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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7화 4장. 피의 수레바퀴는 굴러가기 시작했다(3)
“싸구려 독주입니다만, 노숙을 할 때 이보다 더 좋은 녀석은 없지요. 한잔 드시면 몸이 조금은 풀리실 겁니다.”
남우생의 말처럼 술병의 마개에서는 독주 특유의 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담호가 술병을 받았다.
“잘 마시지.”
“술은 함께 마셔야 제격이지요.”
남우생이 또 다른 술병을 꺼내 담호 앞으로 내밀었다. 담호는 들고 있는 술병을 남우생의 술병에 가볍게 부딪쳤다.
채앵!
맑은 소리가 울려 퍼지고, 두 사람은 술병을 들이켰다.
싸구려 독주가 식도를 화끈하게 훑고 지나갔다. 독한 술이 들어가자 뱃속이 요동쳤다. 어지간한 사람들은 술을 마시는 순간 토할 정도였다.
그렇게 독한 술을 두 사람은 벌컥벌컥 잘도 마셨다.
근처에 있던 표두와 쟁자수 들이 그런 두 사람을 질렸다는 얼굴로 바라봤다. 그들도 어지간히 술을 잘 마신다고 자부했지만, 담호와 남우생 같이 독주를 물처럼 마실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담호가 물었다.
“나를 아나 보군.”
“그렇습니다.”
남우생이 순순히 인정했다. 담호가 빤히 바라보자 그가 급히 말을 이었다.
“모를 수가 없지요. 권마 담 대협 덕분에 귀주성 전체가 뒤집어졌으니까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 봤을 때 담호는 친분을 쌓기도 전에 먼저 떠났다. 그래서 그의 정체를 미처 알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의 존재감은 너무 강렬해서 가슴 깊이 남아 있었다.
그러던 차에 흑무방의 멸문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흑무방을 멸문시킨 자가 담호라는 사실도.
그제야 남우생은 자신이 우연히 만났던 남자가 그 유명한 권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표국에 몸이 묶여 있다지만 그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당연히 담호에 대한 호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저분이 권마라고?”
“맙소사! 권마라니.”
두 사람의 대화를 몰래 엿듣던 표두와 쟁자수 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의 얼굴에 선망의 빛이 떠올랐다.
표국은 무림에 적을 둔 문파와는 다르다.
명문대파에 소속된 무인들은 사실상 생계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기본적인 의식주를 자파에서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먹고살기 위해 무력을 파는 것을 천시한다. 무인이 무공을 익혔으면 대의를 위해 사용해야지, 먹고살기 위해 파는 것은 체면이 깎이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생계 걱정하지 않고 편하게 무공을 익힐 수 있는 무인의 수는 극히 드물었다.
대부분의 무인들은 생계를 걱정해야 했다. 그래서 상당수의 무인들은 표국이나 호상단에 종사했다. 먹고살기 위해 자신의 무력을 파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들을 가리켜 경계무인(境界武人)이라는 말을 쓰기도 했다.
강호와 상계의 경계에 서 있는 자들.
완전한 강호인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한 상인도 아닌 이들은 사람들에게 주변인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강호에 대한 열정이나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일반 무인들보다 강호사에 더욱 관심이 많았다.
이들에게도 권마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두 주먹만으로 강호의 정상에 우뚝 선 담호는 그들이 꿈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모습이었다.
남우생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뜬금없는 남우생의 말에 담호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망이 되어 주신 것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표두로 일하다 보면 참으로 많은 곳을 가게 되고, 많은 것을 보게 됩니다. 저는 지금처럼 세상이 혼란스러운 것을 처음 봅니다. 마도가 창궐하고, 정파는 움츠러들다 보니 많은 백성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참으로 지옥 같은 세상이지요. 이런 때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
“바로 희망입니다. 언젠가는 이 전쟁이 끝날 거라는 희망, 누군가는 이 고통을 끝내 줄 거라는 희망.”
“…….”
“사람들은 희망을 빛을 대협에게서 보았습니다.”
“난 대협이 아니야. 희망을 주는 자 따위는 더더욱 아니고.”
“천하에 수많은 무인이 있지만 그중 진정 대협으로 불릴 만한 자가 몇이나 있겠습니까? 저는 담 대협이야말로 대협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중협(魔中俠)의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남우생의 말에는 진심이 묻어나오고 있었다. 그는 평소 속에 담아 두었던 말을 거침없이 내뱉고 있었다.
“나는 마중협 따위가 아니야.”
“대협은 그렇게 생각하실지 몰라도,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대협께서 스스로 마도에 몸을 던져 가시밭길을 걷는 거라 생각하지요. 그리고 대협의 행보를 보며 한 줄기 희망을 갖습니다. 저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합니다. 이 지옥 같은 세상에 살 희망을 준다는 것만으로도.”
담호는 술병을 입에 가져갔다.
싸구려 독주가 다시금 그의 식도를 화끈하게 달궜다.
남우생의 말이 낯간지럽게 느껴졌다.
그는 마중협이 아니었다.
협객의 길을 걷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자신이 걷는 길은 패도.
힘으로써 모든 것을 증명하고, 투쟁 속에 살아가는 무인의 길을 걸어갈 뿐이다. 하지만 담호는 굳이 그런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담호가 다시 술을 들이마셨다. 그의 분위기에 압도당한 남우생이 덩달아 술병을 입으로 가져갔다.
잠시 동안 두 사람은 말없이 술을 마셨다.
술병이 바닥을 드러냈을 무렵 남우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괜히 분위기가 무거워졌군요. 그냥 오지랖 넓은 표두의 헛소리라고 생각하시고, 너그럽게 넘겨 주십시오. 표행이 길어지다 보면 저도 모르게 말이 나옵니다. 하하하!”
“어디로 가는 표행이지?”
“하남으로 갑니다.”
“하남?”
“정확히는 숭산이지요.”
“소림사?”
“그렇습니다. 대원상단(大原商團)의 의뢰를 받아 소림사로 가는 길입니다.”
대원상단은 천하 십대상단 중 하나였다. 지닌바 금은보화가 작은 동산을 이룬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엄청난 부를 소유하고 있었다.
“대원상단이 무림맹을 지원하는 건가?”
“정확히는 소림사를 지원하는 거지요. 신화상단이 마교의 후원자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그들 역시 노선을 명확히 정할 수밖에 없었거든요.”
순간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역시 그랬나?’
남우생은 모르지만 담호는 이미 몇 번이나 신화상단과 동행했었다. 그때도 원설화에게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았었다.
무엇보다 원설화는 담호에게 전뇌섭요공(全腦攝妖功)이라는 사술을 펼쳤었다. 만일 담호의 내공이나 정신력이 조금이라도 약했다면 그녀가 펼치는 사술에 넘어갔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마교와 관련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는데, 추측이 사실로 드러났다.
신화상단이 마교의 외원이라는 사실은 상계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천하제일의 세력을 지닌 마교에 천하제일의 재력을 보유한 신화상단이 더해진다면 그 후환이 끝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상단들이 소림사에 은밀한 지원을 했다. 신화상단을 견제하는 이들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대원상단도 마찬가지였다. 신화상단과 많은 영역이 겹치는 그들로서는 소림사와 무림맹을 지원할 수밖에 없었다.
마교와 강호의 전쟁은 단순히 무림 세력 간의 싸움이 아니었다. 그들의 싸움에 걸려 있는 것이 너무 많았다.
담호는 술을 한 모금 집어삼켰다. 이번엔 유독 주향이 오랫동안 입안에 남았다.
밤은 깊어 갔다.
남우생을 비롯한 쟁자수들은 대부분 잠자리에 들었고, 표사들만 몇 명 남아서 짐을 확인했다. 짐을 지키고, 점검하는 것은 표사들의 역할이었다.
담호는 그때까지도 깨어 있었다.
술을 마시고 누웠는데도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누운 채 타오르는 불빛을 무심히 바라봤다.
그때였다.
“휴! 이렇게 많은 재물을 소림사까지 옮겨야 한다니. 아마 창천표국 역사 이래 이렇게 엄청난 양의 재물을 옮기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거야.”
“나는 막 가슴이 떨리네. 과연 우리가 무사히 등봉현에 이 많은 표물을 운송할 수 있을까?”
“해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소림사와 무림맹에 큰 힘이 되어 줄 재물인데.”
“자네는 두렵지 않은가? 어쩌면 마교와 충돌할지도 모르는데.”
“두렵지. 미치도록 두렵지.”
표사들의 목소리가 두런두런 들려왔다. 번을 서고 있던 표사들이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표사들 중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이들이었다. 담호보다 훨씬 어렸기에 유독 기억에 남았다.
“흐흐! 지금이라도 표행에서 빼 달라고 할까? 대표두라면 빼 줄지도 모르는데.”
“그러다 경을 치려고? 대표두 성정에 표행에서 중도 하차하면 잘도 가만두겠다.”
“하기는…….”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그러고 싶지 않아. 비록 미약한 힘이라지만 그래도 세상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거든.”
젊은 표사의 눈이 어둠 속에서도 샛별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는 창천표국의 수많은 표사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누구보다 강한 정의심을 갖고 있었다. 너무 정의심이 강해 간혹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기도 했다.
동료 표사가 젊은 표사의 어깨를 두들겼다.
“밤이 늦었다. 어서 교대하고 잠이나 자자. 조금이라도 자야 내일 힘을 낼 수 있으니까.”
“그래!”
두 사람은 곧 다른 표사들을 깨워 번을 세우고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새벽 일찍 담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 담호를 보고 젊은 표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벌써 일어나셨네요? 피곤하지 않으세요?”
“괜찮아!”
“하기는 담 대협께서는 엄청난 고수니까 피곤을 느끼시지 않겠네요. 운공 한 번이면 모든 게 해결되시잖아요.”
젊은 표사가 멋쩍은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어젯밤 동료 표사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던 그 표사였다. 분명 늦게 잠자리에 들었는데도 가장 먼저 일어나 짐을 점검하고 있었다.
“참! 제 이름은 조수광입니다.”
“…….”
“그냥 알려 주고 싶었어요. 죄송합니다.”
“기억하지.”
“정말인가요?”
담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조수광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평범한 표사에 불과한 그가 담호에게 이렇게 이름을 밝힌 것은 굉장한 용기를 발휘한 것이다.
무시할 수도 있었지만, 담호는 그 이름을 기억해 준다고 했다. 조수광에겐 최고의 보답이었다.
“아, 잠시만 기다리세요. 곧 식사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 후 그가 가져온 것은 전날 먹다 남긴 죽이었다. 비록 식어서 딱딱하게 굳었지만, 그래도 아직 먹을 만했다.
담호는 그가 건네준 죽을 맛있게 먹었다. 그에 조수광은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말은 안 했지만 담호는 그의 우상이었다.
지금은 표국에 몸을 담고 있지만 언젠가 강해지면 담호처럼 강호를 주유하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었다.
조수광은 담호가 맛있게 식사를 하는 것을 보고 다른 사람들도 챙겼다. 일어난 표사와 쟁자수 들에게 남은 죽을 공평하게 나눠 주고 떠날 준비를 했다.
떠날 준비를 끝마친 남우생이 담호에게 말했다.
“그럼 저희 먼저 출발하겠습니다. 부디 담 대협의 장도에 무운이 깃들길 빌겠습니다.”
“담 대협의 장도에 무운이 깃들길 빌겠습니다.”
조수광을 비롯한 표사, 표두, 쟁자수 들이 일제히 한목소리로 외쳤다. 그리고 떠났다.
담호는 우두커니 서서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창천표국은 수로를 이용한다고 했다. 이곳에서 조금만 더 가면 커다란 강이 나오는데 운마도강선이 정기적으로 드나든다. 창천표국 입장에서 보자면 배를 이용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반면 담호는 흑귀를 타고 육로를 이용하는 방법을 택했다. 흑귀를 조금 더 자유롭게 풀어 두고 싶었기 때문이다.
담호는 흑귀를 타고 길을 떠났다.
관도는 한적했다.
한참을 가도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들리는 것은 온통 새소리뿐이었다. 길가엔 이름 모를 꽃들이 가득 피어 있었고, 하늘엔 새하얀 구름이 물결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물소리가 들려왔다. 관도를 걷다 보니 자연스럽게 강과 합류하는 지점에 도착한 것이다.
강에 도착한 순간 담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상류에서부터 떠내려 오는 것으로 보이는 물체들 때문이다.
부서진 배의 잔해와 커다란 짐, 그리고 피를 흘리며 떠내려 오는 시신들. 아마도 상류에서 치열한 격전이 있었던 듯했다. 그런데 시신들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창천표국.’
떠내려 오는 시신은 분명 창천표국의 쟁자수들이 분명했다.
담호는 흑귀의 옆구리를 박찼다. 그러자 흑귀가 무서운 속도로 상류를 향해 달려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반파된 채 강가에 처박힌 커다란 운마도강선 한 척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운마도강선 주위로 방진을 구성한 채 복면인들과 맞서 싸우고 있는 창천표국의 무인들이 보였다.
“제기랄!”
“으아아!”
그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저항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