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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7화 6장.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2)
담호가 고개를 들자 커다란 산이 보였다.
흔히들 말하는 숭산이었다. 중원 오악 중 하나이자 소림사가 자리를 잡고 있는 불문의 성지였다.
동쪽의 태실산, 중앙의 준극산, 서쪽의 소실산, 이 셋을 합쳐 숭산이라고 부르는데, 소림사는 서쪽의 소실산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소실산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유달리 무인들이 많이 보이는 산길을 오르기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강호의 태산북두라는 명성 때문에 소림사엔 원래 향화객이 많이 찾았다. 거기에 최근의 겁난까지 겹쳐져 무림맹이 피난 오면서 소림사는 무인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워낙 많은 무인들이 모이다 보니 사건 사고도 많았고, 곳곳에서 충돌도 많이 일어났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힘을 숭상하는 무인들의 특성상 비무나 충돌을 통해 자신의 무력과 위치를 확인하고자 했다.
그래도 최근에는 질서가 많이 잡힌 편이었다. 초반에 비하면 사건 사고라 할 만한 일이 거의 발생하지 않았다. 무림맹이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다는 증거였다.
숭산은 수많은 물줄기가 합쳐져 하나로 어우러지는 커다란 호수나 마찬가지였다. 수면 아래는 어떨지 모르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이는 곳만큼은 평온하기 그지없었다.
그렇게 고요하던 호수에 격랑이 일기 시작했다.
맨 처음 격랑을 감지한 이는 바로 산문을 지키던 달마전의 무승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숭산을 오르는 일단의 무리들이 보였다. 무척이나 먼 길을 온 듯 머리와 어깨에 짙은 먼지가 쌓인 이십여 명의 무인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그들을 봤다. 하루에도 수많은 무인들이 들어오다 보니 이젠 그 정도 수로는 무승들의 관심을 끌 수는 없었다.
무승들은 또 어느 문파에서 지원 병력을 보냈거니 하고 단순하게 생각했다. 그런데 무인들이 가까이 다가올수록 그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산문을 향해 다가오는 무인들의 몸에서 범상치 않은 기세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나하나가 잘 벼려진 검처럼 날카로운 기세를 발산하는 이들이 평범한 무인일 리 없었다.
그제야 사태를 파악한 소림사의 일대제자인 설천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설천의 눈이 크게 떠졌다.
산문을 향해 다가오는 무인들 선두에 서 있는 남자 때문이었다.
그는 칠흑처럼 검은 머리칼과 흑빛 장포를 입고 있었다. 여러모로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천이 주목한 것은 그런 외향 때문이 아니었다.
양쪽 어깨가 차이 나는 엇박자의 걸음걸이, 남자는 한쪽 발을 절고 있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무인들이 소림사의 산문을 통과했지만, 이렇게 극명한 특징을 가진 무인은 없었다. 하지만 설천은 그런 무인을 알고 있었다.
그는 천하에서 가장 유명하고 포악했다.
“궈, 권마?”
순간 미동도 없이 서 있던 달마전 무승들이 눈에 띄게 동요했다.
“으음!”
“아미타불!”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선두에 선 검은 남자를 향했다.
그 순간에도 그는 한쪽 발을 끌며 산문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모습이 확대될수록 달마전의 무승들 얼굴엔 절로 긴장감이 어렸다.
그는 어떤 적의도 내비치지 않고, 살기를 발산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고동치고, 전신의 근육이 긴장이 됐다.
‘권마!’
‘정말 그구나.’
그들이 절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들에겐 소림사, 그중에서도 달마전 소속의 무승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은연중 다른 문파의 무인들을 눈 아래로 내려다보는 습성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지척까지 접근한 남자에게서 흘러나오는 강렬한 혈향은 그들의 자부심을 송두리째 날려 버리기 충분했다.
그는 바로 담호였다.
그의 뒤를 따르고 있는 이들은 해소월을 비롯한 해남파의 무인들이었다.
담호와 동행하고 무공을 겨루다 보니 어느새 그들 역시 거친 기파를 발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남파의 무인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미타불! 시, 신분을 밝혀 주십시오.”
설천이 급히 그들에게 물었다.
순간 담호가 걸음을 멈춰선 채 설천을 빤히 바라봤다. 그의 눈빛을 받는 순간 설천은 심신이 급격히 위축됨을 느꼈다.
평생을 청정 불문에서 지내 온 설천에게 담호가 풍기는 혈향은 감당하기 힘든 압박감을 주고 있었다.
거기다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시선까지 더해지니 설천은 감히 그를 마주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설천은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써야 했다. 그제야 왜 수많은 무인들이 권마를 두려워하는지 실감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들과 달랐다.
같은 인간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그가 풍기는 기세와 분위기는 이질적이었다.
그때 담호가 입을 열었다.
“담호.”
“화, 화산권마 담호 대협 맞습니까?”
“맞아!”
“소림사엔 왜 오신 겁니까?”
설천은 무의식 중에 질문을 던져 놓고 후회했다.
담호뿐 아니라 다른 무인들이 이곳에 올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바로 마교와 싸우는 것.
그게 아니라면 굳이 소림사로 올 이유가 없었다.
담호가 고개를 삐딱하게 한 채 물었다.
“몰라서 묻는 거야?”
“아, 아닙니다.”
설천이 자신도 모르게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일단 한번 위축이 되자 쉽게 기를 펼 수 없었다. 영혼까지 짓눌리는 이 느낌은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었다.
설천은 급히 담호에게서 시선을 돌려 해남파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그쪽은?”
“우린 해남파에서 왔어요. 제 이름은 해소월이에요.”
“헛! 해중화 해소저시군요. 해남파의 소림사 방문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환대해 주셔서 감사해요.”
해소월이 포권을 취하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해남파가 이리 합류해 주셨으니 저희가 감사해야지요.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안에 보고를 하고 거처를 마련해 드리겠습니다.”
“고마워요.”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설천은 급히 무승 한 명을 불러 담호와 해소월 등이 왔음을 알리게 했다.
그는 뒤이어 담호를 바라봤다.
“담 대협도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하겠습니다.”
“…….”
담호는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그 모습이 설천의 가슴을 더 무겁게 압박했다.
담호는 마치 석상처럼 우두커니 서서 미동도 없었다. 그의 뒤에 포진한 해남파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해남파의 무인들은 담호와 비무를 하면서 많은 깨달음을 얻었다. 그들은 진심으로 담호를 존경했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담호를 닮고자 노력했다.
지금 보이는 모습도 그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들은 담호 뒤에 선 채 산문을 통과해도 좋다는 허락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고, 그사이 담호가 왔다는 소식을 들은 무인들이 산문으로 내려와 인산인해를 이뤘다.
“저자가 권마?”
“과연 듣던 대로 냉혹하게 생겼군.”
“저 눈빛 좀 봐. 눈빛만으로 사람을 난도질할 것 같지 않나?”
“권마가 합류하다니? 정말 믿을 수 없군.”
수많은 사람들이 떠들다 보니 산문은 금세 웅성거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소림사가 숭산에 자리 잡은 이래 한 명의 무인 때문에 이렇게 시끄러웠던 적은 일찍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수많은 이들의 시선이 부담스러울 만도 하건만 담호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는 마치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듯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커질수록 해소월과 해남파 무인들의 긴장감 또한 증폭됐다. 지난 며칠간 동행하면서 그들은 담호라는 인간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됐다.
보통 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군중이 모여 있으면 조금이나마 심신이 위축되기 마련이었다. 사람인 이상 외부의 시선에서 아주 자유로울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담호는 달랐다.
담호는 가슴속 깊은 곳에 커다란 기둥을 세웠다. 그 기둥은 너무나 크고 단단해 외부의 폭풍에 흔들리지 않았다.
그 기둥이 담호의 심지였다. 이 정도의 속삭임과 소요로는 담호의 심지를 흔들 수 없었다.
그사이에도 담호를 보고자 내려오는 사람들은 늘어났다.
그때였다.
“방장님이 내려오십니다.”
산 위쪽에서 들려온 승려의 목소리가 중구난방으로 떠들던 군웅들을 침묵하게 만들었다.
이제까지 수많은 무인들이 소림사의 산문으로 들어왔지만 방장이 마중 나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만큼 엄청난 파격이었기에 군웅들은 놀라면서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당금 강호에서 권마가 차지하는 위치였다.
힘이 지배하는 강호의 법칙이라면 담호는 그 최상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소림사의 방장도 감히 무시할 수 없을 만큼 높은 자리에.
잠시 후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이 나한전주 광문과 계지원주인 광진 등의 호위를 받으며 나타났다.
소림사 수뇌부의 등장에 군웅들이 고개를 숙이며 분분히 비켜섰다. 그렇게 열린 길로 광천 등이 걸어왔다.
“아미타불! 오랜만이오, 담 시주.”
광천이 담호를 단숨에 알아봤다.
일전에도 이미 얼굴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당시 담호는 무량신승을 만나기 위해 소림사에 왔었다.
담호와 대화 후 무량신승은 열반에 들었고, 광천을 비롯한 수뇌부들은 다비식을 치르느라 담호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못내 아쉽게 여겼던 광천이었기에 담호가 왔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 나왔다.
“한 삼 년 만이지 싶소이다. 이렇게 다시 뵙게 되어 영광이외다.”
광천이 먼저 담호에게 아는 척을 하는 모습은 군웅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아는 소림사의 방장은 타인의 인사를 받는 사람이지, 먼저 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저 정도라니.”
“역시 권마라고 해야 하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또 웅성거렸다. 그만큼 그들의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오랜만이야.”
“허허! 그동안 담 시주의 기도가 더 헌앙해진 것 같소. 무림의 흥복이 아닐 수가 없소.”
광천이 진정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의 치켜세움에도 담호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그에 광천의 곁에 있던 광문과 광진이 울컥했다.
“저자가!”
“예의를 갖춰라.”
다른 이도 아닌 소림의 방장이 얕보이는 것은 죽어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손을 쓸 기색이었다. 하지만 광천이 손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괜찮네.”
“하지만 방장, 그는 소림을 모욕했습니다.”
계지원주인 광문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예전부터 담호를 곱지 않은 눈으로 봤었기에 더욱 발끈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담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무리 강호에서 명성이 대단하면 무얼 하는가? 인성이 덜되었는데. 먼저 인간이 되시게나.”
내공이 실린 목소리가 산문 일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소림사의 규율을 담당하는 계지원의 원주답게 그의 공력은 실로 막강했다.
순간 광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중하게, 사제. 지금 사제의 행동은 나와 소림사를 욕보이는 것일세.”
“바, 방장 사형?”
광천이 이렇게 나오자 광문이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괜찮은데 자네가 왜 목소리를 높이는가?”
“하지만 사형의 체신이…….”
“강호의 위기 앞에 체신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이 정도로 체신이 상할 만큼 소림의 이름이 부실했던가? 오히려 자네의 대응이 소림의 체신을 상하게 하는 것일세.”
“죄……송합니다.”
광천의 통렬한 꾸짖음에 광문은 사과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납득한 얼굴은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분노가 어린 시선으로 담호를 노려봤다.
그런 광문의 모습에 광천이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아끼는 사제는 너무나 고지식했다. 그에겐 소림이란 이름이 무엇보다 소중했고, 모든 것의 우선이었다. 그렇다 보니 조그만 모욕에도 참지 못했다.
광천이 담호에게 고개를 숙였다.
“미안하오, 담 시주. 사제의 성급함을 부디 용서해 주시구려.”
이렇게 되자 광문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잘못 때문에 하늘 같은 방장 사형이 담호에게 사과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담호는 광천을 빤히 바라봤다.
이것으로 광천의 그릇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었다. 확실히 그는 소림의 방장이란 직책에 어울리는 도량을 갖고 있었다. 실제 능력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무림맹의 맹주 남천산 대협이다.”
“군사인 남궁 대협도 함께 오고 있어.”
갑자기 위쪽에서부터 소요가 일어나며 군웅들이 양쪽으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들 사이로 무림맹의 수뇌부가 나타났다.
맹주 남천산을 선두로 군사 남궁창 등이 그 뒤를 따르고 있었다.
‘권마!’
남천산 뒤를 따르고 있는 남궁창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경직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