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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50화 (35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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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0화 8장. 휘둘리며 살아갈 만큼 약하지 않다(4)

흉터로 뒤덮인 손이 걸레처럼 헤진 깃발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백전전승기(百戰全勝旗).

육신에 새겨진 상처만큼이나 많은 상흔을 간직한 깃발의 이름이었다. 이제는 깃발이라도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찢어지고, 헤진 깃발을 수천 번이나 기워서 겨우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조금만 힘주어 잡으면 ‘파삭’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질 것만 같은 깃발을 초연운은 애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전문이 남긴 유일한 유산이자 상징인 백전전승기였다.

‘백전전승기에 부끄럽지 않은 자가 되고자 했었는데…….’

초연운이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 삼 년을 돌이켜보면 악몽이었다.

미친 듯이 무공에 몰두했지만, 혼자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을 떨쳐 내기 어려웠다. 그래서 술기운에 의지해 몸을 혹사시키거나 수련했다.

그 결과 무공은 강해졌을지 몰랐지만 그의 마음은 무척이나 황폐해져 있었다. 만일 담호가 제때 찾아오지 않았다면 심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담호.’

그의 인생에서 단 한 명뿐인 친구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언제든지 내던질 수 있었다.

그때였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양손에 두 개의 그릇을 든 소년이 그의 앞으로 다가와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고민이 많겠지만, 그것도 드시면서 하세요. 여기요.”

소년이 들고 있던 그릇 하나를 불쑥 내밀었다.

초연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만든 거냐?”

“겨우 죽 만드는 건데요. 뭘 새삼스럽게 그래요?”

소년, 방진보가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그에 초연운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삼 년이란 시간 동안 방진보는 몰라보게 멋있어졌다. 몸무게가 줄어들면서 살에 파묻혔던 이목구비가 또렷하게 살아났다. 흔히 말하는 미남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쾌남이라 부를 정도는 되었다.

초연운도 방진보가 이렇게 변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래서 아직 적응이 되지 않는 것도 사실이었다.

방진보가 죽 그릇을 들고 초연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초연운도 수저를 들어 죽을 맛봤다.

있는 재료 가지고 뚝딱 만들어 낸 죽이었다.

대충 만든 것 같은데도 맛이 있었다.

‘이 녀석!’

초연운은 감탄을 금치 못했다.

예전에도 방진보의 요리 실력은 뛰어났었다. 하지만 지금은 단순히 뛰어나다는 표현만으로는 부족할 정도였다.

방진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면 심신이 안정됐다.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한 어미가 해 준 음식이 떠오를 정도였으니까.

‘진보도 삼 년 동안 엄청난 노력을 했구나.’

그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방진보를 바라봤다. 그러자 방진보가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런 눈으로 봐요?”

“그냥 대견해서.”

“뭐가요?”

“그냥! 그냥 넘어가, 인마!”

“쳇! 싱겁기는.”

방진보가 코웃음을 쳤다. 예전 같으면 발끈했을 초연운도 피식 웃었다.

그들이 현재 머물고 있는 곳은 하남성 동쪽의 서협(西峽)의 한 야산이었다. 서협은 섬서성과의 접경 지역으로 수로와 육로가 공존하는 교통의 요지였다. 소림사가 있는 등봉현과는 겨우 천여 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이었다.

마음만 먹으면 사나흘 정도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초연운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그때 방진보가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찮아요?”

“뭐가?”

“다리…….”

“난 또 뭐라고. 괜찮아.”

탕! 탕!

방진보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초연운이 다리를 손등으로 두드렸다. 그러자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쇠로 만든 의족이 울리는 소리였다.

“처음엔 좀 아프더니만 이젠 오히려 더 튼튼하고 좋아. 하하하!”

초연운이 큰 웃음을 터트렸다. 예전이라면 그런 초연운을 타박했을 방진보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안쓰러운 표정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멀쩡하던 다리를 잃고, 의족에 적응하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더군다나 초연운은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신체의 균형에 누구보다 민감한 무인이 쇠로 된 의족을 장착하고 예전의 무위를 되찾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연운이 그동안 얼마나 피땀을 흘렸을지 상상이 가서 쉽게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였다.

갑자기 초연운이 손을 뻗어 방진보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아야! 왜 그래요?”

“그런 눈으로 보지 마.”

“형?”

“난 괜찮으니까. 다리가 하나 없어도 난 무인이야. 취운룡이라고. 그러니까 그렇게 불쌍한 눈으로 보지 마.”

“미안해요, 형. 나는…….”

“네 마음 알아! 그래도 형을 믿어.”

“네!”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목청껏 대답했다.

‘그래! 믿으면 돼. 연운 형은 취운룡이야. 그 잘난 구무룡도 박살 낸 무인이야.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오히려 연운 형을 모욕하는 거야.’

방진보는 반성하고, 또 반성했다.

초연운은 그런 방진보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착한 놈!’

방진보는 그가 믿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래서 그와의 동행이 더욱 기꺼웠다.

초연운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제 소림사가 머지않았다.

초연운은 소림사에 가면 담호를 만날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조금만 기다리게, 친구. 이젠 내가 자네의 힘이 되어 주겠네.’

자신을 구하기 위해 불원천리 마다않고 달려왔던 유일한 친구, 이번엔 자신이 그에게 도움이 되기 위해 달려가는 길이었다.

***

무당산에는 일흔두 개의 큰 봉우리가 존재했다.

담호가 청허 진인을 따라 오르는 이름 모를 봉우리 역시 그중 하나였다.

무당파 정반대 방향에 있는 봉우리로 산세가 무척이나 험해 인적이 뜸한 곳이었다.

청허 진인은 무당파 제자들도 거의 찾아오지 않는 산봉우리로 담호를 안내하고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청허 진인의 뒤를 따랐다. 청허 진인은 그런 담호가 고마우면서도 부담스러웠다.

청허 진인의 얼굴엔 복잡한 속내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담호 단 한 명에 의해 무당파가 송두리째 박살 났다. 아무리 근래 들어 장문인과 사이가 벌어진 청허 진인이라지만, 그래도 사문인 무당파가 단 일인에 초토화가 된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단 일인의 존재감이 무당파를 뒤흔들고 있는 믿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휴우! 이런 자를 무영이 모함하려 했으니.’

그는 아직도 폐관수련을 하고 있는 무쌍검 진무영을 떠올렸다.

처음엔 진무영에게 분노했었지만, 지금은 그저 안타까운 마음뿐이었다.

진무영도 기재였다.

앞으로의 시대를 이끌어 갈 만한 천고의 기재. 하지만 하필이면 같은 시대에 담호가 존재했다.

담호는 이미 시대를 이끌어 가는 거인이었다.

다른 기재들과는 차원이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었다.

현 시대의 기재들에게 가장 큰 불행이라면 같은 시간대에 담호라는 존재가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휴! 현소 진인은 참으로 버거운 제자를 잘도 키워 냈구나.’

그는 담호를 제자로 둔 현소 진인이 부러우면서도 동정했다. 너무 존재감이 큰 제자를 보듬어 안는 것은 어떤 스승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기에.

복잡한 상념 속에서 청허 진인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가 담호를 데리고 도착한 곳은 마치 호리병처럼 절벽이 조그만 공터를 둥글게 둘러싼 지형이었다.

절벽의 밑쪽에는 작은 동혈이 일곱 개가 뚫려 있었다.

청허 진인이 담호를 보며 말했다.

“휴! 도착했네. 잠시만 기다리게나.”

담호는 대답 대신 주위를 둘러봤다.

공기가 유독 무겁게 느껴졌다. 마치 이곳만 공기가 멈춰 선 것 같았다.

담호를 뒤로하고 청허 진인이 공터 중앙으로 걸어갔다.

그가 내공을 돋워 외쳤다.

“사백, 사숙, 저 청허입니다. 중요한 손님을 모시고 왔습니다.”

“웬 피비린내가 이렇게 진동 하는가 싶더니, 어디서 도부(屠父)를 데려왔구나, 청허!”

청허 진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동혈 중 한 곳에서 막강한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흘러나와 절벽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고막에 울려 퍼지는 내공 실린 목소리에 청허 진인의 눈가가 살짝 찌푸려졌다. 호북제일검이라 불리는 청허 진인도 감당하기 쉽지 않을 정도로 목소리에 실린 내공은 심후했다.

“아까부터 혈향이 풍긴다더니.”

“지독한 혈향이구려. 도대체 몇 명이나 죽여야 이런 혈향을 풍길 수 있는 건지.”

“신성한 무당산에 이런 혈귀를 들이다니. 청허, 네가 정신이 있는 것이냐?”

다른 동굴에서도 각기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각각의 목소리가 어우러져 더욱 크게 증폭됐다.

뜻밖의 반응에 청허 진인의 안색이 싹 변했다. 그가 급히 동굴 안의 존재들에게 설명을 했다.

“그는 화산파의 제자인 권마 담호 소협입니다.”

“화산파의 제자라면 명문의 제자가 아니더냐? 그런 자가 저렇게 지독한 혈향을 풍긴다고?”

“거기엔 다 사정이 있습니다.”

“허! 장문인이 말할 때는 믿지 않았지만, 이렇게 직접 보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구나. 명문 정파인 화산파의 제자가 이런 살기를 풍기다니, 화산파도 갈 때까지 갔구나.”

동굴 안에서 흘러나온 탄식이 청허 진인의 목소리를 집어삼켰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청허 진인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동굴 안에 있는 이들은 바로 무당파의 전대 무인들이었다. 청허 진인에게는 사백, 사숙뻘의 무인들이었다. 때문에 청허 진인조차 극도로 공경의 예를 표할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무당의 살아 있는 전설이었고, 최후의 보루였다. 그들이 건재하기에 무당파는 마교가 연일 득세하고 있음에도 호북성과 무당파를 지킬 수 있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청허 진인이 그나마 마음의 부담을 덜 수 있었던 것 역시 이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들이 설마 담호에게 이렇게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할 줄은 말랐다.

“사백, 사숙, 잠시 제 말을 들어주십시오. 그는 우리의 적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림을 지킬 최후의 보루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화산파의 적통 제자입니다. 대놓고 적의를 드러내실 일이 아닙니다.”

“청허야! 내 이미 장문인에게 그에 대해 들었다. 강호의 질서를 흩뜨리는 마인이라더니, 과연 그 말이 틀림이 없구나. 놈의 숨결에 어린 혈향이 청정 무당산을 어지럽히고 있음이야.”

“그렇소이다, 사형! 벌써부터 내 머리가 다 지끈 아파 오고 있소.”

“청월은 도대체 무얼 하느라 저 마인을 막지 못하고 이곳으로 올려 보낸 것인지 알 수가 없소.”

우웅웅!

절벽 전체가 울림판이 되었기에 그들의 목소리는 더욱 엄청나게 증폭됐다.

그때였다.

쿠웅!

갑자기 담호가 발을 크게 굴렀다. 그러자 일대가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요란하게 흔들렸다.

순간 동혈 속에서 중구난방으로 흘러나오던 목소리가 뚝 끊기고 정적이 찾아왔다.

담호가 동혈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어둠에 잠식된 동혈은 인간의 시야로서는 꿰뚫어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하지만 천금마옥에서 어둠에 단련된 담호의 눈엔 안의 풍경이 대낮처럼 환히 보이고 있었다.

“입만 산 늙은이들.”

“…….”

“그렇게 떠들고 싶으면 밖으로 나와. 어둠은 너희들을 지켜 주지 못하니까.”

담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나직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가 동혈 속에서는 무섭게 증폭됐다.

쿠우우웅!

“큿!”

“이런!”

동혈 속에 있던 무당파의 전대 무인들이 기겁해 뛰쳐나왔다.

남청생 도복을 입고, 머리에는 새하얀 소요건을 질끈 동여맨 일곱 명의 노인들이었다. 온통 주름진 얼굴과 허옇게 센 머리카락이 그들의 나이를 도저히 짐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네놈이 감히 무당파의 존장을 업신여기는 것인가?”

“화산은 도대체 제자를 어떻게 가르친 것이냐?”

그들이 담호를 향해 노호성을 내뱉었다. 하지만 담호의 눈은 그들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청허 진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라는 거지?”

“이……분들은 무당파 최고 배분의 존장들입니다.”

“존장이라고?”

“그렇습니다. 본문의 가장 큰 정신적인 지주들입니다.”

“단순히 나이가 많다고 정신적인 지주인가?”

담호의 말에 청허 진인은 물론이고 무당파의 전대 무인들 안색이 싹 바뀌었다.

“이놈!”

“감히! 망발을 하다니.”

그들이 분노해 떠들 때였다.

그 순간 담호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누구 입부터 부숴 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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