
피해야 했다.
이대로 달려가다가는 그의 몸도 두 동강이 날 것이다.
본능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콰아아!
담호는 속도를 더 높였다.
충차의 무게감에 속도가 더해졌다.
콰아앙!
순간 폭음이 터져 나왔다.
무형의 검기와 담호의 몸이 격돌한 것이다.
담호의 뒤쪽 공간이 잘려 나갔다. 담호의 옷자락도 잘려져 나가 펄럭였다. 담호의 어깨와 허리에도 긴 자상이 생겨나 있었다. 하지만 피륙의 상처일 뿐 깊지는 않았다.
위기의 순간 파성추를 펼쳤기 때문이다.
천오경의 검기를 완전히 상쇄시키지는 못했지만, 위력은 감소시켰다. 담호에겐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의 무공은, 그가 창조해 낸 독행류는 오직 전진만을 위한 무공이었다.
독행류에 회피나 후퇴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전진할 때 최고의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 그래서 담호는 전진했다.
화악!
공기가 광포하게 천오경에게 밀려왔다. 담호의 움직임에 공기마저 움직이는 것이다.
바람을 타고 파성추가 펼쳐졌다.
콰앙!
맹렬한 폭음이 터져 나오며 천오경의 몸이 들썩였다. 하지만 천오경은 그 어떤 타격도 입지 않았다. 낫을 들어 담호의 주먹을 막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피륙과 날이 서 있는 쇠붙이가 격돌했다. 그런데도 담호의 주먹엔 상처 하나 없었고, 평범한 낫 역시 멀쩡했다.
두 사람의 성취가 어느 정도인지 보여 주는 광경이었다.
“대단하구나.”
천오경이 순수하게 감탄사를 터트렸다.
평범해 보이는 듯한 검식이었지만, 그 안에는 천오경 일평생의 공력이 녹아 있었다. 결코 쉽게 해소하거나 흘려보낼 만한 공격이 아니었는데, 담호는 오히려 전진해서 상쇄시킨 것이다.
실로 발군의 감각과 용기였다. 등줄기가 절로 서늘해질 정도였다.
그는 이 정도의 감각을 가진 자를 본 적이 없었다.
슈우우!
담호의 이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동시에 천오경이 구름을 밟듯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구름을 타고 움직이는 보법인 표운보(漂雲步)였다. 거기에 평생을 쌓아 온 전검류의 심득이 더해졌다.
구름을 타고 움직이고, 바람처럼 검을 휘두른다.
마검선(魔劍仙).
마도를 걷는 검선.
천오경은 그 본색을 유감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그가 낫을 휘두를 때마다 공기가 갈라지고, 공간이 잘려져 나갔다. 공간마저 지배하는 그의 검공은 실로 가공했다.
피핏!
담호의 전신에 상처가 늘어났다.
긴 자상이 생겨나고 피가 치솟아 올랐다. 그래도 담호가 견딜 수 있는 것은 그가 방패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서 일어난 은밀한 진동은 천오경의 검을 미세한 궤도로 틀어버리고 있었다.
후웅! 훙!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연신 울려 퍼졌다.
단 하나라도 직격을 당하면 단지 팔다리가 떨어져나가는 걸로 그치지 않는다. 몸이 두 동강 나는 것이다.
천오경이 숨 쉬는 것, 걸음을 옮기는 것, 팔을 휘두르는 것, 손짓, 발짓, 미세한 몸짓까지도 모두 하나의 완성된 무공이었다.
담호가 상대하는 천오경이란 존재는 수십 년을 참오 해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궁구하는 경지에 근접한 검객이었다. 그와의 싸움은 담호의 집중력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단양타, 오지암파경, 충각 등의 절초를 연이어 펼쳤다. 그에 맞서 천오경 역시 쉴 새 없이 낫을 휘둘렀다.
쾅! 쾅! 쾅!
연신 굉음이 울려 퍼졌다.
대기가 일렁이고, 후폭풍이 방원 수십여 장에 몰아쳤다.
콰르르!
이제 겨우 싹을 틔우고 푸른색으로 물들어 가던 계단 논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푸화학!
담호의 왼쪽 어깨가 뒤로 젖혀졌다. 천오경의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천오경의 낫에 살점이 한 뭉텅이나 날아갔다.
피가 철철 흐르고, 뼈가 드러났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날아갈 정도로 아득한 고통이 찾아왔다.
담호가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의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생각해 보면 그는 늘 위기였고,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을 걷는 고행이었다.
팔 하나 날아가도 괜찮았고, 다리를 잃어도 상관없었다.
육체의 고통 따윈 진즉에 잊었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하고 있었다.
“허!”
그런 담호의 모습에 천오경이 탄식을 터트렸다.
그렇게 쉼 없이 공격하지만 결국 담호를 단 한 발짝도 밀어내지 못했다.
마치 악몽처럼 담호는 그렇게 천오경을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그리고 기어이 일격을 먹였다.
콰앙!
파성추였다.
“크흠!”
천오경의 입에서 절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순간적으로 호신강기를 끌어올려 육신을 보호했지만 내장이 진탕되고 만 것이다.
천오경은 평범한 초식으로는 담호를 어찌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가 상대하는 단 일격에 숨통을 완전히 끊기 전에는 절대 떨쳐 낼 수 없는 그런 존재였다.
천오경의 눈빛이 변했다.
순간 일대의 기온이 차갑게 내려갔다.
착각이 아니었다. 실제로 주위의 온도가 급속도로 내려갔다. 살심을 먹는 것만으로도 외기가 기온을 빼앗으며 그에게 유입되는 것이다.
“하압!”
천오경이 낫을 내질렀다.
순간 세상에 구멍이 뻥 뚫렸다.
일점혈(一點血)
종남산에서 초연운의 사부를 죽였던 바로 그 초식이 담호를 향해 펼쳐졌다.
순간 담호는 자신의 죽음을 봤다.
미간에 구멍이 뚫려 대지를 나뒹구는 환상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피부가 떨렸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막대한 압력에 제일 먼저 코에서 피가 터졌다. 다음은 귀였다. 고막도 터진 것이다.
울컥!
바로 피를 토했다. 내장이 진탕되다 못해 찢겨져 나간 것이다.
실핏줄이 터진 안구가 금방이라도 피가 뚝뚝 떨어질 듯 붉게 충혈됐다. 실제로 담호의 두 눈은 터지기 직전이었다.
물러나야 했다.
일단 피하거나 물러나 압력을 해소한 후 반격을 해야 했다. 하지만 담호는 그러지 않았다.
물러서는 순간 이제까지 그가 쌓아 온 모든 것이 꺾였다.
목숨을 걸고서라도 전진해야 했다.
담호는 자신을 믿었다.
자신이 걸어온 길을.
자신이 만들어 낸 독행류를.
콰아아!
담호의 몸 주위로 거친 기류가 휘돌았다. 폭마경이 펼쳐진 것이다.
호랑이의 이빨처럼 사나운 폭강과 일점혈이 부딪쳤다.
콰아아앙!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과 함께 계단식 논이 들어서 있던 야산이 무너져 내리고, 칼날 같은 바람이 일대에 휘몰아쳤다.
“아악!”
후폭풍에 휩쓸린 단운향이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날아갔다.
거칠게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단운향이 겨우 고개를 들고 전장을 바라봤다.
“이럴…… 수가!”
단운향이 멍하니 전방을 바라봤다.
인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싸움은 그녀의 상상을 아득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싸움을 견식 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이런 싸움이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상식을 벗어난 천외천의 싸움이었다.
야산이 무너진 곳을 중심으로 먼지구름이 일어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쩌어엉!
먼지구름 속에서 연신 굉음이 울려 퍼졌다. 그때마다 가공할 기파가 일어나 먼지구름이 이리저리 요동쳤다.
단운향이 눈을 부릅떴지만 짙은 먼지에 가려 너머의 광경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돼 가는 거지?’
그녀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일 천오경이 조금이라도 불리하면 그녀는 가차 없이 튈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지, 천오경의 안위가 아니었다.
단운향은 마른 침을 꼴깍 삼키며 전장을 바라봤다.
번쩍!
그 순간 먼지 안에서 한 줄기 검광이 번쩍였다.
“…….”
단운향이 움직임을 멈췄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세상 모든 것이 멈췄다.
흘러가던 구름도, 불어오던 바람도, 피어오르던 먼지도 움직임을 멈췄다.
세상이 절단됐다.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은 그랬다.
그 안에서 그 어떤 것의 움직임도 허락되지 않을 것 같았다.
단운향은 본능적으로 천오경이 전검류의 최절초를 펼친 것을 알아차렸다.
‘이겼다.’
도저히 쓰러지지 않을 것 같던 그 괴물을, 누구도 멈춰 세우지 못할 것 같은 그 포악한 짐승이 드디어 쓰러졌다.
단운향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노야!”
그녀는 천오경이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곳을 향해 뛰어갔다.
천오경을 보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천오경이 쓰러트린 담호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의 시체를 봐야만 안심이 되고, 속이 시원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슈우우!
일대의 공기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무슨?”
바람에 휩쓸린 단운향의 몸이 비틀거렸다.
불길한 예감에 그녀가 고개를 들어 전방을 바라볼 때였다.
콰콰콰콰각!
그 순간 정지되어 있던 먼지구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폭풍으로 변했다.
“크흡!”
그 속에서 누군가의 나지막한 비명 소리가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