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5
315화 5장. 삶의 의미를 죽음에서 찾는다(3)
푸른 산이 성처럼 둘러싸인 곳, 그래서 붙여진 이름조차 청성산(靑城山)이었다.
청성산에는 오래전부터 청성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방술(方術)과 부주법(符呪法)을 주로 사용하는 조그만 도관으로 시작을 했지만, 점차 군문의 실전 무공과 자객들의 살법(殺法)까지 받아들이면서 청성파만의 독특한 무공 체계를 발전시켜 나갔다.
거기다 사천성의 폐쇄적인 지형까지 더해지면서 청성파는 강호 그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무공 지도를 완성시켰다.
실전적이면서도, 음유하고, 거기에 주술적인 요소까지 녹아 있는 청성파의 무공은 사천성 내에서는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청성파는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라 일컬어지는 구무룡(九武龍) 중 한 명인 사천일성(四川一星) 청운을 배출하면서 최고의 성세를 이어 가고 있었다.
“아!”
청성파의 장문인인 호광 진인이 붉게 충혈된 눈으로 뒤를 바라봤다. 늘 푸른 경관을 자랑하는 청성산 한가운데 자리한 자랑스러운 청성파가 불타고 있었다.
화염에 쓰러지는 거대한 도관과 청석으로 만든 바닥을 붉게 적시는 선혈.
수백 년을 이어 온 자랑스러운 청성파가 무너지고 있었다.
호광 진인은 자신이 그토록 공들여 키운 청성파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은 몰랐다.
그가 붉게 충혈된 눈을 부릅뜬 채 전방을 노려보았다. 그러자 녹의를 입은 무인들이 보였다.
사천성에서 저렇게 녹의를 입는 문파는 단 한 곳밖에 없었다.
“당문……. 어떻게 너희들이?”
호광 진인은 극심한 배신감에 치를 떨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당문과 청성파는 아주 오래전부터 맹우였다. 비록 사정에 따라 반목을 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는 동맹이라는 생각이 저변에 깔려 있었다.
그 때문에 충돌을 하더라도 적당한 선에서 알아서 양보하고 화해했지, 이렇게까지 극렬한 무력 충돌을 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청운.”
“장……문인.”
사천일성(四川一星)이라 불리는 기재 청운이 힘겹게 대답했다.
그 역시 호광 진인처럼 전신에 상처를 입은 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당문을 상대고 분전을 하면서 얻은 상처였다.
호광 진인이 단호한 표정으로 명령했다.
“너만이라도 청성산을 빠져나가거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장문인. 제게 청성파를 버리라는 명만은 제발 하지 말아 주십시오.”
“청성파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너만이라도 훗날을 기약하란 뜻이다.”
“장문인!”
청운이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하지만 호광 진인의 표정은 흔들리지 않았다.
“사천성 내에서 당문을 견제할 문파나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크흑!”
“그러니 너는 당장 무림맹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하거라. 당문이 정파 무림을 배신했다고.”
호광 진인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구대문파 중 하나인 청성파의 장문인이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의 눈물엔 억겁의 무게가 담겨 있었다.
“장문인.”
“가라! 당장!”
“크흑!”
결국 청운이 피눈물을 흘리며 몸을 돌려 경공을 펼쳤다. 그 역시 청성파와 운명을 함께하고 싶었다. 하지만 누군가는 무림맹에 당문이 배신한 사실을 알려야 했다. 청성파에서 그 사실을 전할 가능성이 가장 큰 사람은 누구도 아닌 그 자신이었다.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반드시 무림맹의 병력을 이끌고 돌아오겠습니다.’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을 기약하면서 전력으로 경공을 펼쳤다.
“후우!”
제자의 모습이 멀리 사라진 것을 확인한 호광 진인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비록 성격이 급하고, 오만하긴 했지만 청성파의 절기를 제대로 이어받은 청운이었다. 그가 사천성을 무사히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최악의 경우에도 청성파의 비전은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때였다.
“현명한 선택이군.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다니.”
담담한 목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호광 진인이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그의 앞에 오십 전후의 중늙은이가 보였다.
흰머리 하나 없는 새까만 머리와 초점이 분명한 선명한 눈동자. 그리고 쫙 핀 허리와 당당한 어깨, 겉모습만 봐서는 누구도 그를 여든이 넘은 노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당…… 문주.”
여든이 넘은 나이에도 젊은이들과 같은 당당함을 자랑하는 무인은 바로 당문의 문주인 당사일이었다.
당사일이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내 생각보다는 오래 버텼네. 청성파의 저력이 참으로 대단하이.”
“왜 그러는 겁니까? 혹시 청성파가 당문의 심기를 건드렸습니까?”
“아니! 그런 적 없네. 자네는 참으로 청성파를 잘 이끌었네. 덕분에 사천성이 오래도록 태평성대를 누렸지.”
“그런데 왜?”
“우리도 살아야 하니까.”
“무슨?”
“그냥 살아남기 위한 발버둥이라고 생각해 주게.”
“당문이 발버둥을 치고 있다는 겁니까?”
“그렇다네.”
당사일이 담담히 대답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마저 담담하지는 않았다.
“그 말을 믿으라는 겁니까? 천하의 당문이 생존하기 위해 발버둥 친다고.”
“믿지 않아도 상관없네. 마교는 그 정도의 저력이 있는 곳이니까.”
“역시 마교와 손을 잡은 겁니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네.”
“어떻게 수백 년 동안 사천성의 패주였던 당문이 마교와 손을 잡는단 말입니까? 의협당문이란 이름에 그렇게 먹칠을 하다니. 당문의 영령들을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 허나 주변에서 아무리 의협당문이라고 치켜세워 줘 봐야 무얼 하겠는가? 좁디좁은 사천성을 삼분하고 있는 그저 그런 문파에 불과한데.”
“아!”
호광 진인이 치를 떨었다.
아무리 마교 때문이라고 포장을 해도 결국은 당문이 야욕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았다.
“후회하게 되실 겁니다. 아무리 사천성을 삼분하는 게 싫더라도 마교와 손을 잡다니. 선을 넘어도 한참을 넘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지.”
“무림맹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당문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전 무림의 힘이 합쳐진 무림맹을 당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 또한 사실이지. 하지만 불행히도 무림맹이 이곳에 신경 쓰는 일은 없을 것이네.”
“그게 무슨?”
“제 코가 석자인데 이 멀리 사천성까지 신경 쓴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
당사일이 빙그레 웃었다. 조롱기가 가득 담긴 그의 미소에 호광 진인은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을 받았다.
당사일이 뒷짐을 쥔 채 호광 진인에게 다가왔다.
“자네에겐 오직 두 가지의 선택지만이 남아 있네. 하나는 이렇게 끝까지 항쟁하는 것. 또 하나는 봉문을 하는 것. 봉문을 선택하겠다면 청성파의 명맥을 잇는 것을 허락해 주겠네. 허나 끝까지 대항하겠다면 청성파의 마지막 주춧돌 하나까지 찾아내 모조리 파괴하고,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지워 주겠네. 어떻게 하겠는가?”
“으으!”
“결정을 빨리하는 것이 좋을 걸세. 더 이상 큰 피해를 막으려면.”
당사일이 미소를 지은 채 청성파를 둘러봤다.
청성파 전체에 희뿌연 연기가 떠돌고 있었다. 평범한 연기가 아니다. 산공독(散功毒)이 섞여 있었다. 공력을 흩트려 버리는 산공독을 청성파 전체에 살포한 것이다.
내공이 고강한 무인들이야 어찌어찌 버틸 수 있다고 하지만, 무공이 약한 무인들은 내공이 금제당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반면 당문의 무인들은 미리 해독약을 복용해서 산공독에 상관없이 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속절없이 쓰러지는 것은 청성파의 무인들이었다.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른다면 명맥을 보존하는 것조차 힘이 들 것이 분명했다.
호광 진인이 고개를 숙였다.
“봉……문하겠습니다.”
“잘 결정했네.”
당사일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호광 진인은 더욱 큰 굴욕감을 느꼈다.
“크윽!”
이를 악문 그의 입술 사이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조건 없는 항복과 봉문을 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싸움은 끝이 났다. 청성파의 무인들은 목숨을 구했다는 사실보다는 봉문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눈물을 흘렸다.
그 시각 아미파 역시 큰 피해를 입은 채 봉문을 했다. 사천삼주라고 불리던 세 문파 중 두 곳이 한날 봉문을 선택한 것이다.
당사일이 어깨를 쭉 편 채 산 아래 보이는 사천성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시작이다. 외부로 통하는 모든 관도를 철저히 막아라. 그 누구도 당문의 허락 없이는 사천성으로 들어올 수도, 나갈 수도 없다.”
“존명!”
“이제 사천성은 당문이 지배한다.”
당사일의 선언이 사천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
사천성 곳곳에 수많은 무인들이 깔렸다.
당문은 당씨 성을 쓰는 무인들의 집합체. 사천성 전체의 무인들에 비하면 그 수는 극히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당문에는 사천성에서 수백 년 동안 쌓아 온 영향력이 존재했다.
수많은 속가 문파들이 존재하고, 음으로 양으로 끈이 땋은 수많은 문파들이 존재했다. 그런 문파들이 당문의 명을 받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장 사천성으로 들어오는 모든 관도가 막혔다. 거리마다 수많은 무인들이 깔려 검문을 시작했고, 허락받지 못한 자는 나갈 수도, 들어올 수도 없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폐쇄적인 지형을 갖고 있는 사천성은 스스로 고립을 택하면서 천험의 요새가 되었다. 그 옛날 촉나라가 그랬듯이 말이다.
당문의 뜻에 반하는 문파들은 참화를 당하거나 강제로 봉문을 당했다. 사천성에서 당문의 위세를 거스를 만한 문파나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사천성은 당문의 발아래 놓였다.
“설마 신교와 당문이 손을 잡았을 줄이야.”
음유경이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현재 그녀는 조그만 배위에 몸을 싣고 있었다.
조그맣다고 하지만 안에는 몸을 뉘일 수 있는 작은 선실이 있고, 갑판에는 말을 묶어 둘 수 있는 공간도 존재했다.
음유경은 뱃사공에게 부탁해 가림막으로 갑판 전체를 가렸다. 갑판 위에 너무나 눈에 띄는 검은 말, 흑귀가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선실 안에서는 담호와 검율천 두 사람이 운공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극심한 상처를 입었기에 운공이 길어지고 있었다. 그들의 운공이 언제 끝날지 알 수 없었기에 일행의 안전을 책임지는 것은 오롯이 음유경의 몫이었다.
때문에 음유경은 한시도 경계를 풀지 않고 수면을 응시했다.
그때 조용히 배를 몰던 사공이 입을 열었다.
“성녀님,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당문이 아무리 검문을 철저히 해도 뱃길마저 모두 장악할 수는 없을 겁니다.”
“고마워요, 고 숙부. 항상 도움만 받네요.”
“아닙니다. 이렇게나마 성녀님을 도울 수 있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사공이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의 이름은 고광혼, 음유경과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마교의 고수였다. 그는 오랫동안 음지에서 음유경을 도와주며 헌신했다.
고광혼은 수공의 고수로 배를 다루는 데 매우 능했다. 그는 배가 요동치지 않게 각별히 주의하며 돛을 조정하고 있었다. 덕분에 배는 매우 빠른 속도로 물길을 헤치며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때였다.
후웅!
갑자기 배가 격렬하게 진동하기 시작했다.
“무슨?”
갑작스러운 변고에 고광혼의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음유경은 냉정함을 잃지 않았다.
“누구지?”
운공이 절정에 달했을 때 일어난 현상이었다.
지금 배에서 운공을 하는 사람은 담호와 검율천이었다. 둘 중 누구의 운공이 절정에 달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녀와 고광혼은 숨을 죽인 채 진동이 가라앉길 기다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그토록 경련하던 진동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파문이 일던 수면도 점차 평화를 되찾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선실 입구로 향했다. 과연 누가 먼저 나올지 궁금한 것이다.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누군가 걸어 나왔다.
히힝!
이제까지 조용히 있던 흑귀가 투레질을 하며 콧김을 뿜었다.
‘권마!’
‘담호.’
음유경과 고광혼이 침음성을 흘렸다.
먼저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담호였다.
비록 안색이 창백하긴 했지만, 그의 눈은 여전히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담호가 반갑다고 연신 투레질을 하는 흑귀의 목덜미를 몇 차례 두들겨 주었다. 그러자 흑귀의 움직임이 잦아들었다.
그때 또 한 명의 남자가 선실 안에서 걸어 나왔다.
“율천!”
잠시나마 굳어졌던 음유경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올랐다.
기다렸다는 듯이 담호의 뒤를 따라오는 남자는 바로 검율천이었다.
담호가 뒤를 돌아봤다.
“담호.”
“검율천.”
두 사내의 시선이 서로를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