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
325화 8장. 안에서 호응하고, 밖에서 흔든다(4)
갑작스러운 소란에 적경천이 눈살을 찌푸렸다.
창문을 열자 불길에 휩싸인 무림맹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마교의 무인들이 밀물처럼 들이닥치는 모습이 보였다.
안쪽에서는 신화상단의 무인들이 동조하고, 밖에서는 마교의 무인들이 호응하고 있다. 내우외환 속에 무림맹은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한 채 지리멸렬하고 있었다.
“놈들을 막아.”
“서쪽 벽으로 놈들이 밀려온다. 병력을 더 보내.”
내당, 외당, 오행대 등이 분전을 하고 있었지만, 순식간에 기울어진 무게 추를 되돌릴 수는 없었다.
마교의 기습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이뤄졌다. 무림맹이라는 울타리에 안주하고 있던 무인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 없었다.
볼썽사나운 모습에 적경천이 혀를 찼다.
“쯧! 무림은 그동안 어떠한 교훈도 얻지 못한 것 같군.”
그가 실망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실망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가 도를 꺼내 들고 전장으로 뛰어들었다. 그의 목표는 마교의 선두에서 엄청난 위용을 뽐내고 있는 절대고수였다. 그의 몸에서 발산되는 검은 기운이 마치 그림자처럼 일렁였다.
적경천의 눈이 번뜩이며 그를 향해 도를 휘둘렀다.
“만영신군이구나.”
쉬가악!
순간 강렬한 빛 무리가 도에서 뻗어 나와 커다란 도 형상을 만들어 냈다. 도강이었다.
콰앙!
적경천의 도강이 만영신군 임학의 검은 기운과 격돌했다.
“음!”
거칠 것 없이 무림맹의 무인들을 학살하던 임학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적경천과의 충돌에서 받은 충격이 적잖았기 때문이다.
마교의 사대군장 중 하나인 임학이었다. 마교 내에서도 그를 상대할 만한 고수는 별로 없었다. 그것은 무림맹에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도 이제까지 위기감을 느낄 만한 고수는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적경천과 격돌하는 순간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했는지 확실히 깨달았다. 상대의 강함이 피부로 전해지고 있었다.
임학이 적경천을 보며 말했다.
“무림맹에도 인물이 있었군. 당신은 누구인가?”
“내 이름은 적경천이라네, 후배.”
“적경천? 그렇다면 천도왕?”
“그렇다네.”
적경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에 임학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졌다. 정말 상대가 천도왕 적경천이라면 자신보다 한 세대 전의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강호에서 나이가 많다는 것은 체력이 그만큼 떨어진다는 약점일 수도 있으나, 반대로 생각하면 강하기 때문에 그 나이까지 생존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천도왕 적경천은 아주 오래전에도 강호에서 손에 꼽히는 무인이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은 그가 얼마나 강해졌을지 도무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적경천이 도로 임학을 겨누며 말했다.
“수십 년 전 나는 마교의 총단을 급습해 많은 교도들을 죽였지. 지금도 당시의 기억이 잊혀지지 않는군. 너무 짜릿했거든.”
“감히!”
순간 임학의 화가 폭발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신교를 모욕하는 것만큼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푸화학!
그의 몸을 둘러싼 검은 기운이 폭발적으로 확장됐다. 그에게 만영신군이라는 별호를 얻게 해 준 백영마공(百影魔功)이 발동된 것이다.
적경천의 눈에도 긴장의 빛이 어렸다. 상대를 도발한 것까지는 뜻대로 되었지만, 예상보다 강한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역시 마교인가? 단기간 안에 이 정도의 무인을 키워 내다니.’
콰가각!
그 순간 임학이 들이닥쳤다. 그리고 적경천이 어지럽게 도를 휘둘렀다.
까가가강!
도와 그림자가 격돌했는데 쇳소리가 어지럽게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싸움은 일대를 완전히 초토화시켰다.
“이럴 수가!”
맹주 남천산이 불길에 휩싸인 무림맹을 보며 수염을 푸들푸들 떨었다.
무림맹은 그의 모든 것이었다.
처음엔 단순히 강호 정의를 지키기 위해 맹주직을 허락했다. 주위에서는 그런 그를 두고 명문의 사냥개를 자처했다고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실제로 무림맹의 주축인 명문의 무인들로부터 그런 취급을 받기도 했다.
그래서 이를 더 악물었다. 자신이 남에게 이용당할 사람이 아니란 것을 보여 주기 위해, 그리고 사냥개가 아니라 강호 정의를 지킬 수호자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그렇게 악전고투를 하며 내부에서 힘을 쌓아 갔다. 명문가에 속하지 않은 무인들을 포섭하고, 자신을 뒷받침해 줄 세력을 늘려 갔다. 그렇게 삼 년을 악전고투해서 입지를 다졌다.
천도왕 적경천이 합류하면서 그의 위상은 최고조에 달했고, 이제야 겨우 무림맹을 자신의 뜻대로 운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눈앞에서 물거품이 되고 있었다.
“이익! 이 마교도들이…….”
“맹주!”
그때 누군가 옷깃을 휘날리며 그에게 달려왔다. 남천산이 반색을 했다.
“군사!”
급히 달려온 이는 바로 군사인 남궁창이었다.
평소에는 은근히 대립을 하는 관계였지만, 이렇게 무림맹이 위급한 지경에 이르자 그 얼굴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상황은 어떻소?”
“최악입니다.”
남궁창은 숨을 고를 사이도 없이 그렇게 대답했다. 평소 남천산을 견제하기 바쁜 남궁창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무림맹이 무너지면 견제고 뭐고 할 것도 없이 다 같이 공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최악의 상황은 막아야 했다.
“그럼 어떡해야 하겠소?”
“무림맹을 버려야 합니다.”
“그게 무슨?”
“이미 기세가 꺾였습니다. 남은 전력이라도 보존해야 합니다.”
“하지만 어디로 피한단 말이오? 무림맹의 전력이 의탁할 만한 문파가 어디에 있다고?”
“소림사가 있습니다.”
남궁창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지금 생각해 낸 것이 아니었다. 만일을 대비해 오래전부터 생각해 두었던 계책이었다.
천하에서 무림맹의 병력을 수용할만한 힘과 규모를 가진 문파는 소림사밖에 없었다.
“소림사?”
“삼 년 전 소림사에 갔을 때 혹시 몰라 방장과 이런 상황이 닥쳤을 때를 대비해 협약을 맺어두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소림사까지 간단 말이오?”
“맹 지하에 묻어둔 진천뢰(振天雷)를 터트리는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측 피해도…….”
“지금은 물불을 가릴 때가 아닙니다.”
남궁창이 단호히 남천산의 말을 끊었다. 그에 잠시 남천산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무림맹의 지하엔 최후의 순간을 대비해 진천뢰 십여 개를 묻어두었다. 일반적인 벽력탄보다 위력이 열 배는 더 센 것이 바로 진천뢰였다. 쉽게 구할 수도 없을뿐더러 너무 위험해 모두가 사용하길 꺼려 했다.
“맹주!”
“알겠소. 그래도 일단 퇴각 신호를 보내고 난 후 터트려야 하오.”
“물론입니다.”
남궁창이 힘껏 대답한 후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부하가 깃발을 흔들었고, 잠시 후 여러 발의 폭죽이 무림맹 상공에서 터졌다.
퍼버버벙!
폭죽을 본 무림맹의 무인들이 소리쳤다.
“퇴각하라.”
“모두 무림맹을 빠져나가라.”
그들은 더 이상 마교에 대항하는 것을 멈추고 일제히 퇴각했다.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무림맹의 무인들을 본 마교 측 고수들이 잠시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그들 중에도 눈치가 빠른 이는 존재했다. 그들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감지하고 소리쳤다.
“모두 무림맹을 빠져나가라.”
“서둘러라!”
마교의 무인들도 부리나케 무림맹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 직후 엄청난 폭발이 일어났다.
콰콰쾅!
검은 연기와 함께 시뻘건 화염이 하늘 높이 치솟았고, 사방으로 파편이 튀었다.
미처 무림맹을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이 폭발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고, 수많은 이들이 다쳤다.
무림맹에서 시작된 불길은 곧 인근의 건물로 번져 갔다.
“불이야!”
“어서 피해!”
불길은 순식간에 악양을 집어삼켰다.
동트기 전 깊은 어둠에 잠겨 있던 악양 하늘이 충천하는 화광으로 붉게 물들어 갔다.
“역시 그냥 도주하지는 않는군.”
상한천이 서늘한 시선으로 화광이 충천하는 무림맹과 악양을 바라봤다.
그의 곁으로 만영신군 임학과 묵천강, 임오연, 원설화 등의 고수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자잘한 상처를 입었지만, 제법 멀쩡한 축에 속했다.
그들의 얼굴엔 아쉬운 빛이 가득했다. 설마 진천뢰를 터트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만영신군 임학의 표정이 유난히도 어두웠다. 진천뢰 때문에 천도왕 적경천과 승부를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청난 불길과 인파가 그들의 앞을 막고 있었다. 그사이 무림맹의 무인들이 퇴각을 하고 있었다.
“남궁창 제법이군. 악양 백성들을 방패막이로 삼다니. 제법이야. 정파를 자처하는 이가 이런 잔혹한 수를 쓰다니.”
상한천의 얼굴에 아쉬운 빛이 떠올랐다. 거의 일 년여를 준비한 기습 공격이었다. 신화상단이 마교의 외원이라는 사실까지 공개하면서까지 공격을 단행했는데, 겨우 절반의 성과에 그쳤으니 속이 쓰렸다. 하지만 상한천은 이내 고개를 저어 미련을 떨쳐 냈다.
“모두 전력을 수습하라. 이 기세를 살려 무당파와 남궁세가 공격한다.”
“존명!”
힘찬 대답과 함께 마교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악양의 무림맹에서 시작한 전화의 불길은 곧 안휘성의 남궁세가, 호북성의 무당파로 번져 갔다.
삼 년 동안 꺼진 듯했던 불씨는 폭발적인 기세로 천하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진정한 천하대란의 시작이었다.
***
“와아아!”
갑작스러운 함성에 담호가 눈을 떴다.
은빛 편린이 부서지는 수면 위에 떠 있는 조그만 배 서너 척이 보였다. 그물을 끌어당기는 어부들, 그리고 그들의 자식으로 보이는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웃음소리가 그의 고막으로 파고들었다.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가 몸을 싣고 있는 조그만 배가 흔들렸다.
푸르르!
배 한가운데 서 있던 흑귀가 반갑다고 투레질을 했다.
“흑귀!”
담호가 몸을 일으켜 흑귀의 등을 두들겼다. 그러자 흑귀가 커다란 머리를 담호의 얼굴에 비벼 왔다.
담호도 흑귀에 기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당문과의 혈투에 그의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수많은 독에 중독되고, 보통 사람이라면 몇 번을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내상과 외상을 입었다.
흑귀에 몸을 실은 상태로 어느 이름 모를 강가에 도착해 조그만 배에 몸을 실은 채 정신을 잃다시피 했다.
담호가 정신을 잃은 사이 암혼심공이 움직여 상처를 치유한 모양이었다. 자잘한 상처는 어느새 나았고, 내상도 어느 정도 치유되어 있었다. 아직 몸에 상당한 독기가 남아 있었지만, 약간의 시간만 주어진다면 몰아낼 수 있을 듯싶었다.
담호가 흑귀의 목에 손을 올린 채 주위를 둘러봤다. 정신을 잃은 사이 배가 강을 따라 제멋대로 흘러온 모양이었다. 처음 보는 낯선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때 그물질을 하던 어선 한 척이 다가왔다. 어선 위에는 중년의 어부와 겨우 십여 세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 타고 있었다. 소년의 눈이 호기심으로 빛나고 있었다.
근처로 다가온 어부가 말을 걸었다.
“괜찮으시오?”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어부의 아들로 보이는 소년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아저씨, 어디에서 오신 거예요? 진짜 강 상류에서 왔어요?”
“그렇다.”
“와아! 그럼 사천성 쪽에서 오신 거네요. 거긴 강이 무척이나 험해서 이곳까지 오는 것이 쉽지 않은데.”
“여긴 어디지?”
“이곳은 적수(赤水)예요.”
“적수?”
“예! 사천성과 귀주성 접경에 있는 조그만 현이에요.”
소년의 대답에 담호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귀주성이라면 중원에서도 남쪽에 치우친 곳에 있었다. 귀주성의 서북부는 사천성과 맞닿아 있었고, 동쪽은 호남성과 맞닿아 있었다. 정신을 잃은 사이 배가 엄청나게 먼 거리를 떠내려 온 것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뒤집어지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담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귀주성을 동서로 횡단하면 무림맹이 있는 호남성 악양까지 갈수 있었고, 북으로 종단을 하면 화산파가 있는 섬서성으로 갈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느 쪽으로 가든 지금은 몸을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정신을 잃은 사이 상처는 많이 치료되었지만, 체력은 고갈된 상태였다.
그때 소년이 말했다.
“아저씨, 우리 집에 가실래요?”
담호를 바라보는 소년의 눈이 유달리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