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3
353화 1장. 세월이 모두를 현명하게 만들지는 않는다(3)
마침내 세 사람이 모두 그릇을 모두 비웠다.
여자인 경하진은 그나마 배가 찬 듯했지만, 남자인 서우종과 주진광은 아직도 배가 고픈 듯 빈 그릇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들도 체면이 있는지라 이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초연운이 그들에게 물었다.
“배는 좀 찼냐?”
“예! 감사합니다.”
“감사는 진보에게 해야지. 진보가 음식을 다 만들었으니까.”
초연운이 턱으로 방진보를 가리켰다.
방진보는 어느새 일어나 그들이 먹은 그릇을 정리하고 있었다.
“크음! 고맙다.”
“잘 먹었다.”
뒤늦게 두 사람이 방진보에게 감사의 뜻을 표했다.
“아니에요. 양이 좀 넉넉하면 좋았을 텐데. 좀 아쉽네요.”
방진보는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해했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이 경하진에겐 신선하게 보였다.
명성을 날리겠다는 일념으로 서우종과 주진광을 따라 길을 나섰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서우종과 주진광이 보인 모습은 그녀에겐 무척이나 실망스럽게 느껴졌었다.
두 사람 모두 말만 번드르르 할 뿐 노숙을 한 경험이 없어 고생만 했다. 그들은 모두 들은 것은 많은데,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에 비해 방진보는 음식도 잘하고, 싹싹해 보이니 색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 초연운이 세 사람에게 말했다.
“밤이 늦었으니 오늘은 여기서 자고, 날이 밝으면 각각의 문파로 되돌아가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저희는 반드시 소림사로 갈 겁니다.”
서우종과 주진광이 동시에 소리쳤다. 그에 초연운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희들 꼴을 봐라. 노숙할 줄도 모르면서 소림사에 가겠다고? 민폐 끼치지 말고 각각의 문파로 돌아가는 것이 좋아.”
“저희는 마교에 맞서 반드시 강호의 정의를 지킬 겁니다.”
“그렇습니다. 비록 저희가 강호초출이긴 하지만 의기만큼은 그 어떤 무인들에게도 뒤지지 않습니다.”
“주둥이만 살아 가지고.”
초연운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봤다. 그에 두 사람이 밥을 얻어먹었다는 사실도 잊고 울컥 화를 냈다.
“겨우 밥 한 끼 대접했다고 저희들의 의기를 폄하하진 마십시오.”
“그러는 대협은 뉘십니까?”
“참! 빨리도 물어본다.”
초연운이 손에 턱을 괴며 이죽거렸다. 그에 두 사람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희 같은 애송이들에게 알려 줄 이름은 없으니까 얼른 자리 잡고 자기나 해.”
“알려 주기 싫으면 마십시오. 저희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흥! 겨우 밥 한 그릇 주고선 생색은…….”
“두 분 진정하세요.”
보다 못한 경하진이 나서 그들을 말렸다.
“경 소저?”
“저분들 덕분에 겨우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잖아요. 그러면 예의를 지켜야죠.”
“크음!”
“음!”
두 사람이 그녀의 눈치를 봤다. 누가 봐도 그들이 경하진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모습이었다.
경하진이 초연운에게 고개를 숙였다.
“서 소협과 주 소협을 대신해 제가 사과할게요. 용서해 주세요.”
“경 소저라고 했나?”
“예!”
“아까 말한 것처럼 날이 밝으면 집으로 돌아가. 젊은 혈기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소림사의 상황은 녹록하지 않을 테니까.”
초연운은 진심을 담아 말했다.
이미 삼 년 전에 지옥을 경험했던 초연운이었다.
당시 싸움에서 가장 많이 죽은 이들은 나이가 들거나 노회한 무인들이 아닌, 눈앞에 있는 이들처럼 어린 무인들이었다.
혈기와 의기는 넘치지만 경험이 부족한 이들이 일선에서 제일 많이 죽어 나갔다. 그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에 초연운은 이들이 돌아가길 바랐다.
초연운의 진심 어린 충고에 경하진이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하지만 갈등은 오래가지 않았다.
“죄송해요. 비록 강호초출에 경험도 없지만 저희도 무인이잖아요. 강호의 위기 앞에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어요.”
“치기 어린 결심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죽을 수도 있다고.”
“대협은…… 언제 강호에 출두하셨나요?”
“응?”
“대협도 강호초출일 때부터 어른은 아니셨잖아요. 저희도 그래요. 비록 지금 당장은 경험이 없어서 위태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다 그렇게 성장하는 거잖아요. 그게 무인의 삶 아닌가요?”
경하진의 말에 초연운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오만한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말이다.
자신이 강호에 처음 나온 것도 바로 저들 나이 때였다. 그때 그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그랬던 그가 이제 어른이 되어 충고라는 명목 아래 어린 무인들에게 자신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었다.
저들의 결정이었다.
그에 따른 책임도 그들이 지는 것이다.
“휴!”
초연운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화산을 나온 이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리멍덩하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개인 느낌이었다.
소년 무인이 의기를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이 비록 치기 어린 영웅심에서 발로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지키는 것은 자신과 같은 기존의 무인이 할 일이었다.
“내가 아무래도 너무 오래 산속에 처박혀 있었나 보구나.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오만해졌는지. 그래, 그게 강호인이지. 칼끝 위에 목숨을 건 인생, 그에 나이의 많고 적음 따윈 문제가 되지 않지.”
초연운의 눈빛이 변했다.
어둠 속에서도 그의 눈이 찬연하게 빛났다. 그 모습을 정면에서 마주 본 경하진은 감히 크게 숨을 쉴 수 없었다.
“아!”
“내 이름은 초연운이다. 함께 가자, 소림으로.”
“취, 취운룡?”
경하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서우종과 주진광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삼 년 전 마교의 침공 때 장렬하게 산화했던 백전문의 신화를.
마지막 한 명까지 마교에 맞서 싸우던 그들의 용맹을.
그 중심에 초연운이 있었다.
취운룡이라 불리던 무인이.
삼 년의 공백을 뛰어넘어 그가 다시금 강호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담호가 무당의 산문을 나섰다.
마중 나온 이는 청허 진인과 연소하뿐이었다.
“고맙네.”
담호가 말없이 그를 바라봤다. 청허 진인의 얼굴엔 복잡한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전대 장로들과의 대화가 끝나자마자 담호는 바로 무당파를 나섰다. 아무리 좋게 대화를 끝냈어도 그들 사이에 쌓인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무당파에서 담호의 손에 부상을 당한 무인들만 부지기수였고, 군웅들 중에는 죽은 자들도 있었다. 그들은 담호가 같은 공간에 있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은 담호도 마찬가지였다.
원하는 결과를 얻어 냈지만, 무당파는 그가 있고 싶은 곳이 아니었다.
연소하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와 전대 장로들의 대화가 잘되었는지 그녀의 근신 역시 풀렸다. 하지만 그녀는 담호와 전대 장로들 사이에 어떤 대화가 오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청허 진인 역시 입을 꾹 다문 채 말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당파는 담호에게 하룻밤의 안락함도 제공해 주지 않았고, 담호도 바라지 않았다. 연소하는 그 사실이 못내 아쉬울 뿐이었다.
“부디 담 대협의 장도에 무운이 깃들길 바랄게요. 조심하세요.”
“조심하게. 자네와의 약속은 반드시 지켜질 테니 걱정하지 말게.”
담호는 고개를 끄덕인 후 흑귀에 올라탔다.
“가자!”
푸르르!
기다렸다는 듯이 흑귀가 거친 콧김을 뿜어내며 산길을 내달렸다.
순식간에 멀어지는 담호의 뒷모습을 보며 연소하가 중얼거렸다.
“가는군요.”
“그래! 가는구나.”
“그에게 마음 편히 쉴 날이 찾아올까요?”
“글쎄다!”
청허 진인이 붉게 충혈된 눈을 끔뻑거렸다.
그는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담호와 같은 자의 인생에 편한 날은 존재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좋든 싫든 그는 이미 강호의 중심이었다.
수많은 은원이 거미줄보다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살아 생 전 그가 은원의 거미줄에서 벗어나는 일은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진무대제께서 그의 앞길을 함께하길.”
그의 나직한 읊조림이 무당산에 흩어졌다.
무당산을 내려온 담호는 쉬지 않고 흑귀를 달렸다. 무당산이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담호는 조그만 개울가 앞에 흑귀를 멈춰 세웠다.
담호는 흑귀에서 내려 개울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차가운 물이 상처를 사정없이 후벼 파고 들어왔다.
군웅들을 상대하고, 또 무당파의 수많은 고수들을 상대했다. 상처 하나 없이 그들을 제압한다는 것은 담호에게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몸을 사려 가며 싸우는 것 역시 담호의 방식이 아니었다.
온몸을 내던져 싸우고 이겨 내는 것. 그것이 바로 담호의 독행류였다.
상처 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겨나고, 깊게 패인 상흔이 또 다른 상흔으로 덮였다. 그렇게 담호의 육체는 수많은 상흔으로 뒤덮였고, 그 모습은 갑옷을 방불케 했다.
상처로 이뤄진 갑옷은 담호가 걸어온 삶의 흔적이었고, 투쟁의 역사였다. 그 역사 위에 또다시 새로운 상흔이 새겨졌다.
담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는 개울 위로 퍼져 나갔다. 담호는 머리까지 개울에 담가 몸에 묻은 피를 깨끗이 씻어 냈다. 하지만 몸에 베인 혈향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담호 역시 혈향이 완전히 사라질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담호는 물 밖으로 걸어 나와 내공을 운용했다.
츠으으!
몸에 남아 있던 물기가 순식간에 증발되어 사라졌다.
“후!”
상처는 씻어 냈지만 고통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온몸이 해체되는 듯이 아프고 욱신거렸다. 그래도 담호는 고통스럽다는 표정 하나 짓지 않고 암혼심공을 계속해서 운공했다. 그러자 물고기의 아가미처럼 쫙 벌어져 있던 상처 위에 새로운 딱지가 생겨났다.
그제야 담호는 운공을 끝냈다.
온몸이 뜨겁고 가려웠다.
좋은 신호였다.
상처가 조금씩 낫고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푸르르!
그제야 흑귀가 다가와 담호의 얼굴에 뺨을 비볐다. 담호는 그런 흑귀의 목덜미를 가볍게 두들기며 말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자.”
흑귀가 담호의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이 뺨을 몇 번 더 비비고는 숲 속으로 들어갔다.
담호는 근처 커다란 나무 밑동에 등을 기대고 앉아 품을 뒤졌다. 그러자 말라 비틀어진 육포가 손에 잡혔다.
담호는 육포를 조금씩 씹으며 무당파에서의 일전을 떠올렸다.
온몸이 간질간질한 것은 비단 상처가 나으려 해서만은 아니었다. 당시의 열기가 아직도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담호가 남은 육포를 모조리 입안에 털어 넣은 후 주먹을 꽉 쥐었다.
쉬쉭!
담호는 허공을 향해 주먹을 가볍게 내질렀다. 하지만 그 여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공기가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터져 나간 것이다.
파성추였다.
충보와 더불어 독행류의 가장 기본이 되는 초식이었다.
이미 완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던 초식이었다.
강력한 위력을 갖고 있었고, 이제까지 파성추 하나로 수많은 적들을 쓰러트렸다. 그래서 담호가 가장 즐겨 쓰는 수법이기도 했다.
담호는 몇 번이나 반복해서 파성추를 펼쳤다.
퍼펑!
공기가 연신 터져 나갔다.
그것만으로 모자랐는지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그는 근처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앞으로 다가갔다.
예전 화산파, 현소 진인의 거처에 있던 그 바위와 비슷한 크기였다.
담호는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 바닥에 선을 똑바로 그었다.
일 장, 이 장…… 무려 오 장에 이르는 선이 바위 밑동에서 시작해 일직선으로 그어졌다.
담호는 바위 반대편, 선의 끝자락에 섰다.
‘우리 함께해 보자.’
그 옛날, 사부와 처음 무공을 만들던 그 시절이 떠올랐다.
이렇게 선을 똑바로 긋고 바위를 향해 똑바로 뛰던 애송이 시절이. 그 시절이 있었기에 지금의 담호가 존재할 수 있었고, 독행류가 완성될 수 있었다.
순간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한때 그런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화산파에서 삼 년의 고련을 통해 독행류를 완벽에 가깝게 만들었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사천성에서의 격전, 귀주성을 거쳐 무당파로 이어지는 수많은 전투 속에서 그는 아직 독행류가 완성이 되지 않았음을 느꼈다.
어쩌면 ‘완성’이라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 허상 속의 말일지도 몰랐다. 그래도 궁극을 추구하는 자라면 자신을 완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했다.
담호가 바위를 향해 뛰었다. 충보였다.
텅!
파성추가 바위에 작렬했다. 하지만 바위는 부서지지 않았다. 내공을 끌어 올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담호는 바위에 난 상흔과 바닥에 난 발자국을 유심히 보았다. 곰곰이 무언가를 생각하던 담호는 다시 처음의 시작점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또 충보와 파성추를 펼쳤다.
일만련(一萬練).
일만 번을 반복하고 단련하는 것.
지금 담호가 하고 있는 행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