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5
335화 4장. 피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1)
“만마의 종주?”
고천율이 눈을 부릅떴다.
세상에 수많은 무인들이 존재했지만, 누구도 그런 말을 쓰지 않았다. 심지어는 마도의 무인들조차도 말이다. 하지만 단 한 명만은 예외였다.
“설마 마교의 교……주?”
고천율의 음성이 절로 떨려 나왔다. 그의 떨림은 이내 역병처럼 광룡채 전체로 순식간에 퍼져 나갔다.
“마교의 교주라고?”
“말도 안 돼!”
사람들의 얼굴에 어린 공포가 증폭됐다.
무인들에게 마교는 영원한 공포의 대상이었다. 마교가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세상은 극도의 혼란과 공포에 휩싸였다. 마교라는 단어만 나와도 몸서리를 치는 것이 강호의 현실이었다. 하물며 마교의 교주라니?
마교의 교주가 강호에 모습을 드러낸 적은 수십 년 동안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교의 교주를 잊어버리고 있었다. 아니, 애써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다.
마교의 교주가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자체가 세상엔 재앙이었으니까.
고천율이 다시 한 번 용기를 내어 물었다.
“정말 마교의 교주시오?”
“그렇다. 내가 신교의 교주 척관혈이다.”
“…….”
순간 고천율이 말문을 잃었다.
추측이 현실로 드러나자 정신이 다 아득해져 왔다. 하필 자신이 채주로 있는 광룡채에 마교의 교주가 나타나다니. 마치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고천율이 주먹을 꽉 쥐며 말했다.
“마교의 지존께서 하잘것없는 녹림의 산채에는 무슨 일로 오신 것이오?”
그의 손바닥엔 어느새 땀이 촉촉하게 배여 있었다. 평생 이토록 긴장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척관혈이 대답했다.
“너희들은 증거가 될 것이다.”
“증거라니? 무슨?”
“이 척관혈이 세상에 나왔다는 첫 번째 증거. 너희들을 세상에서 지워 내가 나왔음을 중원 천하에 알릴 것이다.”
우웅!
그의 살의 어린 목소리에 구화산이 울었다.
“커억!”
“켁!”
가장 먼저 내공이 약한 녹림도 수십 명은 척관혈의 목소리에 담긴 살의를 감당하지 못하고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크윽!”
고천율이 눈을 부릅떴다. 그의 두 눈은 실핏줄이 터져 온통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척관혈의 외침 한 번에 심맥이 진탕되고 기혈이 미친 듯이 들끓었다. 그나마 그의 내공이 심후하기에 버티는 것이지, 많은 녹림도들이 내상에 피를 토하고 있었다.
고천율의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서, 설마…… 심살지경(心殺之境)인가?”
뜻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고 전해지는 전설적인 경지. 전설에서나 구전되는 그런 경지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영광스러운 새 시대로 향하는 디딤돌이 됨을 자랑스러워하라. 너희들의 주검으로 만든 탑에 올라 내가 새 시대를 열 지어니.”
“크억!”
“제발!”
간신히 버티던 녹림도들이 픽픽 쓰러졌다. 순식간에 이백여 명에 달하는 녹림도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이럴 수가!”
고천율의 얼굴에 핏줄이 툭툭 불거져 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공포가 그의 머릿속을 잠식해 왔다. 무릎을 꿇고 싶었다. 그냥 이대로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광룡채의 채주였다.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이대로 모든 것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우습게보지 마라. 나는 고천율, 녹림의 지존이 될 몸이시다.”
츄화학!
그의 도에서 도강이 뿜어져 나왔다.
녹림의 총채주를 노릴 만큼 무공이 극고의 경지에 다다른 고천율이었다. 이제까지는 세간의 시선 때문에 성취를 숨겼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한 지금은 이것저것 가릴 때가 아니었다.
그는 전력을 다해 도강을 만들어 냈다.
길이만 이 장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도강이었다. 당연히 위력 또한 대단했다. 천하의 그 어떤 고수에 비해 밀리지 않을 정도로.
쉬아앙!
도강이 공간을 갈랐다.
목표는 어둠에 휩싸인 척관혈의 목이었다.
제아무리 극고한 경지에 이른 고수라도 머리가 잘리면 살 수 없었다. 설령 그 대상이 마교의 교주일 지라도 말이다.
“죽어랏!”
고천율은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했다. 마지막 내공 한 방울까지 모조리 뽑아내 도에 담았다.
혈륜도법의 최절초 혈륜마환살(血輪魔煥殺)이었다.
거대한 도강이 다가오는데도 척관혈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마치 저항하는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그 모습에서 고천율은 한 줄기 희망을 보았다. 어쩌면 마교의 교주를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는. 또 어쩌면 자신이 마교의 교주를 죽인 영광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투캉!
그 순간 척관혈의 몸 주위에 어려 있던 어둠 한 조각이 튀어나왔다. 어둠은 고천율의 도강 어린 거치도를 두 동강 낸 것도 모자라 그의 목을 자르고 지나갔다.
툭! 데구르!
몸통에서 분리된 머리가 힘없이 바닥을 굴렀다. 고천율의 눈이 끔뻑거렸다. 그때까지도 죽음을 인지하지 못한 것이다.
‘무슨?’
세상이 흐려져 가더니 곧 암전이 찾아왔다.
완벽한 어둠.
그것이 녹림의 차기 지배자를 꿈꾸던 고천율의 최후였다.
“으으!”
“채주님!”
믿을 수 없는 광경에 부채주 여상문과 녹림도들이 벌벌 떨었다.
누가 있어 녹림의 최고수 중 한 명인 고천율이 설마 척관혈의 몸에 상처 하나 입히지 못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줄 상상이나 했을까?
눈앞에서 벌어진 광경은 공포 그 자체였다.
순간 척관혈의 몸 주위에 어린 어둠이 크게 요동쳤다.
그의 몸에 어린 어둠은 곧 마기(魔氣)의 집합체였다. 마기가 너무나 강대해 미처 내부에 수용되지 못하고 외부로 흘러나오는 것이다.
천포마공(天包魔功).
하늘마저 감쌀 수 있다는 전설의 마공이 그의 몸을 빌려 세상에 처음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척관혈의 시선이 아직 살아 있는 녹림도들을 향했다.
“나의 증거가 됨을 감사해라. 그것만으로도 너희들이 세상을 살다 가는 충분한 값어치를 하는 것일 지니.”
촤하학!
그 순간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어둠이 사방으로 뻗쳐 나갔다.
하늘마저 감쌀 수 있다는 천포마공이 발동한 것이다. 마기로 이뤄진 어둠은 순식간에 방원 이십여 장 안에 존재하는 녹림도를 집어삼켰다.
뿌드득!
“으아악!”
“살려 줘!”
어둠에 집어삼켜진 녹림도들의 몸이 가공할 압력에 이리 뒤틀리고 저리 어긋났다. 부러진 뼈가 살갗을 뚫고 튀어나오고 엄청난 압력에 장기가 터져 나갔다.
어둠이 절규로 가득 찼다. 하지만 그들의 절규는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았다.
뿌득! 뿌드득!
대신 소름 끼치는 소음이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그리고 잠시 후 어둠이 걷히기 시작했다. 어둠은 빠르게 척관혈의 모공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어둠이 걷히면서 처참한 전경이 드러났다. 광룡채의 녹림도 사백이십 명 전원이 처참한 몰골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다. 숨을 쉬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순식간에 구화산이 죽음의 대지로 돌변했다.
“크흐!”
척관혈의 입술을 비집고 기괴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침내 대부분의 어둠이 척관혈의 몸속으로 사라지고 옅은 마기만이 남아 주위를 맴돌았다.
그제야 척관혈의 얼굴이 드러났다.
각진 얼굴에 송충이처럼 짙은 눈썹, 퉁방울처럼 붉어진 커다란 눈과 뭉툭한 코, 그리고 두툼한 입술에서 엄청난 위압감이 풍겨 나왔다. 바로 마교의 지존인 척관혈의 본모습이었다.
척관혈의 눈동자 안에서는 광포한 마기와 광기가 한데 어우러져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세상을 집어삼킬 듯한 광기는 바로 광증(狂症)의 발현이었다.
예전에 그의 운공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풍월제 단공월의 기습을 받았다. 다행히 단공월을 물리쳤지만, 이로 인해 척관혈은 심맥에 큰 타격을 받았다.
운공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입은 타격은 광증을 유발했다. 일단 한번 광기가 폭발하면 수많은 이들의 피를 봐야 가라앉았다. 내상이 완치된 이후에도 광증은 때때로 폭발을 했다.
사실 평소에도 신경만 쓴다면 광증을 어느 정도 억누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척관혈은 그러지 않았다. 오히려 즐겼다. 광기의 폭발 이후 찾아오는 여운은 그 어떤 쾌락과도 비교할 수 없이 황홀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광룡채의 녹림도가 몰살당한 이유였다.
코끼리는 묵묵히 제 길을 갈 뿐이다. 바닥에 있는 개미들이 짓밟혀 죽는 것까지 코끼리가 책임질 이유는 없다.
척관혈은 코끼리였고, 녹림도들은 그가 가는 경로에 있던 불운한 개미일 뿐이다. 그리고 척관혈의 행보는 이제 겨우 시작이었다.
***
두 가지 소문이 천하를 강타했다.
하나는 서쪽에서, 또 하나는 동쪽에서 시작됐다.
첫 번째 소문은 바로 귀주성의 패권을 노리던 흑무방의 괴멸이었다. 백화방까지 병탄하며 명실상부한 귀주성의 패자가 된 흑무방이 하루 아침에 괴멸됐다.
흑무방을 무너트린 자는 바로 화산권마 담호였다.
선을 지키라는 그의 경고는 사람들의 입을 통해 금세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어떤 이들은 담호의 경고를 무섭게 받아들였고, 또 어떤 이들은 불편하게 받아들였다.
전자는 주로 군소 방파의 무인들이었고, 후자는 명문의 무인들이었다. 오랜 세월 중원의 기득권층으로 군림해 온 명문의 무인들은 담호가 자신들을 노리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려 할 때 또 한 가지 날벼락 같은 소문이 천하를 강탈했다.
바로 광룡채의 괴멸이었다.
사백 명이 넘는 광룡채의 녹림도들이 하루아침에 처참한 모습으로 전멸한 사건은 일대의 무인들에게 큰 충격을 안겨 주기 충분했다.
광룡채에서 시작한 혈겁은 북쪽으로 이어졌다.
복건성에 북쪽에 터전을 잡고 있던 현음문(玄陰門), 강서성 서쪽을 근거지로 하고 있는 무가인 자계목가(資溪木家)가 씨 몰살을 당했다.
그 과정에서 흉수가 단 한 명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리고 누군가의 입에서 그가 마교의 교주라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이제까지 철저하게 어둠에 가려져 있던 마교의 교주가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중원은 전율했다.
이제까지 막연히 두려워만 하던 괴물의 실체는 그들의 상상보다 더 무섭고 두려웠다.
그의 목적지가 악양이라는 사실은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었다.
이전엔 무림맹이 있었던 곳, 하지만 지금은 마교가 본단을 건설하는 바로 그곳이었다.
세상은 몰랐지만 척관혈이 세상에 모습을 보인 그 순간 이제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마교의 본진이 은밀히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아직까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마교의 교주가 홀로 움직인다는 소문에 강서성에 적을 두고 있는 다섯 개 문파가 모였다.
숭의문(崇義門), 우도방(宇刀房), 천기당(千技堂), 봉신금가(奉新金家), 금창문(金槍門).
그들은 모두 무림맹에 소속된 문파들로 의기가 드높기로 유명했다. 무림맹이 본단을 잃고 소림사로 퇴각한 것을 안타까워한 그들은 마교의 교주가 홀로 움직인다는 첩보를 입수하자마자 한자리에 모였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마교의 교주를 제거할 절호의 기회였다.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또 언제 이와 같은 기회가 올 줄 몰랐기에 그들은 정예들을 탈탈 긁어모았다. 그 수가 무려 칠백 명이 넘었다.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라 정예들만 모았기에 그들은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다섯 문파의 정예들은 마교의 교주가 지나가는 길목에 은신해 있다가 일제히 기습했다. 그들은 승산이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큰 오산이었는지 목숨을 대가로 알게 되었다.
다섯 문파의 주인은 사지가 뜯겨져 나간 채 짐승의 먹이가 되었고, 그들이 이끌었던 무인들은 마치 절굿공이에 빻은 것처럼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짓이겨져 숨이 끊어졌다.
척관혈을 기습했던 무인 중 오직 한 명만이 살아남았다. 그것도 스스로의 능력으로 살아남은 것이 아니라 척관혈의 자비로 살아남았다.
생존자의 입을 통해 척관혈의 공포는 역병처럼 중원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소림사와 무림맹은 대책 수립에 들어갔고, 척관혈의 이동 경로에 있는 문파들은 아예 봉문을 택했다.
바야흐로 무림의 대 암흑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중원의 주인을 가리기 위한 최후의 전쟁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느끼고 있었다.
혼돈과 공포의 바람이 중원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사람들은 희망을 잃고 공포에 떨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담호가 언급되었다.
“그래도 우리에겐 권마가 있다.”
“그라면…….”
“권마를 중심으로 뭉쳐야 한다.”
사람들의 외침은 바람을 타고 천하로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