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8
338화 5장. 마음이 극에 달하면 하늘이 움직인다(1)
그들은 짙은 회색 무복을 입고, 목도리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있었다. 거칠게 풀어헤친 머리카락과 그 아래 흉흉하게 빛나는 눈동자. 그들은 마치 야생의 늑대를 풀어놓은 것처럼 미친 듯이 날뛰고 있었다.
쉬아앙!
그들의 검이 매섭게 공간을 가르며 날아왔다.
“크읏!”
“제기랄! 왼쪽이 뚫렸다. 막아!”
창천표국의 표사들은 혼신의 힘을 다해 대항했다. 하지만 무력 차이가 너무 컸다. 회색 무인들은 마치 허수아비를 베듯 창천표국의 표사들을 쓰러트렸다.
“이놈들!”
창천표국의 대표두 남우생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의 눈엔 분노와 당혹스러움이 가득했다.
운마도강선을 타기까지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문제는 창천표국이 운마도강선을 탄 후 일어났다. 갑자기 회색 무복을 입은 무인들이 운마도강선을 따라 강가를 달려온 것이다.
처음엔 걱정하지 않았다. 운마도강선은 제법 넓은 강 한가운데를 운행하고 있었고, 회색 무인들은 강가를 따라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운마도강선과 강가의 거리는 수십여 장, 제아무리 경공의 달인이라고 할지라도 한 번에 넘을 수 없는 엄청난 거리였다.
“하하하!”
“저놈들 뭐야?”
처음엔 긴장 어린 표정을 짓던 창천표국 무인들도 그런 현실을 인식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비웃음이 경악으로 바뀌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들이 등에 메고 있던 나무판자들을 강으로 던졌다. 겨우 어른이 발을 디딜 수 있을 만큼 작은 나무판자들이 수면 위에 일렬로 늘어섰다. 강가와 운마도강선을 잇는 징검다리가 순식간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들은 나무판자로 만든 징검다리를 밟고 순식간에 운마도강선으로 뛰어들었다. 수상비(水上飛)를 응용한 경공술이었다.
그렇게 운마도강선으로 난입한 회색 무인들은 순식간에 방향타를 망가트렸다. 방향을 잃은 운마도강선은 이리저리 요동치다가 강가에 처박혔고, 그 후로는 보는 바와 같았다.
회색 무인들은 강했다. 그들의 검술은 무척이나 신묘하고 날카로웠다. 창천표국의 표사들도 산전수전 다 겪은 강호들이었지만, 회색 무인들의 검술을 당해 내지는 못했다.
“크아악!”
“헉!”
남우생의 눈앞에서 창천표국의 표사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그들 모두 남우생과 수년에서 십 년 이상을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었다. 남우생에겐 형제이자 동생 같던 이들이 회색 무인들의 검에 죽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이놈들!”
남우생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의 시선이 강가를 향했다. 그곳에 회색 무인들의 우두머리인 듯한 남자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남다른 기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표홀하면서도 꼿꼿한 기상이 마치 서릿발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이놈!”
남우생은 망설이지 않고 우두머리 무인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그가 채 우두머리에게 도착하기도 전에 회색 무인 세 명이 앞을 막아섰다.
“비켜랏!”
남우생이 전력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미 절정고수 반열에 올라 있는 남우생이었다. 그의 검에 강력한 검기가 어렸다.
챙챙챙!
하지만 그의 검기는 회색 무인들에게 가로막혔다.
남우생이 눈을 크게 치떴다. 마음먹고 끌어 올린 검기였다. 당연히 위력 또한 대단했다. 그런 검기를 회색 무인들은 아무렇지 않고 막아 내고 있었다.
‘이 녀석들!’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었다.
우두머리도 아닌 수하들에게 검이 막혔다. 비록 세 명이서 막아 냈다고 하지만 그 무위가 범상치 않다는 증거였다.
수하들도 이럴진대 우두머리의 무위가 어떨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우두머리 무인은 수하들에게 싸움을 맡긴 채 철저히 방관하고 있었다. 자신이 참여하지 않더라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네놈들은 대체 누구냐? 누구기에 감히 창천표국을 공격한단 말이냐?”
남우생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회색 무인들은 대답 대신 검으로 화답했다.
세 명의 합공에 남우생의 손발이 어지러워졌다.
그들의 검술은 무척이나 정묘해서 마치 톱니바퀴처럼 빈틈없이 맞물려 들어왔다.
그들의 파상공세에 남우생은 점차 궁지에 몰리고 있었다. 그사이 창천표국의 무인들이 죽어 나가고 있었다.
“으아아!”
젊은 표사 조수광은 죽을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그의 검은 회색 무인의 검에 막혀 튕겨 나왔다.
“크으!”
검을 잡은 호구가 찢어져 피가 흐르고 있었다.
애초부터 조수광은 회색 무인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무력의 차이가 너무 컸다.
‘도대체!’
조수광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회색 무인들이 펼치는 검법은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급조된 것이 아닌 오랜 시간 동안 정성을 들여 다듬어 온 명문가의 검법이 분명했다.
초식의 정묘함이나 검기의 운용이 조수광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챙캉!
회색 무인이 휘두른 검에 조수광의 검이 반 동강이 됐다.
쐐애액!
무기를 잃은 조수광을 향해 회색 무인의 검이 날아왔다. 회색 무인의 검은 조수광의 허리를 가르고 지나갔다.
“커헉!”
조수광이 비명과 함께 바닥에 고꾸라졌다. 그의 허리에서는 피가 분수처럼 솟아 나오고 있었다. 갈라진 상처에서는 잘린 내장 조각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회생 불가의 중상이었다.
‘끝……인가?’
바닥에 누운 조수광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나왔다.
청운의 꿈을 안고 표국에 투신했다.
표두가 되고 싶었고, 또 언젠가는 자신만의 표국을 꾸리고 싶었었다. 의뢰를 받으면 반드시 임무를 완수하는 그런 표국주도 되고 싶었고, 담호처럼 강호를 주유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꿈도 이젠 끝이었다. 눈이 점차 감겨 갔다.
그때 갑자기 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누군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조수광은 혼신의 힘을 다해 눈을 떴다. 그러자 흐릿해진 시야에 누군가의 윤곽이 보였다.
얼굴 또한 흐릿해서 이목구비조차 알아볼 수 없었지만 조수광은 그가 누군지 알았다.
“권……마.”
느낌으로, 또 본능으로 알았다.
죽음을 눈앞에 둔 자는 때로 놀라울 만큼 감각이 예민해지기 마련이었다. 지금 조수광이 그랬다.
조수광을 내려다보는 이는 바로 담호였다.
담호는 말없이 조수광을 바라봤다.
그저 하룻밤의 인연이었을 뿐이다. 특별한 감정이 있을 턱이 없었다. 그런데도 담호는 조수광의 마지막을 지켜봐야 한다고 생각했다.
담호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조수광.”
“기억하는군요. 제…… 이름.”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조수광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가 가장 존경하고, 천하에서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이가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줬다. 그 사실이 기뻤다.
갑자기 조수광의 몸이 경련을 일으켰다. 숨이 끊어지려는 것이다. 그런데도 조수광은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표물을…….”
그 말을 끝으로 조수광은 숨이 끊어졌다.
부릅뜬 두 눈에서 초점이 사라지고 있었다. 이제껏 조수광이란 젊은 표사가 쌓아 온 모든 것이 물안개처럼 흩어져 갔다.
담호는 그 모든 광경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쉬아악!
담호의 등 뒤로 회색 무인의 검이 쏘아졌다. 조수광을 죽인 바로 그자였다.
그의 검이 허공에서 수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순간 담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턱!
수많은 변화를 일으키던 회색 무인의 검이 담호의 손에 덥석 잡혔다. 회색 무인이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그의 입술이 열리고 탁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신검이라 부를 수는 없지만, 그래도 명검 반열에 속하는 검이었다.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런데도 검을 잡은 담호의 손에는 흔한 생채기 하나 없었다.
기의 그물로 손을 감싸는 은망수(銀網手)가 펼쳐진 것이다.
회색 무인은 검기를 더욱 날카롭게 운용해 검을 빼내려 했다. 하지만 담호의 손은 여전히 요지부동이었다.
회색 무인의 시선이 담호와 마주쳤다. 순간 회색 무인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담호의 눈에 어린 광포한 기운을 엿보았기 때문이다.
그 순간에도 담호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떻게…… 너희들이 화산의 검을 익히고 있는 거냐?”
쿠우우!
담호의 외침은 폭풍이 되어 일대를 휩쓸었다.
“크윽!”
“헉!”
창천표국의 무인들을 공격하던 회색 무인들이 담호의 외침에 심령의 타격을 받고 비틀거렸다.
담호의 두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사납게 빛나고 있었다.
회색 무인이 펼친 검법은 분명 화산파의 절기인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이 분명했다.
화산파에서도 오직 매화검수들만이 익힐 수 있는 상승의 무공이었다. 결코 외부로 유출되어서도 안 되고, 익혀서도 안 되는 화산파만의 무공이었다.
“크윽!”
담호의 사자후를 정면으로 받은 회색 무인의 눈동자가 뒤집혔다. 담호의 사자후가 그의 고막과 심맥을 완전히 박살 낸 것이다.
회색 무인의 칠공에서 피가 터져 나왔다. 코와, 입, 귀는 물론이고 눈에서까지 피를 쏟아 내는 그의 모습은 실로 끔찍했다.
“끄으으!”
회색 무인이 두 손을 허우적거리다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절명한 것이다.
담호가 무너지는 회색 무인을 뒤로하고 다른 이들에게 시선을 돌렸다.
“크윽!”
“으음!”
그의 눈빛을 정면으로 받은 회색 무인들이 움찔했다. 창천표국의 표사들은 이미 그들의 안중에 존재하지 않았다.
온몸이 으슬으슬 떨려 오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다. 담호의 존재감은 그 정도로 가공했다.
거대한 짐승이 살기를 폭발시키고 있었다.
이제껏 그들이 단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엄청난 살기였다.
일대에 정적이 찾아왔다.
누구도 감히 크게 숨을 내쉬지 못했다. 그만큼 담호의 살기는 압도적이었다.
담호의 걸음이 가까이 있는 회색 무인을 향했다. 한창 신나게 창천표국의 표두를 공격하고 있던 회색 무인이 얼어붙었다.
덜덜!
뇌리까지 침습하는 끔직한 살기에 절로 입이 벌어지고 침이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도 고련을 거친 고수였다. 그는 억지로 독문의 호심법(護心法)을 운용했다. 그러자 얼어붙었던 몸이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그 순간에도 담호는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야아아!”
그는 혼신이 힘을 다해 검술을 펼쳤다. 담호의 살기를 견디며 펼친 검술이었다. 본래 위력의 절반도 발휘하지 못했다.
허공에 흐릿한 매화가 피어났다.
이십사수매화검을 펼칠 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정말 그는 이십사수매화검을 익힌 것이다.
쾅!
그 순간 뇌음이 울려 퍼졌다.
암공에서 대지로 내리꽂히는 뇌전처럼 담호의 주먹이 회색 무인에게 꽂힌 것이다.
매화는 완전히 피어나기도 전에 소멸됐고, 회색 무인의 등은 폭죽처럼 터져 나갔다.
“끄으으!”
회색 무인이 부들부들 떨다가 그대로 쓰러졌다.
담호는 쓰러진 회색 무인의 시체를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창천표국과 회색 무인들의 전투는 이미 끝나 있었다. 회색 무인들은 창천표국을 공격하는 것을 멈추고 담호를 바라봤다. 그것은 살아남은 창천표국의 표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쿵! 스르륵! 쿵! 스르륵!
전장에 불길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상에서 오직 담호만이 낼 수 있는 발소리였다. 사람의 심장을 불안하게 고동치게 만드는 엇박자의 걸음은 점점 커져만 갔다.
회색 무인들이 뒤로 주춤주춤 물러났다.
철퍽!
발목까지 물에 잠기고 나서야 회색 무인들은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이 잠시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비록 말 한마디 하지 않았지만 그들은 서로의 의중을 알아차렸다.
“이야아!”
“죽어랏!”
그들이 악을 쓰며 일제히 담호를 향해 달려들었다.
어차피 그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공격하는 수밖에.
수많은 검기가 허공을 화려하게 수놓았다. 수없이 많은 매화가 담호의 눈앞에서 명멸하고 있었다.
그 순간 담호가 움직였다.
폭강이 그의 몸을 휘감아 돌았다.
콰아아아!
거대한 검은 폭풍이 회색 무인들을 덮쳤다.
제일 먼저 화려하게 피어나던 매화가 폭풍에 휘말려 사라졌다. 뒤이어 회색 무인들이 들고 있던 검이 터져 나갔다. 그리고 회색 무인들이 폭풍에 휩쓸려 사방으로 날아갔다.
그것들은 이미 인간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부서져 있었다.
“아!”
그 끔찍한 모습에 살아남은 창천표국의 표사들이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