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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6화 4장. 피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2)
안휘성에서 가장 유명한 무가를 꼽으라면 누구나 남궁세가를 첫손가락에 꼽을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남궁세가는 안휘성의 맹주이자, 정신적인 지주였다.
수백 년 동안 안휘성에서 뿌리를 내려 온 남궁세가의 저력은 실로 대단해서 삼 년 전 담호에게 큰 횡액을 당하고 난 이후에도 탄탄한 전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남궁세가는 여전히 안휘성의 맹주였고, 수많은 문파들에 그 영향력을 끼쳤다. 하지만 안휘성은 넓었고, 남궁세가의 영향력이 끼치지 않는 문파들도 다수 존재했다.
그중 하나가 황산의 패왕채였다.
녹림십팔채의 총채주인 황경문이 있는 패왕채는 남궁세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다.
같은 안휘성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남궁세가에는 눈엣가시나 마찬가지인 패왕채였다. 때문에 남궁세가에서는 기회만 되면 패왕채를 토벌하려고 했지만, 황경문의 거대한 존재감과 엄청난 영향력 때문에 번번이 기회를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황경문이라는 거인이 가지는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삼 년 전 몇몇 채주들이 반역을 도모했던 일대 사건을 거치면서 그는 더욱 완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으음!”
어지간해서는 감정의 동요를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인 황경문의 안색이 경직되어 있었다. 그것은 그의 거처에 모인 패왕채의 수뇌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광룡채가 몰살을 당하다니. 도대체…….”
“고천율, 그 야심가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수뇌부들의 얼굴엔 믿을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광룡채의 몰살 소식을 들은 패왕채는 그야말로 혼돈과 공포에 빠져 있었다.
고천율의 야심을 모르는 자는 없었다. 그는 그만큼 강력한 고수였고, 야심을 가질 만한 충분한 자격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별반 대항하지 못하고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은 황경문과 녹림도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 줬다.
황경문이 입을 열었다.
“정말 마교주 단 한 명에게 광룡채가 몰살을 당한 것이 확실한가?”
“믿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으음!”
수하의 대답에 황경문의 안색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광룡채의 전력은 실로 탄탄해서 황경문이라도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었다. 마교의 교주는 그런 광룡채를 홀로 괴멸시켰다. 간접적으로나마 두 사람의 무위를 비교할 수 있었다.
황경문은 눈을 지그시 감으며 중얼거렸다.
“미친 광풍이 중원 남부를 휩쓸고 있구나.”
마교주의 행로에 걸쳐 있는 모든 문파들이 멸문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광풍이 아니라 거의 태풍 수준의 파괴력이었다.
척관혈의 최종 목적지가 악양이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지도에 선을 그리면 딱 악양을 향해 일직선으로 움직이고 있었으니까. 그야말로 무식하다 싶을 수밖에 없는 미친 행보였다.
강호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만큼 그는 자신의 행보를 감추지 않았다. 문제는 그런 척관혈의 행보를 막을 수 있는 문파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금이라도 대책을 세워야 합니다.”
“마교주가 악양에 자리를 잡게 되면 인근의 호북성, 강서성뿐만 아니라 이곳 안휘성까지 위험하게 될 겁니다.”
수뇌부들이 성토하듯 말을 쏟아 냈다. 그만큼 그들이 느끼는 위기감이 크다는 반증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녹림은 문을 걸어 잠근 채 힘을 키워 왔다. 하지만 그렇게 쌓은 전력으로도 마교를 어찌할 수 없다는 위기감이 그들의 마음을 촛불처럼 흔들리게 했다.
마교주 단 한 명의 행보가 산전수전 다 겪은 녹림도들을 극도의 혼란으로 몰아넣은 것이다.
황경문은 그런 녹림도들의 마음을 이해했다. 실제로 그 자신 역시 지금 엄청난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으니까.
황경문은 무공이 이미 절대지경에 이른 고수였다. 남들보다 월등히 높은 경지에 있다 보니 기감이나 통찰력 또한 엄청나게 발달해 있었다. 그런 그가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은 그저 단순히 기분 탓으로 치부할 일이 아니었다.
절대고수의 통찰력이란 예지 능력과도 비슷한 것. 분명 무언가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매우 좋지 않은 쪽으로.
마침내 황경문이 입을 열었다.
“어차피 동정호와 악양은 마교의 손에 넘어갔다. 이제 마교주까지 합류한다면 철옹성으로 변할 터. 그 후 놈들의 행보가 어찌 될지는 불 보듯 뻔하다. 악양을 중심으로 조금씩 영역을 확장하겠지. 가장 가까이 인접한 곳이 호북성인데, 그곳엔 무당파와 제갈세가가 있으니 신중을 기하겠지. 그다음 가까운 곳이 강서성이다. 강서성엔 큰 문파가 없으니 집어삼키는 것은 시간문제. 그다음은…….”
황경문이 말을 잠시 멈췄다. 하지만 사람들은 뒤에 이어질 말을 이미 알고 있었다.
“안휘성.”
“이곳이겠군요.”
“그렇다. 머지않아 이곳 안휘성이 전란에 휩싸일 것이다.”
황경문의 단언에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수뇌부 중 한 명이 조심스럽게 반론을 제기했다.
“하지만 안휘성엔 남궁세가가 있는데 그렇게 쉽게 쳐들어오겠습니까?”
“가주인 남궁천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도 머뭇거렸겠지. 하지만 남궁천은 권마와의 결전 이후 내상이 도져 세상을 떠났다. 소가주가 뛰어난 기재라고 하지만 남궁천에 비하면 많은 손색이 있는 것이 사실. 내가 마교주라면 절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것이다.”
“으음!”
“무려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다. 그런 남궁세가를 무너트린다면 강호인의 심리에 끼치는 파장은 엄청날 터.”
남궁세가가 무너짐으로써 마교가 얻는 이득은 실로 엄청나다. 더 이상 명문정파가 강호인들을 지켜 줄 수 없다는 심리적인 공격이 될 테고, 마도를 추구하는 문파들의 힘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이다.
황경문의 이어진 설명에 수뇌부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패왕채는 남궁세가와 같은 안휘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무너지면 다음이 패왕채라는 것은 세 살 먹은 어린아이도 알 수 있는 간단한 사실이었다.
“지금부터 패왕채는 전시체제로 돌입한다. 싸울 수 있는 녹림도만 남기고, 여자와 아이, 노인 들은 다른 산채로 이주시킨다.”
“알겠습니다.”
“최대한 빨리 진행하겠습니다.”
수뇌부들이 단호히 대답했다.
비록 예상치 못한 마교주의 행보에 공포로 잠식되었지만, 그들 역시 강호에서 십 년 이상을 굴러먹었다. 그래서 빨리 이성을 회복할 수 있었다.
전쟁에 휩쓸리기 싫다면 아예 패왕채 전부가 이주할 수도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그럴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녹림십팔채가 건재할 수 있는 것은 패왕채가 든든히 중심을 잡아 주기 때문이다. 그런 패왕채가 마교에 겁을 집어먹고 다른 곳으로 이주한다면 그때부터 녹림은 급속히 결집력을 잃고 모래알처럼 흩어질 것이다.
패왕채는 언제까지고 황산에 있어야 했다.
수뇌부들이 급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황경문의 명령대로 노약자들을 따로 모아 절강성에 있는 장흥채(長興寨)로 보내려 했다.
장흥채는 절강성에 장흥에 있는 조그만 산채였다. 비록 녹림십팔채에는 들지 못하지만, 전력이 탄탄하고 요새와 같은 산채를 구축하고 있어 노약자들을 보호하기에 최고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산채 전체가 분주히 돌아가고 있을 때 황경문은 황혜령과 묵일광을 불렀다.
“아빠.”
황혜령의 표정 역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녀 역시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분위기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네가 아비 좀 도와줘야겠다.”
“당연하죠. 저도 패왕채의 일원인데.”
“지금 당장 화산으로 가거라.”
“네? 그게 무슨?”
“무림맹이 무너진 이상 그나마 마교에 대적할 수 있는 문파는 몇 되지 않는다. 그중 우리와 그나마 우호적인 곳을 꼽으라면 화산파뿐이다.”
“으음!”
황혜령이 침음성을 흘렸다. 그러자 황경문이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하구나. 이런 식으로 너를 이용해서.”
“아니에요.”
“네 오라비만 화산에 없었어도 이런 부탁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이 너무 급박해 어쩔 수가 없구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화산으로 갈 테니까.”
“고맙다.”
“이번 기회에 오라버니가 자란 곳도 보고, 저야 더할 수 없이 좋네요. 그러니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황혜령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황경문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지체할 시간 없다. 지금 일광과 함께 떠나거라.”
“당장 말인가요?”
“그렇다.”
황경문의 단호한 말에 황혜령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언질을 받았는지 묵일광이 안으로 들어왔다. 두 자루의 커다란 도끼를 등에 찬 묵일광의 전신에서는 패도적인 기세가 물씬 풍겨 나왔다.
“총채주님.”
“내 딸을 부탁한다. 일광.”
“걱정하지 마십시오. 총채주님. 이 한 목숨 버려서라도 아가씨만큼은 무사히 화산으로 모시겠습니다.”
“믿겠다. 이제 떠나거라.”
황경문이 손을 내저었다.
“아빠!”
“어서 가래도.”
“부디 무사하셔야 해요.”
“난 황경문이다. 녹림의 총채주란 말이다. 나를 어찌할 자는 천하에 존재하지 않는다. 너를 보내는 것은 만일을 대비하고자 함이지, 마교가 두려워서가 아니다. 나를 못 믿겠느냐?”
“믿어요.”
“그러면 됐다. 어서 가거라.”
“네!”
대답을 하면서도 황혜령은 쉽게 발걸음을 옮기지 않았다. 그녀는 황경문의 모습을 머릿속에 담은 후에야 어렵게 밖으로 나갔다.
“휴!”
묵일광까지 나가고 혼자 남은 다음에야 황경문이 한숨을 토해 냈다.
그가 한 말은 반은 사실이었고, 나머지 반은 사실이 아니었다.
황혜령을 화산으로 보내 화산파의 도움을 받으려는 것도 사실이었지만, 보다 큰 이유는 황혜령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이기적이라 해도 좋았다. 현 시점에서 화산파만큼 안전한 곳은 천하에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됐어. 이제야 전력을 다해서 마교와 부딪쳐 볼 수 있겠어. 미련이 될 만한 것은 모두 내보냈으니.”
황경문이 애써 호승심을 끌어 올렸다.
***
마교주 척관혈의 등장 이후 강호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정파가 위축되면서 그간 숨을 죽이고 있던 마도 성향의 문파들이 기세를 떨쳤고, 도적들이 창궐했다.
녹림십팔채의 강력한 영향력으로도 수많은 도적들을 모두 통제할 수는 없어 천하의 혼란은 극에 달했다.
힘이 있는 자들은 힘없는 자들을 수탈했고, 힘없는 자들은 도탄에 빠졌다.
힘이 없는 것이 죄인 세상.
담호가 북상을 하면서 본 광경은 그랬다.
세상은 지옥으로 변하고 있었다.
담호는 흑귀를 탄 채 관도를 걷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이어진 관도는 도무지 끝이 날 줄 몰랐다. 그래도 담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흑귀를 몰았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담호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관도 근처 평지에서 노숙을 준비하는 일단의 무리들을 보았기 때문이다.
성벽처럼 외곽을 둘러싼 마차의 지붕 위에는 커다란 깃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깃발에 선명하게 수놓아져 있는 네 글자는 바로 창천표국(蒼天鏢局)이었다.
귀주성 초입에서 만났던 창천표국이었다. 그들을 귀주성에서 벗어나는 곳에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이었지만, 담호는 말없이 그들을 스쳐 지나가려 했다.
그때였다.
“대협!”
갑자기 창천표국 무리에서 누군가 담호를 부르며 뛰어왔다.
“역시 대협이 맞군요.”
각진 얼굴과 뭉툭한 코,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매가 인상적인 중년인은 바로 창천표국의 대표두인 남우생이었다.
남우생은 담호를 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담호가 말을 멈춘 채 그를 무심히 바라봤다.
“혹시 연하(沿河) 쪽으로 가시는 겁니까?”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배를 타고 귀주성을 빠져나가려는 것이 그의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남우생이 급히 말을 이었다.
“인근 백여 리 안쪽에는 민가나 마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조금 있으면 날이 어두워지니 차라리 저희와 함께 노숙을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저번에 신세를 진 것도 있으니 보답을 하고 싶어서입니다. 덕분에 저희도 편하게 노숙을 했으니까요.”
남우생의 눈빛에 거짓이 없음을 확인한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남우생이 미소를 지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그럼 이쪽으로 오시지요.”
그가 담호를 창천표국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이끌었다.
담호가 오자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분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분은?”
“오늘 우리와 함께 노숙하실 게다. 대협께 식사와 잠자리를 마련해 드리거라.”
“예! 대표두님.”
쟁자수들이 공손히 대답한 후에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쪽에 우선 앉으시지요.”
남우생이 담호에게 자신의 옆자리를 권했다.
담호가 자리에 앉자 쟁자수가 죽이 든 그릇을 가져왔다. 제법 그럴싸한 죽이었다.
죽을 보자 불현듯 방진보가 떠올랐다. 방진보도 노숙을 할 때면 이런 죽을 자주 끓여 줬기 때문이다.
“애써 모셔 놓고 식사가 변변치 못해 죄송합니다. 대신 괜찮은 술이 있으니 한번 맛보시지요.”
남우생이 내민 것은 바로 술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