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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34화 (33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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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4화 3장. 공포를 지배하는 공포(3)

창틈으로 서통가를 내다보는 준의현 사람들의 얼굴엔 공포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광경은 차마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끔찍했다. 아마 준의현이라는 지명이 생긴 이래 이렇게 끔찍한 참사가 일어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을 것이다.

열린 문틈 사이로 짙은 혈향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다.

“우욱!”

“이, 인간이 어떻게?”

코를 파고드는 역한 비린내에 사람들은 구역질을 했고, 또 눈물을 흘렸다.

거리엔 온통 검은 시신과 부상자 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들은 불과 하루 전에 백화방을 멸문시키고 준의현을 장악했던 흑무방의 무인들이었다.

“으으!”

“사, 살려 줘!”

아직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은 피투성이가 된 채 담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눈엔 공포의 빛이 가득했다.

방주 조관이 죽는 순간 그들이 선택한 것은 바로 도주였다.

대항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대적하는 순간 죽는다.

머릿속엔 오직 그 생각 하나뿐이었다. 그 외 다른 생각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오직 도주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도주했다.

하지만 담호는…… 세상이 권마라고 부르는 괴물은 그런 그들이 도주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그는 도주하는 흑무방 무인들을 뒤쫓아 하나하나 격살했다.

한쪽 다리를 절면서도 어찌나 빠른지 몰랐다. 그들은 전력을 다해 도주했지만, 담호는 가볍게 쫓아와 그 무서운 주먹을 휘둘렀다.

그가 주먹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반드시 한 명이 쓰러졌다. 저항은 감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어떤 자는 죽고, 어떤 자는 중상에 그쳤다.

그 기준이 무엇인지는 흑무방 무인들을 알지 못했다. 아니,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은 목숨을 구한 것에 감지덕지할 뿐이었다.

“크흑!”

“흐으윽!”

살아남은 자들 사이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자존심을 목숨보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무림인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는 자들 중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저 그들은 숨이 붙어 있는 것에 감사할 뿐이었다.

담호에 대한 증오는 생기지도 않았다.

압도적인 공포는 그들의 자존감과 오기, 그리고 마음마저 완전히 꺾어 놓았다.

검이 부러진 무인은 재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한번 마음이 꺾인 무인이 다시 재기를 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무인으로서 사형 선고를 받은 것이나 마찬가지. 지금 살아남은 흑무방 무인들에게 담호가 내린 형벌이었다.

겨우 목숨을 구한 자들 한가운데 담호가 있었다.

새로 산 검은 무복과 피풍의는 사람들의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로 온통 붉게 물든 그의 모습은 꿈에 볼까 두려웠다.

그 순간 담호의 입이 열렸다.

“너희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관심 없어.”

“으으!”

“무인들끼리 치고받고 싸우는 것도 상관없어. 마교와 손을 잡아도 좋고, 대적해도 좋아. 어차피 너희들에게 큰 기대는 없으니까.”

담호가 잠시 말을 끊었다.

모두가 숨을 죽인 채 담호의 얼굴을 바라봤다.

쓰러져 있는 흑무방의 무인들도, 창문 틈으로 바라보는 사람들도 눈을 부릅뜬 채 담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렇게 모두의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순간 담호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선(線)은 지켜. 무림이란 세계에서 살아가란 말이야. 그 이상 선을 넘는 것은 내가 용납하지 않을 테니까.”

“으으!”

미친 광인의 헛소리라고 치부해도 좋을 만큼 광오한 말이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그 누구도 담호의 말을 비웃을 수 없었다.

그들 앞에서 광오한 외침을 토해 내는 자는 충분히 그럴 만한 무력과 자격을 갖추고 있었으니까.

가슴을 짓누르는 무게감과 존재감이 달랐다. 그래서 감히 숨조차 크게 쉴 수 없었다.

할 말을 다한 담호가 몸을 돌려 걸어갔다.

“흐아!”

“크흐윽!”

그제야 곳곳에서 억눌러 두었던 눈물과 탄식이 터져 나왔다. 겨우 목숨을 구한 자들이 몸을 떨며 울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준의현 사람들이 모두 봤다.

“여기…….”

객잔 앞으로 다가오자 흑귀의 고삐를 잡고 기다리던 점소이가 건량이 담긴 보자기를 내밀었다. 피에 절은 담호의 모습이 무서울 만도 하건만 점소이의 얼굴에는 그런 빛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선망의 눈빛으로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인들에게 담호는 살아 있는 재앙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인 점소이에게 담호는 영웅이었다.

무인이 패악질을 부리는 것이 당연시되는 세상이었다. 힘이 없는 백성들은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참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운명이라 생각하면서 말이다.

그 어떤 무인들도 그들의 일에 나서지 않았었다. 말로는 정의를 외치고, 협의를 지켜야 한다면서도 말이다.

실제로 아침에 여인이 흑무방의 무인들에게 겁간을 당할 때 객잔 안에는 무공을 익힌 무인들이 몇 명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비겁하게도 나서지 않았다.

좋은 게 좋은 거고, 굳이 같은 강호인과 척을 지고 싶지 않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렇게 아무도 나서지 않을 때 유일하게 나선 이가 바로 담호였다.

그는 무자비했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권마라는 별호가 왜 붙었는지 알 수 있는 잔혹한 손속이었다.

수많은 이들이 그의 손에 무참히 죽었다. 그런데도 담호가 두렵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그가 말한 선(線) 때문이었다.

담호는 철저하게 선을 지켰다.

그가 살의를 드러내는 대상은 오직 무인들뿐, 그 외의 사람들에겐 그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점소이는 담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다.

‘나도 아저씨 같은 무인이 될 거야.’

점소이는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담호가 점소이에게서 고삐와 건량을 넘겨받았다.

“고맙다.”

“아니에요.”

점소이가 힘껏 도리질을 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담호는 흑귀의 등에 건량을 실은 후 올라탔다. 점소이가 멀어지는 담호의 등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권마(拳魔).

공포로 공포를 지배하는 자에 대한 소문은 서통가에서 시작해 준의현, 그리고 귀주성 전체로 퍼져 나갔다.

***

광룡채(狂龍寨)는 녹림십팔채 중 하나로 복건성 남부 구화산(九華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녹림채들이 중원 한가운데 포진하고 있는데 반해 광룡채는 외딴 곳에 동떨어져 있었다. 그 때문에 다른 녹림십팔채와의 교류가 극히 적고 독자적인 노선을 걸었다.

광룡채의 채주는 고천율, 별호는 바로 광룡(狂龍)이었다. 광룡채라는 이름도 바로 그의 별호에서 따온 것이다.

고천율의 나이는 올해 마흔둘, 남자로서도 무인으로서도 한창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키만 육 척이 넘었고, 이목구비는 호랑이를 연상시킬 만큼 사나웠다. 눈빛은 부리부리해서 감히 마주 볼 사람이 드물었다. 거기에 어렸을 때 기인을 만나 익힌 혈륜도법(血輪刀法)은 극에 이르러 패도적인 기운이 물씬 풍겨 나오고 있었다.

녹림십팔채에서는 그런 고천율을 두고 차기 총채주가 될 거라는 이야기가 심심치 않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현 총채주인 황경문이 아직 건재하긴 하지만, 그는 이미 노령이었다. 총채주로서의 위엄은 여전하지만, 언제 쇠락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다.

때문에 후계자를 두고 여러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고천율은 비록 겉으로 표를 내지는 않았지만, 후계자를 노리는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실제로 그는 자신이 총채주가 될 가능성이 무척이나 높다고 생각했다.

삼 년 전 반란 사건으로 인해 그의 경쟁자가 될 만한 이들이 대거 죽어 나갔기 때문이다.

“흐흐! 비록 묵일광의 무공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아직은 애송이에 불과해. 경륜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내가 한 수 위지.”

“맞습니다. 당연히 채주님께서 녹림 전체를 이끄셔야죠.”

부채주 여상문이 그의 비위를 살살 맞췄다. 그러자 고천율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크하하! 역시 부채주는 무얼 아는군.”

“제가 모르면 누가 알겠습니까? 채주님께서 총채주님이 되실 때까지 열심히 옆에서 보좌하겠습니다.”

“그래! 내가 총채주가 되면 부채주가 광룡채의 채주가 되는 거야. 그러니까 열심히 해.”

“분골쇄신하겠습니다요.”

“흐흐흐!”

고천율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곁에는 아름다운 여인 두 명이 앉아 있었다. 구화산을 지나는 상단을 털고 납치해 온 여인들이었다.

광룡채에는 그런 여인들이 십여 명이나 더 있었다. 그녀들은 모두 고천율의 노리개가 되어 있었다.

총채주인 황경문이 알았다면 분명 격노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 광룡채와 총채주인 황경문이 있는 패왕채(覇王寨)는 천 리 이상 떨어져 있었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을 황경문이 알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 늙은이가 살아 봐야 얼마나 살겠어. 흐흐!”

“그렇습니다. 사실 물러나도 벌써 물러났어야지요.”

“마음껏 약탈하고, 즐기고, 마셔야 녹림이라 할 수 있지. 엄격한 법도를 지킬 거라면 뭐 하러 녹림도가 되느냔 말이야?”

“그럼요.”

여상문이 맞장구를 치며 고천율의 비위를 맞출 때였다.

콰아아!

갑자기 일진광풍이 불어오고 구화산을 덮고 있는 하늘이 어두워졌다.

“뭐야?”

고천율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청명하던 하늘은 어느새 새까만 구름에 덮여 있었고, 밤처럼 어두워져 있었다. 그리고 산 아래서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까지.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뭐야?”

“꺄아악!”

고천율이 양옆에 끼고 있던 계집들을 밀어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전신에 소름이 올라와 있었고,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유 모를 위기감에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것이다.

술이 확 깼다.

그는 무공을 익힌 고수였다. 그것도 녹림십팔채의 총채주를 노릴 만큼 강력한 고수였다. 비록 절대지경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그래도 그의 무위는 명문정파의 장로들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력했다. 그만한 고수가 이유 없이 위기감을 느낄 리 만무했다.

“왜 그러십니까? 채주님.”

“아이들 모두 집합시켜.”

“예?”

“씨발! 당장 집합시키라고. 내말 안 들려?”

“아, 알겠습니다.”

고천율이 험악해지자 돌아가는 분위기를 눈치챈 여상문이 허둥지둥 수하들이 머무는 거처로 뛰어갔다.

“제기랄! 뭐야?”

고천율이 벽에 걸린 커다란 도를 집어 들었다.

도면이 어지간한 여인의 허리만큼 넓은 기형 거치도였다. 그는 거치도를 손에 든 채 산 아래를 노려보았다.

잠시 후 그의 곁으로 완전무장한 녹림도들이 모여들었다.

“왜 그러십니까? 채주님.”

“무얼 그렇게 노려보시는 겁니까?”

아직 분위기를 파악하지 못한 녹림도들이 웅성거렸다. 순간 고천율이 사자후를 터트렸다.

“어서 무기를 꺼내 들지 못해, 새끼들아!”

웅웅!

그의 사자후가 구화산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그러자 분위기를 파악한 녹림도들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은 저렇게 긴장하는 고천율의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때였다.

후우웅!

갑자기 일대의 공기가 미친 듯이 날뛰기 시작했다.

고천율과 녹림도들의 옷자락 역시 쉴 새 없이 펄럭였다.

그 순간 고천율이 외쳤다.

“온다.”

모두의 시선이 고천율이 바라보는 곳에 모아졌다. 순간 녹림도의 눈이 크게 치떠졌다.

“아!”

“무슨?”

산 아래서부터 거대한 어둠이 밀려오고 있었다.

마치 먹이를 탐하는 아귀처럼 어둠은 빛을 잠식하며 덩치를 불리고 있었다. 그 중심에 한 남자가 있었다.

세상의 어둠이 모두 집약된 듯 새까맣게 보이는 남자가. 그가 어둠을 몰고 오고 있었다.

맹세코 그들은 단 한 번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뇌리를 엄습하는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공포에 입이 절로 벌어지고 침이 흘러내렸다.

고천율이 이를 악물며 외쳤다.

“당신은 누구요?”

순간 어둠이 크게 일렁이며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만마(萬魔)의 종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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