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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62화 (36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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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2화 4장. 오랜만의 만남이 반갑기만 하다(3)

이천(伊川)은 여남현과 등봉현 사이에 있는 조그만 도시였다. 담호와 해남파의 무인들이 짐을 푼 곳이기도 했다.

그들은 이천에 있는 조그만 객잔에 짐을 풀었다. 원래대로라면 이 시각에 소림사가 있는 등봉현에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늦어진 것은 바로 해남파 제자들의 집념 때문이었다.

진문중이 포문을 열었고, 노권의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그의 뒤를 이어 담호에게 덤벼들었다. 그리고 그 대가는 처절했다.

“허억! 허억! 나 죽을 것 같아.”

“난 온몸이 해체되는 기분이야.”

객잔에 들어오자마자 해남파의 무인들이 비명을 질렀다. 실제로도 그들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았다.

깨지고, 갈라지고, 피가 난 모습이 마치 전장에서 구르다 온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단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들 대다수는 크고 작은 내상을 입고 있었다. 그중 가장 큰 내상을 입은 자는 바로 처음 덤벼들었던 진문중이었다.

실제로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두 다리는 사시나무처럼 쉴 새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두 눈은 더욱 선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해소월이 그들에게 말했다.

“모두 고생했어. 어서 각자 방으로 가서 운공 해.”

“예! 사저.”

“사저도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해남파 제자들이 해소월에게 인사를 한 후 배정된 방으로 향했다. 그들은 계단을 올라가기 앞서 담호를 지나며 목례를 했다.

“감사합니다.”

“가르침 가슴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담호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담호는 묵묵히 그들을 바라봤다.

그들은 마지막 한 명까지 인사를 한 후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그제야 해소월이 담호에게 다가왔다.

“고마워요.”

“…….”

“쉽지 않은 일이었을 텐데 그렇게 신경을 써 줘서요.”

“별거 아니었어.”

“누군가에겐 별거 아닌 일이겠지만, 다른 이에겐 평생을 가도 얻지 못할 심득의 단초가 될 수 있는 일이에요. 감사해요.”

해소월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담호는 별 대답 없이 빈자리로 향했다.

화산파 제자가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이렇게 호의를 베푼 것은 그 역시 낯선 경험이었다.

담호는 자리에 앉아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직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객잔 안엔 빈자리가 많았다. 객잔 안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그들은 두려운 표정으로 담호와 해소월을 바라봤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 담호와 수많은 무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해소월은 일반 백성들에겐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커다란 두려움을 주었다.

몇몇 이들은 벌써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일어서고 있었다. 그에 해소월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는 강호 정의를 위해 싸운다고 생각하는데, 저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나 봐요.”

“…….”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는데.”

“호랑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아.”

“네?”

“그들에게 우리는 호랑이야. 커다란 어금니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호랑이가 헤치지 않는다고 말해 봐야 누구도 믿지 않아.”

“…….”

“실제로도 해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해소월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담호의 말이 마치 잘 벼려진 칼처럼 가슴을 후벼 팠기 때문이다.

“휴! 술 한잔하고 싶네요.”

내친 김에 해소월은 점소이에게 술 한 병을 주문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녀는 무척이나 지쳐 있었다. 비록 뜻하지 않게 담호와 동행하면서 잠시 활력을 얻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심신이 쳐져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점소이가 술을 가지고 오자 해소월이 잔에 가득 따랐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담호도 잔에 술을 채웠다.

“호랑이라…….”

해소월이 나직이 읊조리며 술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이상하게 술맛이 썼다.

담호도 말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창밖을 보자 이제 막 해가 지는 모습이 보였다. 해가 아슬아슬하게 걸린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기울어진 담호의 술잔에 붉은 하늘이 담겼다. 담호는 그 광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다 입에 털어 넣었다.

술맛이 썼다.

그때였다.

“거참 술을 맛없게 드시는군. 그렇게 마실 바에야 차라리 나에게 주는 것이 어떤가?”

갑자기 낯선 음성이 두 사람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그리고 지독한 악취가 후각을 자극했다.

냄새에 민감한 해소월이 미간을 찌푸리며 상대를 바라봤다.

그들에게 말을 건 이는 오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노인이었다. 봉두난발의 머리카락엔 흰머리가 듬성듬성 섞여 있었고, 얼굴에는 땟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언뜻 봐서는 평범하게 보였던 옷은 사실은 수많은 천 쪼가리를 이어 붙여 만든 것이었다.

‘거지?’

하지만 그보다 그녀를 더 놀라게 한 것은 바로 그의 허리에 차고 있는 줄이었다.

일곱 개의 매듭이 있는 줄. 언뜻 보면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는 집단이 강호에 존재했다.

매듭이 없으면 입문 제자, 하나면 일반 제자, 세 개면 분타주, 그리고 일곱 개면 장로가 되는 집단은 세상에서 오직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개방의 장로?”

해소월의 목소리가 절로 떨렸다. 그에 거지가 누런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호! 처자가 식견이 제법 넓은 모양이군. 맞네! 내가 바로 개방의 장로인 추결개(追抉丐)라고 하네. 뭐, 이름을 말해 줘 봐야 알지 못할 테니 추결개라고 부르면 되네.”

스스로를 추결개라고 밝힌 거지가 넉살 좋게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해소월이 급히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해남파의 해소월이 추결개 선배에게 인사드립니다.”

“역시 해남파였군. 반갑네! 여기서 구무룡 중 한 명을 보게 되다니 이 거지가 오늘 운이 무척 좋군.”

추결개의 시선이 해소월 반대편에 앉아 있는 담호를 향했다. 해소월이 그랬듯 담호 역시 스스로 신분을 밝힐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호는 추결개의 시선 따위엔 신경도 쓰지 않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에 추결개의 눈썹이 잠시 찌푸려졌다. 허나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담호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하하! 이 늙은이에게도 술 한잔 주지 않겠는가? 목이 컬컬하군.”

“…….”

하지만 담호는 그를 빤히 바라볼 뿐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에 민망해진 해소월이 급히 술잔을 건네주었다.

“여기요.”

“흠! 고맙네. 그런데 그쪽 형제는 말이 없군. 원래 조용한 편인가 보군.”

추결개의 얼굴엔 불편한 심기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는 단순한 거지가 아니었다. 무려 개방에 소속된 거지였다. 그것도 일곱 개의 매듭을 가진 장로였다.

거지라고 무시받을 위치도 아니었고, 개방 소속이라고 하면 구대문파에서도 쉽게 대하지 못했다.

강호에서 가장 많은 문도를 가진 방파(幇派), 그것이 바로 개방이었다. 비록 현재에 이르러서는 강호 활동을 거의 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 위상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 순간 담호가 고개를 들어 추결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으음!”

담호의 깊이 가라앉은 눈빛을 보는 순간 추결개가 자신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개방의 거지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는 추결개였다. 그만큼 수많은 이들을 만났고, 또 경험했다. 때문에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정확하다고 자부했다.

추결개는 그 사람의 얼굴, 그 눈빛만 보아도 삶의 궤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감각하기만 한 담호의 검은 눈동자를 본 순간 추결개는 그런 자신의 능력이 처음으로 저주스럽게 느껴졌다.

남들에게는 검게 보일지 모르지만, 추결개의 눈엔 담호의 눈이 붉게만 보였다.

담호의 등 뒤로 보이는 핏빛 하늘보다도 더.

수많은 시체의 산을 넘고, 피의 바다를 넘은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핏빛 향기를 담호는 가지고 있었다.

강호에 수많은 무인들이 존재하지만 그렇게 핏빛으로 이뤄진 삶의 궤적을 가진 남자는 단 한 명뿐이었다. 적어도 추결개가 알기로는 말이다.

그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자네는…… 권마군.”

“…….”

“거참! 소문보다 더하군. 제기랄!”

추결개가 술잔에 술을 가득 부어 들이켰다. 갑자기 목이 바싹 탔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술을 비운 추결개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포권을 취했다.

“정식으로 인사하겠네. 개방의 추결개일세. 내 결례를 용서해 주게.”

“담호.”

그제야 담호가 입을 열었다.

무례하게 볼 수도 있었지만, 추결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상대는 화산권마 담호였다.

그 앞에 있는 화산이라는 글자를 떼어 놓고도 천하를 울리는 무인이 바로 그였다.

그의 위명은 개방이라는 거대한 단체를 등에 업은 추결개에 결코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압도했다.

담호는 충분히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남자였다.

추결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범상치 않아 보이는 모습에 접근하긴 했지만, 설마 그 대상이 권마 담호일지는 몰랐다. 그래서 꽤나 당혹스러운 상태였다.

담호가 추결개를 빤히 바라봤다. 속내를 전혀 알 수 없는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지만 추결개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때 담호가 물었다.

“개방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인가?”

담호의 물음에 추결개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예전에는 구파일방(九派一幇)이라 불릴 정도로 성세가 대단했지만 마교의 일차 침공 때 개방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고 그동안은 대외 활동을 자제했다.

기반이 탄탄한 구대문파와 달리 개방은 방도는 많지만 무공의 고수가 그리 많지 않았다. 때문에 제대로 된 고수들을 키우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예전의 성세를 완전히 회복한 것은 아니었지만 워낙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어쩔 수 없이 활동을 재개한 것이다.

“그렇다네. 마교가 저리 득세를 하는데 언제까지 가만있을 수는 없으니까.”

“여력은 있고?”

담호의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에 추결개가 말문이 막혔는지 잠시 침묵을 했다. 담호는 그 모습을 빤히 바라봤고, 그 사이에서 해소월만이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휴! 혀에 비수를 달고 있나? 아주 가슴을 후벼 파는구만. 솔직히 말하겠네. 개방은 아직도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지 못했네. 일차 정마대전 당시 너무 많은 고수들이 죽었네. 때문에 많은 무공이 사장되었고, 비전이 단절됐지. 지난 수십 년 동안 사장된 무공들을 살리려고 부단히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지. 허나 요 몇 년 전에 기연이 있어 사장되었던 무공들을 되살렸고, 적잖은 고수들을 양성할 수 있었네. 그래서 단언할 수 있네. 본방은 충분히 여력이 된다네.”

“…….”

“이제 술 한잔 더 얻어먹을 수 있겠는가? 말을 너무 많이 했더니 목이 타는구만.”

추결개가 담호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담호는 잠시 그의 손을 빤히 바라보다가 술을 따라 주었다. 그 모습에 해소월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크! 살다 보니 천하의 권마가 따라 주는 술도 마시게 되는군. 영광일세.”

추결개가 단숨에 술을 들이켰다. 담호도 말없이 술잔을 들었다. 그렇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는 계속되었고, 객잔 안에 있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아무리 무림과 연관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권마’라는 두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개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야 많이 위축되었다고 하지만 세상에 거지가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권마와 개방 장로가 대작하는 자리를 본다는 것은 그들에게도 큰 영광이었다.

추결개는 연거푸 석 잔을 더 들이켜고 난 후에야 입을 열었다.

“생각해 보면 참 큰 행운이었네. 정마대전 당시에 죽은 것으로 알고 있던 태상장로께서 귀환하신 것이. 그분 돌아오신 덕분에 당시에 소실된 무공들을 되살릴 수 있었으니까.”

“태상장로?”

“금마신개(禁魔神丐)라고 하네. 본방 최고의 어르신이지.”

“그가 언제 돌아왔지?”

“이 년 전이네. 그때는 정말 깜짝 놀랐지. 죽은 줄 알았던 분이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오셨으니까.”

“그가 정말 금마신개가 확실한가?”

“지금 본방의 최고 어른을 의심하는 건가?”

갑자기 추결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다른 이도 아닌 개방의 장로가 목소리를 높이니 장내의 공기가 급속히 식었다. 하지만 추결개의 정면에 앉아 있는 담호의 표정엔 한 점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여전히 추결개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이 부담스러웠기에 추결개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제기랄! 무슨 눈빛이…….’

눈빛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진짜 어지간한 사람은 담호의 눈빛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멈출 것 같았다.

“그냥 묻는 거야. 뭐가 문제지?”

“크, 크흠!”

“정말 그가 금마신개가 맞는 건가?”

“그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네.”

“그렇단 말이지?”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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