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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1화 4장. 오랜만의 만남이 반갑기만 하다(2)
방진보는 소림사의 경내를 걸었다. 평소라면 고즈넉했어야 할 산사는 연일 밀려드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이래서야 제대로 소림사를 구경할 수 없겠구나.”
방진보가 한숨을 내쉬며 근처 바위에 앉았다.
비록 숙수의 길을 걷는다고 하지만 그 역시 무공을 익힌 무인이었다. 무인인 이상 소림사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소림사를 구경하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는 것이 나을 듯했다.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어?”
갑자기 낯익은 목소리가 방진보의 상념을 깨웠다.
“아, 누나?”
목소리의 주인은 바로 경하진이었다.
그래도 이곳까지 함께 오는 동안 많이 친해졌다. 경하진이 방진보보다 두 살이 많았기에 누나라고 불렀다.
“소림사를 구경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랬죠. 그런데 보다시피…….”
방진보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자 경하진이 알겠다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많이 복잡하지. 나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그러니까요.”
“그래도 다행이야. 덕분에 소림사가 복잡해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강호를 지키기 위해 나선 이들이 이렇게 많으니까.”
“그것도 그러네요.”
방진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생각을 바꿔 보면 지금 소림사에 들어온 사람들은 마교와 싸우기 위해 자발적으로 온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이 많다고 해서 투덜거릴 일이 아니었다.
“다른 형들은요?”
“아는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
“그래요? 그 형들이 아는 사람이 있어요?”
“그래 보여도 하남성의 명문가 소속이니까 아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지.”
“누나는요? 아는 사람 없어요?”
“있어.”
“그런데 왜 그들과 같이 있지 않고?”
“재미없어.”
“네?”
“그냥 재미없어. 이미 한 이야기를 계속 또 하거든.”
무인들 둘 이상만 모이면 하는 이야기라야 뻔했다. 마교를 성토하고, 어떻게 하면 강호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자신이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지 끼워 넣거나 무위를 자랑했다.
한두 번은 들어 줄 만하지만, 계속해서 듣다 보면 자연 짜증이 나기 마련이었다. 더구나 경하진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많은 무인들이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말을 부풀리거나 추근거렸다.
“그런 분위기는 별로야.”
“그렇군요.”
방진보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왠지 이해가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경하진의 미모에 반해 접근하려던 남자들을 수도 없이 봤다. 비록 그들은 경하진에게 접근하기 전에 서우종과 주진광 선에서 정리가 되었지만 말이다.
경하진이 부드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러자 삼단 같은 검은 머리가 폭포수처럼 늘어졌다.
“와!”
그 모습을 본 몇몇 무인들이 절로 감탄사를 터트렸을 정도였다. 그것은 방진보도 마찬가지였다.
“머릿결이 더 좋아진 것 같아.”
“예?”
“피부도 더 하얘졌고, 내공도 는 것 같아. 도대체 무슨 요술을 부린 거야?”
경하진이 방진보를 똑바로 바라봤다. 경하진의 말처럼 그녀의 미모는 한창 물이 올랐다. 스스로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방진보와 동행하면서 눈에 띄게 예뻐졌다. 무엇보다 내공이 늘었다.
방진보와 동행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운기조식을 한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수없이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바로 방진보의 음식이었다. 방진보가 만든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감돌던 활력과 여러 가지 징후를 떠올리면 거의 정확한 것 같았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네요.”
“말해 봐. 무슨 요술을 부린 거야?”
경하진이 방진보의 얼굴 앞으로 자신의 얼굴을 불쑥 내밀었다. 거의 코가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방진보의 얼굴이 홍시처럼 빨개졌다. 경하진의 숨결이 코끝에 느껴졌다.
“왜, 왜 그래요? 누나.”
“도대체 음식에 어떤 재주를 부린 거야?”
“그거야…….”
경하진의 달짝지근한 숨결이 방진보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너, 나중에 나랑 대정무관으로 함께 갈래? 너 정도라면 대정무관의 대숙수가 될 수 있을 거야. 그리고…….”
“…….”
경하진의 목소리기 더욱 은근해졌다. 그에 방진보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마치 얼굴에 불이 난 것처럼.
그때였다.
“진보야!”
갑자기 청아한 음성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다.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혼미해지던 방진보의 정신이 되돌아왔다. 급히 머리를 흔들며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보는 순간 방진보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아!”
“네가 왜 여기 있어?”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미소녀가 허리에 양손을 올린 채 방진보와 경하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소청!”
소녀는 바로 은가보의 무남독녀인 은소청이었다. 그녀는 눈에 쌍심지를 켠 채 방진보와 경하진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무림맹이 더부살이를 시작하면서 소림사는 수많은 물자와 식량을 빨아들이는 거대한 늪이 되었다. 천하의 수많은 상단들이 거래를 위해 소림사를 찾았고, 은가보 역시 그중 하나였다.
은소청은 수많은 물자를 싣고 소림사를 오르는 길이었다.
처음에 방진보가 경하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봤을 때는 착각인 줄 알았다. 그녀가 알기론 방진보는 화산파에 있어야 했으니까. 그래서 몇 번이나 눈을 부릅뜨고 확인했다. 그런데 바로 경하진이 방진보의 얼굴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미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속에서 화산이 폭발하는 것을 느꼈다. 가슴속에서 천불이 치솟고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지금도 그녀의 가슴은 미칠 듯이 뛰고 있었고, 알 수 없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방진보가 해맑은 표정으로 달려왔다.
“소청. 네가 어떻게 여기 있는 거야? 거래하러 온 거야?”
너무나 해맑은 방진보의 모습에 은소청은 그나마 이성이 돌아오는 것을 느꼈다.
방진보는 평생을 요리밖에 모르고 살아온 남자였다.
머리를 굴리고, 여색을 밝히는 이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은소청은 방진보에 대한 화를 삭였다.
“거래가 있어서 왔어. 그런데 너는 어쩐 일이야? 계속 화산파에 머문다고 하지 않았어?”
“연운 형이랑 같이 왔어. 혼자 보내려니 안심할 수 있어야지. 그래서 함께 왔어.”
“휴!”
방진보의 대답에 은소청이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누굴 걱정한단 거야? 이 바보야!’
혼자 온 게 아니란 사실에 적잖게 안심이 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이 풀린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음속엔 아직도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분노의 대상은 방진보가 아니었다. 바로 방진보에게 가증스러운 얼굴을 들이민 경하진이었다.
은소청의 분노 어린 눈빛을 받는 순간 경하진의 표정 역시 석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여인 사이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먼저 입을 연 이는 은소청이었다.
“그런데 그쪽은 누구시죠?”
“대정무관의 경하진이라고 해요. 그렇게 말하는 그쪽은요?”
“저는 은가보의 은소청이라고 해요.”
“아! 은가보.”
경하진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자신보다 겨우 두어 살 어려 보이는 소녀의 배경이 생각 이상으로 대단했기 때문이다.
“진보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죠?”
“어쩌다 보니 우연히 동행하게 되었어요. 그러는 그쪽은요?”
“호호! 저는 아주 오래전부터 진보와 친했어요. 비밀이 없는 사이라고나 할까? 지금까지도 그래 왔고, 앞으로도 쭉 그럴 거예요.”
은소청의 말에 경하진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은소청이 전하고자하는 바는 간단했다.
내가 오래전부터 진보와 알아 왔고, 굉장히 친밀한 사이다. 그러니까 알아서 꺼져라.
은소청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요 꼬맹이가!’
순간 경하진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녀가 방진보에게 고개를 그렇게 들이민 것은 반쯤은 장난에 가까운 행동이었다. 어쩔 줄 모르는 방진보의 모습이 귀엽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은소청이 나서서 그녀를 견제하자 이상하게 경쟁심과 오기가 들었다.
“지금까지 그랬다고 앞으로도 그러라는 법은 없죠. 동생은 너무 어려서 아직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군요.”
“동생이라고 하니까 저도 언니라고 부를게요. 나이 들었다고 세상일을 모두 아는 것은 아니죠. 언니!”
“나이가 들다니?”
“저보다 두어 살은 많아 보이니까요. 안 그런가요? 언니.”
은소청은 말끝마다 ‘언니’라고 붙였다. 무척이나 정중한 호칭이었지만 경하진의 귀에는 무척이나 거슬릴 수밖에 없었다.
경하진의 눈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은소청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그녀에게 은밀하게 속삭였다.
“호호! 진보를 좋아하나 보네. 동생.”
“언니는요?”
“나는 별로였는데, 동생의 태도를 보니까 이제라도 좋아하고 싶어지네.”
“그러지 않는 게 좋아요.”
“왜? 난 좋은데.”
경하진이 코웃음을 쳤다.
“누군가를 그렇게 장난 식으로 좋아하는 것이 아니니까요.”
“난 진심이야. 동생이 그렇게 나오니 더 욕심이 생겼어.”
경하진은 본래 욕심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까지 원했던 것은 모두 가졌다.
대정무관이 비록 구대문파에 속할 만큼 큰 곳은 아니지만 최소한 하남성 일대에서는 제법 위세를 떨쳤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미모를 칭찬했고, 수많은 무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서우종과 주진광이 애써 그녀와 동행하려한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은소청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하지만 경하진은 미처 그런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무엇보다 진보가 해 주는 음식은 정말……. 그는 대정무관에 어울리는 사람이 될 거야.”
“언니에게 어울리는 사람을 말하는 건가요?”
“글쎄…….”
경하진이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정체불명의 모호한 미소,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은 명확했다.
자존심 싸움이었다. 절대 물러설 수 없었다.
시작은 반쯤 장난이었지만, 이젠 자존심 때문이라도 물러설 수 없었다.
은소청의 입가에도 미소가 어렸다.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가.
“언니.”
“왜?”
“후회하게 될 거예요.”
“뭐라고?”
순간 경하진이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설마 은소청처럼 어린 소녀에게서 이런 말을 들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후회한다고? 내가?”
“네! 반드시요.”
“…….”
“언니는 잘 모르겠지만, 진보와 저에겐 아주 무서운 오라버니가 있어요.”
“그래서 그 오라버니로 나를 협박하겠다는 거야?”
“설마요? 저는 그렇게 질 나쁜 사람이 아니에요. 단지 제가 그 오라버니에게 한 가지 확실히 배운 것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예요.”
“그게 뭔데?”
“후환은 절대 남겨 두지 않는 것.”
“…….”
경하진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도저히 어린 소녀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폭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은소청이 환하게 웃었다.
“물론 그렇다고 무력을 쓰겠다는 것은 아니에요. 그럴 힘도 없으니까요.”
“…….”
그 순간 경하진은 갑작스러운 오한에 몸을 떨었다.
은소청은 그런 경하진을 잠시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한쪽에서는 방진보가 약간은 멍한 표정으로 그녀들을 바라봤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은 알겠는데, 왜 그런지 이유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 방진보의 모습에 은소청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자신이 누구 때문에 경하진과 신경전을 벌이는지도 모르고 저렇게 멍한 표정이라니?
‘바보!’
하지만 왠지 웃음이 났다.
저런 모습이 방진보의 매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은소청이 방진보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응!”
방진보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녀의 보드라운 손을 잡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경하진의 두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런 그녀를 향해 은소청이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