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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9화 5장. 마음이 극에 달하면 하늘이 움직인다(2)
우두머리 무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복면 뒤에 숨겨진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그의 발치에는 창천표국의 대표두인 남우생이 중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남우생은 자신에 비해 실력이 많이 부족했다. 하지만 남우생은 결코 쉽게 포기하지 않는 인내와 투지의 소유자였다.
부족한 무공은 투지로 매웠고,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세 명의 무인을 뛰어넘어 우두머리 무인에 접근했다. 남우생은 잠시 동안 우두머리 무인을 붙잡고 늘어졌고, 그 짧은 순간 담호가 부하들을 학살했다.
우두머리 무인이 남우생을 쓰러트렸을 때는 그의 수하들이 모두 전멸한 후였다.
“크으으!”
발밑에서 중상을 입은 남우생이 신음을 흘리고 있었지만, 이미 그는 우두머리 무인의 관심 밖이었다.
“감히!”
우두머리 무인의 눈에서 무시무시한 안광이 폭사되어 나왔다. 담호에게 쓰러진 부하들은 그가 오랜 시간과 공을 들여 소중히 키운 자들이었다.
부하보다는 제자에 가까운 이들이었다. 그만큼 많은 정이 쌓여 있었다. 그런 이들의 죽음이 우두머리 무인의 살심을 크게 증폭시켰다.
“권마!”
그가 담호를 향해 걸어왔다.
담호 역시 그를 향해 걸어갔다.
우두머리 무인이 노성을 내뱉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느냐?”
담호가 말없이 우두머리 무인을 빤히 바라봤다. 그에 우두머리 무인의 눈매가 더욱 사납게 변했다.
“감히 너 따위가 내 제자들을…….”
“진궁자.”
“…….”
“맞지?”
순간 우두머리 무인의 몸이 벼락을 맞은 것처럼 부르르 떨렸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살기를 폭발시키던 우두머리 무인의 눈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폭발 직전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었다. 그 중심에 우두머리 무인이 있었다.
담호는 그런 우두머리 무인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폈다.
우두머리 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담호는 이미 대답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우두머리 무인의 눈빛, 호흡, 그리고 피부의 반응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찾아왔다.
우두머리 무인은 멈춰 서서 움직이지 않았다. 담호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토록 치열하게 돌아가던 세상이 멈춘 것 같았다.
그 한가운데 우두머리 무인과 담호가 있었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바로 우두머리 무인이었다.
“어떻게 알았느냐?”
자신이 진궁자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말이었다.
담호의 눈빛이 착 가라앉았다.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상대의 입을 통해 진실을 듣는 것은 느껴지는 충격의 강도가 달랐다.
상대가 정말 진궁자라면 사부인 현소 진인보다 한 세대 전의 인물이다. 현소 진인의 사부이자 전대 화산제일검이었던 천궁자와 동시대의 사람이다.
그 말은 곧 담호의 사조뻘 되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단리에서 암습한 것도 당신이었지?”
“그것까지 알았느냐?”
진궁자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천사교의 제단이 있던 마을에서 풍월제 단공월을 암습했던 자도 그였고, 담호를 기습 공격했던 자 역시 바로 그였다.
담호는 그때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었다. 그의 기도, 느낌, 눈빛, 호흡, 그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이유는 묻지 않지. 결사대를 이끌고 마교의 본단을 기습했던 당신이 왜 변절을 하고 천사교의 편에 섰는지.”
“무량수불!”
무의식중에 진궁자의 입에서 진언이 흘러나왔다.
담호가 그를 향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오늘 난 당신을 죽일 거야.”
“내가 진궁자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냐?”
“그래서 죽이려는 거야. 당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당신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면 사부와 화산파가 흔들릴 테니까.”
“후!”
진궁자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복면을 벗었다. 그러자 청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현기가 감도는 눈동자, 그리고 푸른 기운이 감도는 머리와 수염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진궁자는 현소 진인보다 한 세대 전의 인물이건만 오히려 그보다 어려 보였다.
그가 바로 전대 화산제일검이었던 천궁자의 사제이자 뛰어난 검객이었던 진궁자였다.
결사대의 일원이었고, 화산파의 자랑이었던 무인. 그가 적이 되어 담호를 마주 보고 있었다.
진궁자의 시선이 담호에게 죽은 수하들을 향했다.
“저들은 따지고 보면 너에게 사형제나 마찬가지였다. 그들 역시 화산의 무공을 익혔으니까.”
“개소리.”
“비록 수박 겉핥기로나마 이십사수매화검을 익힌 아이들이다. 그들이 과연 너하고 남이라 할 수 있을까? 너는 그런 아이들을 죽인 것이다.”
“괴변도 그 정도면 수준급이야.”
“어찌 현소 같은 숙맥에게서 너와 같은 외곬수가 나왔을꼬. 현소는 그렇게 앞뒤가 꽉 막힌 녀석이 아니었건만.”
“그 더러운 입에 사부의 이름을 담지 마.”
“좋으나 싫으나 난 너에게 사조가 된다. 호야.”
“다 떠들었나?”
“하! 역시 말이 안 통하는 녀석이구나. 좋다. 더 이상 너를 설득하지 않으마. 하지만 이것만은 알아주길 바란다. 너는 이해가 되지 않겠지만 지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오로지 화산파를 위한 일이라는 것을. 그 사실을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없을 거야.”
담호가 단호히 대답했다.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단호함에 진궁자가 움찔했다.
담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엔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어떻게 화산에 이런 괴물 같은 놈이 나타났을꼬?’
그가 기억하고 있는 화산파는 멋과 여유가 있는 곳이었다. 의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패도적이지는 않았다.
그가 가장 존경했던 사형 천궁자도 무공으로는 천하에 손에 꼽힐 만큼 강하지만, 이렇게 패도적인 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간만 조금 더 있었다면, 그에게 주어진 임무만 없었다면 조금 더 담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에게 주어진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묻지. 천사교에서 당신의 위치는?”
“오사(五邪)의 일원이란다. 아이야.”
“오사?”
“내가 알려 줄 수 있는 것은 거기까지란다. 그 이상은 네 힘으로 알아내려무나.”
스릉!
진궁자가 검을 빼 들었다.
순간 담호와 진궁자 주위를 감싸고 있던 강기막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담호와 대화를 하는 그 순간 강기막으로 음파를 차단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남우생과 생존자들은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 내용을 전혀 듣지 못했다.
진궁자가 검을 들어 담호를 겨눴다. 담호는 그가 취한 기수식이 화산파 최고 검공 중 하나인 태청검법(太淸劍法)임을 알아차렸다.
오직 장로급 이상만이 익힐 수 있는 화산파 진신절학.
비록 모종의 이유로 천사교에 투신한 진궁자였지만, 그의 뿌리는 화산파였다. 때문에 가장 자신 있는 무공 역시 화산파의 절학인 태청검법이었다. 다만 원래의 태청검법에 그만의 심득이 가미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아차릴 수 없을 만큼 변형되었다.
“오너라. 그래도 사문의 존장인데 삼 초는 양보해 주마.”
쾅!
그 순간 담호가 대답과 함께 대지를 박찼다.
그가 박찬 대지에 깊은 족적이 남았다. 충보를 펼친 흔적이었다.
담호가 진궁자를 향해 쇄도했다.
콰아아!
그의 몸이 도달하기도 전에 가공할 압력이 진궁자를 짓눌러 왔다.
진궁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마치 심해에 빠진 듯한 압력이 전신을 옭죄어 왔다. 그리고 담호의 주먹이 그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왔다.
‘삼 초를 양보한다고? 미친!’
그는 자신이 방금 전 떠든 말을 후회했다.
담호는 선공을 양보하고도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는 체면도 잊고 검을 휘둘러 담호를 공격했다.
쩌어엉!
그의 검과 담호의 주먹이 허공에서 격돌했다. 순간 진궁자의 검이 활처럼 휘었다.
투웅!
한계까지 휘어졌던 검이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며 진궁자를 튕겨 냈다. 진궁자는 암향표(暗香飄)를 펼쳐 균형을 잡았다.
그 순간 담호가 그를 향해 들이닥쳤다.
일직선의 보법, 파성추였다.
마치 들소처럼 달려드는 담호의 기세에 진궁자가 태청검법의 절초를 펼쳤다.
쉬쉬쉭!
검기의 비가 담호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검기의 비는 담호의 몸에 닿기도 전에 폭강에 휩쓸려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폭마경을 펼친 것이다.
이어 펼쳐지는 탄마각.
쾅!
“크흠!”
진궁자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검으로 막아 냈는데 충격이 내장을 찌르르 울렸다.
그 순간 담호가 단양타의 일격을 펼쳤다.
쩌엉!
쇳소리와 함께 진궁자가 비칠비칠 뒤로 물러났다. 그런 그의 얼굴엔 당혹한 빛이 역력했다.
순식간에 폭풍 같은 삼 초가 지나갔다. 그는 선공을 양보하겠다는 약속도 잊고 담호를 공격했다. 하지만 오히려 손해를 보고 말았다.
“삼 초를 양보한다고?”
“크윽!”
담호의 목소리가 비수처럼 가슴을 파고들었다.
까마득한 사문의 후배로부터 받는 비아냥거림이 그를 울컥하게 만들었다. 비록 생각하는 바가 달라 천사교에 몸을 담게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존심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그의 눈에 살기가 떠올랐다.
인정해야 했다. 화산파의 무공으로는 담호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방금 전에도 담호는 태청검법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그 말은 곧 화산파 무공의 허실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스아악!
진궁자의 기도가 바뀌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모습이 도사처럼 현묘하기 그지없었다면 지금은 엄청난 사기(邪氣)를 발산하고 있었다.
도가의 무공과 사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가지 공부가 결합된 그만의 독문무공. 바로 선검혈령술(仙劍血靈術)이었다.
쉬악!
진궁자의 검은 눈부신 빛을 발하고, 전신으로는 사이한 운무를 발산했다.
“크헉!”
“업!”
그가 발산하는 운무에 노출된 창천표국의 무인들 몇 명이 눈을 까뒤집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은 환상을 보고 있었다. 뇌에 침투한 사기가 환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환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현실과 다름없는 생생한 환영은 그들의 정신을 나락으로 떨어트렸다.
반면 빛을 발하는 진궁자의 검은 공간을 양단했다.
위잉!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검의 궤적에 있는 모든 것이 잘려 나갔다. 그중에는 운마도강선과 일부 무인들도 있었다.
“…….”
그들이 두 동강이 났다. 하지만 그 궤적에 목표로 했던 담호는 존재하지 않았다.
진궁자의 얼굴에 검은 그늘이 드리워졌다. 그가 고개를 들어 위를 바라봤다.
쐐애액!
허공에서부터 담호가 무서운 속도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진궁자의 검이 공간을 가르는 그 순간 허공으로 몸을 띄워 피해 냈던 것이다.
최선의 방어는 곧 공격으로 이어졌다.
쉬악!
담호의 다리가 무서운 속도로 튀어나왔다.
충보의 발전형인 충각(衝脚)이었다.
담호의 다리는 그 자체로 충차였다. 강철로 만들어진 모든 것을 파괴하는 공성 무기.
절대 피할 수 없는 궤도로 쏘아져 오는 담호의 발에 대응해 진궁자가 검 면으로 몸 중앙을 가렸다.
쾅!
“흐읍!”
진궁자의 입에서 답답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활처럼 휘어진 검신이 충격 대부분을 흡수했음에도 막대한 충격이 전신을 관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노강호답게 고통을 참으며 선검혈령술을 펼쳤다.
순식간에 담호가 시뻘건 혈무를 뒤집어썼다.
혈무를 뒤집어쓴 담호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뻘건 안개 속에서 수많은 그림자가 일어났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듯한 창백한 얼굴과 피에 물든 몸체.
이미 죽은 자들, 망령(亡靈)이었다.
담호의 눈매가 좁아졌다.
자신을 둘러싼 망령들의 얼굴이 익숙했기 때문이다.
남궁수, 천오경, 당사일, 사우연……. 모두 그에게 죽임을 당했던 자들이다. 그들이 망령이 되어 담호의 눈앞에 나타났다.
우웅!
그들이 담호를 향해 저주를 퍼부었다. 수백, 수천 명이 퍼붓는 저주였다.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대신 공기가 물결쳤다.
엄청난 원념(怨念)이 담호를 향해 퍼부어졌다.
제아무리 간담이 큰 자라도 모골이 송연해질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실제가 아니라 환상이란 것을 알면서도 당할 수밖에 없을 만큼 생생했다.
그 순간 담호가 주먹으로 대지를 내리쳤다. 한계까지 응축되어 있던 기가 대지를 타고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콰콰콰쾅!
담호를 중심으로 일어난 폭발이 원을 이루며 퍼져 나갔다.
폭발에 휩쓸린 모든 것이 사라졌다.
망령의 저주도.
붉디붉은 혈무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