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341화 (341/500)

 341

341화 6장. 난세가 영웅을 부른다(1)

“후우!”

방진보가 커다란 나무 아래 쪼그려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나무에 등을 기댄 채 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넘실거리는 구름 아래 희미하게 화음현이 보이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은 구름 위로 우뚝 솟아오른 낙안봉 정상이었다. 화산 남쪽에 있는 낙안봉은 그림 같은 풍경으로 유명했다. 특히 이곳에서 보는 운해는 무척이나 아름다워서 많은 도사들이 즐겨 찾았다.

방진보는 멍하니 운해를 바라봤다. 처음 화산에 왔을 때는 그렇게 아름다워 보이던 운해도 이젠 그에게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때였다.

“여기서 뭐해?”

낯익은 음성이 방진보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아, 누나?”

고개를 드니 종리연이 보였다.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그냥 쉬고 있어요. 왠지 조금 지쳐서…….”

“지칠 만도 하지. 나도 지쳤는걸.”

“누나도요?”

“그래!”

종리연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진보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아닌 게 아니라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에 그녀 역시 많이 지친 상태였다.

화산파 전 제자들에게 매화신단을 지급하겠다는 일념으로 그동안 연단을 해 왔다. 그 결과 얼마 전 매화신단을 모두 완성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되기까지 방진보의 도움이 컸다.

방진보가 익힌 오행군자공 덕분에 매화신단의 약력을 최대한 끌어올릴 수 있었다. 매화신단을 연단하는 과정에서 방진보의 오행군자공도 성취가 높아졌다.

이제 방진보의 오행군자공은 완숙한 경지에 달해 있었다. 방진보는 단지 음식을 통해 사람을 이롭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익혔을 뿐인데 뜻하지 않게 내공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것이다.

열정적으로 매화신단을 만들 때는 몰랐는데, 막상 모두 완성하자 방진보는 극심한 허탈감에 빠졌다.

매화신단을 지급받은 화산파 제자들은 무공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이제 그들의 내력은 비약적으로 상승할 것이다.

본래 화산파의 제자들은 방진보가 해 주는 음식을 통해 조금씩 내력이 상승되는 재미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매화신단을 복용하면 그에 비할 수 없이 내력이 상승되기 때문에 당장은 방진보의 음식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덕분에 방진보는 개점휴업 상태였다. 보조 숙수들도 키워 놓았기에 굳이 그가 음식을 만들지 않아도 됐다.

목적의식을 잃어버리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종리연이 그런 방진보를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봤다.

“진보야.”

“헤헤! 전 괜찮아요. 이대로 잠시만 있으면 또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방진보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살이 빠진 후 미소년이라고 불릴 만큼 외모에 물이 오른 방진보였다. 미소를 짓자 더욱 영준해 보였다. 하지만 허탈감마저 모두 감추지는 못했다.

그때였다.

“진보야.”

화산파의 제자 한 명이 낙안봉으로 올라오며 그들을 불렀다.

“무슨 일인가요?”

“원종 사형.”

종리연과 방진보가 동시에 일어나며 그를 맞이했다. 제자의 도명은 원종, 화산파의 일대제자 중 한 명이었다.

원종이 종리연을 바라봤다.

“신의 님도 이곳에 계셨군요.”

“무슨 일인가요?”

“장문인께서 진보를 불러오라 하셨습니다.”

“진보를요?”

“예!”

종리연과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 때문에 부르는지 아나요?”

“손님이 찾아와서 그런 모양입니다.”

“손님요?”

방진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연화봉 정상의 상궁은 화산파 장문인의 거처였다.

화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상궁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하늘이 온통 붉은색으로 물들어 가고 있을 때 누군가 상궁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마치 산양처럼 엄청난 탄력을 자랑하는 이는 바로 방진보였다.

그가 다가오자 경계를 서고 있던 화산파 제자들이 문을 열어 줬다. 방진보는 그들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화산파의 장문인인 운경을 마주 보고 앉아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방진보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단지 뒷모습만 보고도 방진보는 남자의 정체를 바로 알아봤다.

“형!”

“왔느냐?”

운경과의 대화를 멈추고 뒤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방진보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연운 형!”

“오랜만이다.”

담담하게 미소를 짓는 남자는 바로 초연운이었다.

“형!”

방진보가 초연운의 품에 와락 안겼다.

삼 년 동안 많이 어른스러워진 방진보였지만, 초연운 앞에서는 아이나 다름없었다.

“녀석!”

초연운이 미소를 지으며 방진보의 등을 토닥거렸다.

예전에는 무던히도 말싸움하고 다퉜던 사이였지만 오랜만에 보니 가슴이 뭉클했다.

“이제 괜찮아요?”

“뭐가?”

“그…….”

방진보가 말끝을 흐리며 초연운의 다리를 바라봤다.

초연운의 다리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하지만 옷으로 가려진 안쪽에는 무쇠로 만든 의족이 존재했다.

초연운이 방진보의 머리를 헝클이며 웃었다.

“하하! 이젠 괜찮다.”

“형!”

“그동안 내가 걱정을 많이 시킨 모양이구나. 더 이상 걱정할 필요 없어. 모두 나았으니까. 보라구!”

땅땅!

초연운이 손등으로 다리를 두드리자 청아한 쇳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어때? 멋지지? 철각(鐵脚)이라니. 흐흐!”

“…….”

“옛날부터 꼭 갖고 싶었는데.”

초연운의 너스레에 방진보의 표정이 한결 밝아졌다.

삼 년 전의 초연운은 그야말로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부모 같던 사부 장일산의 죽음과 형제 같던 사형제들의 죽음이 그를 나락으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는 세상과 담을 쌓고 소화산에서 은거했다. 방진보가 찾아가도 잘 만나 주지 않았기에 얼굴을 직접 본 것은 무척이나 오랜만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절망감과 무력감이 가득했던 초연운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았다. 어떠한 희망도 없이 죽어 있던 그 눈빛은 아직도 방진보의 가슴에 아픈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퍽!

그 순간 방진보가 초연운의 복부에 일격을 날렸다.

“컥!”

예상치 못한 일격을 허용한 초연운이 두 눈을 크게 치뜨며 입을 떡 벌렸다. 그러자 방진보가 코웃음을 쳤다.

“흥! 괜히 걱정이나 시키고 말이야.”

“얀마! 정말 아프단 말이야.”

“삼 년 동안이나 마음고생시켰으면 그 정도 벌은 받아야지.”

“너 주먹 많이 매워졌다. 짜식! 제법인데.”

“흥!”

방진보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을 보며 초연운이 미소를 지었다. 방진보의 성장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자신이 세상에 담을 쌓고 소화산에 은거하고 있을 때 방진보는 숙수로서도, 무인으로서도 착실히 성장을 했다. 그 사실이 기껍게 느껴졌다.

평소 투닥거리면서 무던히도 싸웠지만 초연운은 방진보를 많이 아꼈었다. 그래서 방진보의 성장이 누구보다 반갑고 고마웠다.

“그런데 형이 여긴 어쩐 일이에요? 이제 완전히 나온 거예요?”

“그래! 이제 더 이상 은거하지 않을 거야. 좀이 쑤셔서 견딜 수 있어야지.”

“잘됐네. 사실 좀 궁상맞아 보였는데.”

“뭐?”

“헤헤! 농담이에요, 농담.”

“인석이…….”

“정말 잘됐어요. 정말…….”

방진보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초연운은 꿀밤을 때리려던 주먹을 슬며시 풀어 방진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운경은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다가 헛기침을 했다.

“흠흠!”

“아! 죄송해요. 제자 방진보가 장문인을 뵙습니다.”

그제야 방진보가 이곳이 운경의 거처임을 깨닫고 사과를 했다.

“괜찮다.”

“헤헤!”

“그동안 매화신단을 만드느라 고생 많이 했다. 덕분에 전 제자들이 매화신단을 한 알씩 지급받았다.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으마.”

“아니에요.”

방진보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멋쩍은 것이다.

운경은 그런 방진보를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방진보는 자신이 얼마나 엄청난 일을 했는지 모른다. 그는 화산파라는 거대한 문파의 전력을 무려 한 단계나 상승시켰다. 그가 없었다면 매화신단의 약력이 그렇게 비약적으로 상승하지 못했을 것이다.

화산파에 있어 방진보는 크나큰 은인이었다. 때문에 운경은 누구보다 방진보를 극진히 대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런데 무슨 일로 부르신 건가요?”

“아! 사실은 내가 부른 게 아니라, 초 소협이 너를 찾았다.”

“연운 형이요?”

방진보의 시선이 초연운을 향했다. 방진보의 얼굴엔 기대감이 어려 있었다. 심장이 자신도 모르게 두근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듯이 초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너무 오래 소화산에 처박혀 있었더니 갑갑하더구나. 그래서 세상에 나가 보려고.”

“진짜요?”

“그래! 몸도 회복되었고, 무공에도 이제 자신이 붙었거든.”

“형!”

“담호와 약속했다. 그가 믿고 뒤를 맡길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지기로. 이제 어느 정도 약속을 지킬 수 있을 것 같다.”

초연운은 별거 아닌 것처럼 담담히 말했지만, 그동안 그가 한 고련은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수련에 목숨을 걸었다.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수련은 그의 무력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켰다. 무엇보다 가장 큰 도움이 된 것은 바로 화산파에서 건네받은 매화신단이었다.

운경은 사람을 시켜 초연운에게도 매화신단을 보냈다.

이미 백척간두의 경지에 서 있던 초연운이었다. 한 걸음만 더 내디디면 또 다른 세상이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죽기보다 힘이 들었다.

그때 매화신단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본래는 화산파 제자에게만 주어지는 매화신단이었기에 잠시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고심 끝에 매화신단을 복용했다. 그리고 그의 앞을 가로막던 벽을 깨부쉈다.

“다 네 덕분이다.”

“아니에요. 신의 누나가 아니었으면 감히 매화신단을 연단할 수 없었을 거예요.”

“물론 그녀에게도 감사한다. 그녀에게도 따로 감사의 인사를 할 것이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어디로 가시려구요?”

“무림맹이 소림사로 퇴각했다고 들었다.”

“그럼 소림사로 가겠네요?”

“그래!”

초연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도 갈래요. 소림사.”

갑자기 방진보가 손을 번쩍 들었다.

무기력하기만 하던 그의 얼굴에 갑자기 생기가 감돌기 시작했다.

“진보야!”

“호 형을 만나려고 하는 거잖아요? 저도 보고 싶어요. 부탁이에요.”

“그것 때문에 너를 부른 것이다. 같이 가려고.”

“정말요?”

“그래! 다행히 장문인께서 허락하셨다.”

초연운의 말에 방진보가 운경을 바라봤다. 그러자 운경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한다는 의미였다.

“감사합니다, 장문인. 정말 감사합니다.”

방진보가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운경이 그런 방진보를 보며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심경은 무척이나 복잡했다.

‘이게 과연 옳은 결정인지 모르겠구나.’

방진보는 화산의 보물이었다. 생각 같아서는 안전한 화산에서 언제까지고 보호하고 싶었다. 하지만 매화신단을 모두 완성한 후 방진보는 목적의식을 잃어버리고 무기력해졌다.

방진보는 아직 어린 소년이었다.

누구보다 감정적일 나이였다. 그런 행동이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활력을 줄 새로운 자극이 필요했다.

그때 찾아온 이가 바로 초연운이었다. 초연운은 운경에게 방진보를 데리고 소림사에 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고심 끝에 운경은 허락했다.

방진보는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무력을 갖고 있었다. 무엇보다 초연운이 동행한다.

초연운이 함께한다면 믿을 수 있었다. 소화산에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지만, 지금 초연운에게서 느껴지는 기도는 실로 범상치 않았다. 운경의 심장이 두근거릴 만큼.

그것이 운경이 방진보가 세상에 나가는 것을 허락한 이유였다.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는 나무가 크게 자라지 못한다. 세상의 모진 풍파를 견디면서 나무는 단단해지고, 크게 자랄 힘을 얻지.’

운경은 방진보가 거목이 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날 방진보와 초연운은 화산을 내려왔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