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317화 (317/500)

 317

317화 6장. 권마불굴(拳魔不屈)……(2)

적경천을 바라보는 남궁창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기색이 역력히 떠올라 있었다. 그런 남궁창을 보며 적경천이 미소를 지었다.

“왜 믿기지 않는가?”

“정마대전 당시 돌아가신 것이 아니었습니까? 모두가 그렇게 알고 있는데…….”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네.”

“그게 무슨?”

“그 이야기는 술 한잔하며 하고 싶군. 자네들이야말로 현 강호의 정점이자 미래가 아니던가?”

적경천이 흐뭇한 표정으로 남궁창을 바라봤다. 남궁창은 그의 말을 거부할 수 없었다.

적경천은 최소 그보다 최소 한 세대 전의 인물이었다. 비록 사신제에 가려져 있었지만, 그의 무위는 당시 강호 최정상에 속했다. 오죽했으면 별호조차 천도왕이라 붙었을까?

도 한 자루만 들면 적수가 없다는 전대의 절대고수. 하물며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그의 무위가 어느 정도일지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남궁창이 뚫어져라 적경천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도 적경천은 여유로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이게 무슨?’

남궁창이 이번엔 맹주인 남천산을 바라봤다.

그가 아는 남천산은 무공은 강하지만 인맥이 그리 폭넓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문주로 있는 신창문 역시 강호 대문파에 비하면 그리 힘이 있는 문파가 아니었다. 그것이 남천산을 맹주로 추대한 이유였다.

남천산은 신창이란 별호답게 무공은 고강하지만, 정치력이나 다양한 인맥이 부족했다. 때문에 무림맹 내에서 고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남궁창 등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다.

무림맹과 수뇌부, 그리고 주축 문파들을 지켜 줄 사냥개가 필요한 것이지, 위협할 맹수가 필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지금 이 순간 남궁창은 오싹한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남천산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런 남천산의 모습에서 그는 알 수 없는 위협을 느꼈다.

‘맹주가 어떻게 천도왕을 끌어들인 거지?’

구대문파와 오대세가도 천도왕 적경천이 생존해 있다는 사실을 까마득하게 몰랐다. 그런데 끈 떨어진 신세나 다름없는 남천산이 적경천을 찾아내고, 또 끌어들였다.

‘어떻게?’

지금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무림맹의 군사였다.

머릿속에 수많은 의문이 들고, 여러모로 의심스러운 것이 많았지만 얼굴은 웃고 있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미소와 여유를 잃으면 안 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웃었다.

적경천이 그런 남궁창을 보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과연 무림맹의 지낭이라더니 제법이군.’

그들이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기 무섭게 시비가 술과 안주를 챙겨 왔다.

“먼저 받으시게.”

“감사합니다.”

남궁창은 적경천이 따라 주는 술을 담담하게 받아 들었다. 적경천은 이어 맹주인 남천산의 술잔에도 술을 가득 따라 준 후 자신의 잔에도 가득 채웠다.

“마시지.”

적경천이 먼저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남천산과 남궁창도 그를 따라 술을 마셨다.

술이 몇 순배 돌았다. 순식간에 그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적경천이었다.

“이렇게 후배들과 술을 마시니 기분이 좋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일찍 나올걸 그랬어.”

“그동안 어떻게 지내신 겁니까?”

“많은 일들이 있었지.”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 계셨으면서 어찌 은둔하고 있었던 겁니까?”

“말했잖은가? 많은 일들이 있었다고. 그 일을 모두 이야기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걸세.”

“이곳은 무림맹입니다. 그리고 저는 무림맹의 군사입니다. 마음만 먹는다면 아주 많은 시간을 낼 수 있지요.”

“그런가?”

적경천이 새삼스럽다는 표정으로 남궁창을 바라봤다.

전대의 인물인 자신을 보고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 남궁창의 모습이 꽤 신선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적경천이 다시 입안에 술잔을 털어 넣었다. 굉장히 독한 술이라서 그런지 목구멍이 다 아파 왔다.

“모두 알다시피 일차 정마대전이 막바지에 달했을 때 우리는 마교의 총단을 기습 공격했지. 마교의 총단은 그야말로 죽음의 함정과 수많은 마교도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네. 그래서 우리는 사선을 수도 없이 넘어야 했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모르네. 사신제가 우리들을 이끌었고, 우리는 사신제를 따라 총단 깊숙이 들어갔지. 많은 이들이 상처를 입어 낙오가 되었거나 목숨을 잃었지. 나 역시 최후의 관문을 앞에 두고 움직일 수 없는 상처를 입고 낙오되었지.”

적경천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졌다.

교주가 있는 곳을 눈앞에 두고 그는 스스로의 결정으로 낙오를 했다. 자신의 몸 상태로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짐이 될 뿐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대신 나는 관문을 막아서서 마교의 지원군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틀어막았지. 싸우고, 또 싸우고, 그리고 싸웠네. 내 자신도 잊고, 주변이 흘러가는 상황도 잊은 채.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수많은 시신 한가운데 쓰러져 있더군. 어떻게 된 것인지 사정을 파악할 틈도 없었네. 그때는 정말 살고 싶었거든. 나는 벌레처럼 기어서 그곳을 빠져나왔네.”

어떻게 총단을 빠져나왔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제정신을 차렸을 때는 총단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다.

남궁창이 물었다.

“그렇다면 왜 당시 정의맹으로 돌아오지 않으셨습니까?”

“상처가 너무 심했네. 움직일 수조차 없었지. 그래서 조용한 곳을 찾아 운공요상을 했네. 내 의지로 움직일 수 있게 되기까지 무려 오 년이 걸렸네.”

“으음!”

“상처를 치료할 때까지만 하더라도 정의맹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네. 하지만 막상 상처가 치료되자 모든 욕망이 사라졌네. 마교가 전멸했으니 내가 할 일이 무에 있을까 고민되더군. 그래서 차라리 마음이나 편하게 지내고자 은거해 지냈다네.”

“수십 년을 말입니까?”

“그렇다네. 왜 믿기지 않는가?”

“솔직히 그렇습니다.”

“자네도 내 경지에 이르면 알게 될 걸세. 내가 이제까지 소중하게 생각하던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덧없어지고, 물욕의 경계가 사라지는 것을. 또한 강호에서 내 역할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네.”

“저로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군요.”

“그럴 걸세. 허나 내 말은 사실일세.”

“알겠습니다. 그렇게 이해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럼 강호엔 왜 다시 나오신 겁니까?”

“그 역시 마교 때문일세.”

“마교?”

“내가 모든 욕망을 버렸지만, 아직까지도 마교는 용서가 안 되더군. 그것이 내가 세상에 다시 나온 이유일세. 그래서 맹주에게 따로 은밀히 연락했고, 내 모든 것을 바쳐 맹주를 돕겠다고 맹세했다네.”

“어려운 결정을 하셨군요.”

남궁창이 술잔을 입안에 가져갔다.

애써 미소를 짓고 있지만 그의 머릿속은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적경천은 무림맹이 아닌 맹주를 돕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은 곧 무림맹 전체의 편보다는 맹주의 편을 들겠다고 선언한 바나 다름없었다.

적경천의 합류는 무림맹 전체 입장에서 봤을 때는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남궁창과 무림맹 수뇌부들로서는 껄끄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남궁창은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했다.

“그럼 앞으로 무림맹을 도와 마교와 싸우겠다는 겁니까?”

“맹주의 명이라면 무엇이든 따를 각오가 되어 있다네. 그것이 무림맹을 위한 일이니까.”

남궁창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의 놀람은 아직 끝이 아니었다.

적경천이 술잔을 따르며 말했다.

“나와 같은 이가 몇 명 더 있다네. 최후의 전쟁에서 살아남은 친구들이. 그들이 맹주를 도와 마교를 물리치고 싶다고 전하라는군.”

“적…… 선배 같은 분들이 또 있단 말입니까?”

“그렇다네.”

“으음!”

남궁창의 입술을 비집고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런 남궁창의 모습을 보며 남천산이 미소를 지었다.

“전대의 선배 고수들이 도움을 준다 하니 이는 무림의 큰 흥복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군사.”

“그……렇습니다.”

남천산의 목소리에는 힘이 넘쳤고, 남궁창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묘한 대비를 이뤘다.

***

배는 강기슭에서 멈춰 섰다.

담호와 흑귀는 배에서 내렸다. 그들을 내린 배는 강을 타고 다시 흘러가고 있었다.

담호는 무심한 눈으로 멀어지는 배를 바라봤다. 배의 갑판에는 검율천이 서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서로를 바라봤다.

마침내 배가 저 멀리 사라지고 난 후에야 담호는 흑귀에 올라탔다.

“가자.”

오랜만에 육지를 밟은 흑귀가 기분이 좋은지 경쾌하게 걸음을 옮겼다. 담호는 흑귀에 몸을 맡긴 채 눈을 감았다.

검율천과 공조를 하기로 결정한 것이 과연 잘한 일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었다. 그래도 담호는 자신의 눈을 믿었다.

그가 본 검율천은 부러질지언정 굽을 사람은 아니었다. 일단 말을 내뱉으면 반드시 지키는 사람. 바로 자신과 같은 부류였다.

검율천에겐 검율천의 역할이 있고, 자신에게는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었다.

담호가 있는 곳은 아직 사천성이었다.

일단은 사천성을 벗어나야 했다.

검율천과 함께 사천성을 빠져나갈 수도 있었지만, 맡은 바 역할이 다르기에 헤어졌다.

담호는 관도를 따라 흑귀를 몰았다. 일단 방향만 잡아 주면 흑귀가 알아서 갔기에 담호는 운공과 명상에 열중했다.

천오경과의 싸움은 그를 상하게도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깨달음의 단초를 준 것이 사실이었다.

그는 흑귀의 등에서 천오경과의 싸움을 수없이 복기했다.

천오경이 전검류를 펼치던 모습, 그를 상대로 적수공권으로 뛰어들던 모습이 수없이 되풀이됐다.

충보를 시작으로 파성추, 단양타, 지천격 등의 절초가 펼쳐진다. 하지만 그 어떤 초식도 천오경을 상하게 하지 못했다.

천오경의 움직임은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비록 오랫동안 제대로 된 무공을 펼치지 못해 거칠긴 했지만, 그의 움직임은 매우 유려했고 확실하게 자신의 숨통을 노리고 있었다. 그에 비해 담호의 초식은 무척이나 거칠었다.

짐승 같은 그의 성향 때문이었다.

일단 한 번 숨통을 물으면 끊어질 때까지 절대 놓지 않는 집요함과 반드시 죽이겠다는 의지가 결합이 되어 무척이나 흉포했다.

독행류의 최종장인 육합혈산하가 그 대표적인 예였다.

이십사연격이 들어간다면 그 어떤 절대무인도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은 이미 천오경을 통해 증명했다. 하지만 담호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문득 담호의 입술을 비집고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하나의 선.”

삶에서 죽음으로 이어지는 선.

충보로 시작하되 마지막은 육합혈산하로 이어지는 죽음의 선. 담호는 그 선을 원했다.

담호는 상상을 했다.

죽음의 선을 만들어 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 속의 그는 완전무결했다.

푸르르!

그때 흑귀가 투레질을 하며 담호가 상상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다.

담호가 눈을 뜬 후 제일 먼저 본 것은 관도를 막고 있는 일단의 무리였다. 하나같이 녹의를 입고 있는 무인들은 관도에 검문소를 세운 채 지나가는 사람들을 검문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선 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거기, 줄을 똑바로 서도록.”

“어디로 가는 건가?”

녹의를 입은 무인들은 관도를 지나가려는 사람들의 신분과 목적지를 일일이 확인했다.

누구나 지나갈 수 있는 관도였다. 그런 관도를 점거한 채 불합리한 행동을 하는 무인들에게 사람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지금 관도를 막고 있는 자들이 사천성에서 가장 무서운 단체에 속한 무인이라는 것을.

녹의를 입은 이들은 청성파, 아미파와 더불어 사천성에서 가장 절대적인 권력을 갖는 가문인 당문에서 나온 무인들이었다.

얼마 전부터 사천성 전역은 당문에서 나온 무인들로 인해 공포스러운 분위기가 유지되고 있었다.

당문은 사천성을 봉쇄하고, 사람들의 이동을 제한했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불만은 나날이 커지고 있었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당문을 견제해야 할 청성파와 아미파는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로서는 속이 탈 일이었다. 하지만 감히 사천을 지배하고 있는 당문에 반기를 들 수는 없었다.

그들은 길게 줄을 늘어선 채 어서 검문을 통과하기만 빌 뿐이었다.

담호가 검문소를 향해 흑귀를 몰았다. 그러자 검문소를 지키고 있던 당문의 무인들이 대번에 경계심을 드러냈다.

“웬 놈이냐?”

“거기 멈춰라!”

그들이 담호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수상한 놈이구나. 말에서 내려 정체를 밝혀라.”

담호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들이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어서 말에서 내리지 못하겠느냐?”

“…….”

담호가 흑귀의 등에서 내렸다.

순간 살벌한 기세를 피워 올리던 당문의 무인들이 움찔했다. 말에서 내린 담호가 발을 저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권마?”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