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368화 (368/500)

 368

368화 6장. 만날 사람은 만나게 된다(3)

지금 남궁창의 눈빛을 정의한다면 ‘차가운 분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꾹꾹 눌러 참으며 최대한 차분한 눈빛을 보이려 애를 썼다.

남궁창은 담호와 씻을 수 없는 원한을 지고 있었다. 담호 단 한 명 때문에 남궁세가가 입은 피해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주의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고, 전력이 약화되어 더 이상 오대세가의 수장이라고 자처할 수 없을 정도였다.

지금도 남궁세가는 문을 걸어 잠근 채 피해를 회복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지만, 예전의 성세를 회복하려면 얼마나 더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할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나마 남궁창이 무림맹의 자금을 은밀히 빼돌려 지원했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더욱 나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남궁창은 무림맹의 군사이기 전에 남궁세가의 구성원이었다. 비록 남궁세가 내에서 올라갈 수 있는 한계가 뚜렷해 무림맹으로 전향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남궁세가의 구성원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남궁창은 무림맹의 군사라는 직위를 이용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지원을 했다. 그 덕에 남궁세가는 빠른 속도로 상처를 치유하고 있었다. 그래도 담호에 대한 원한은 사그라들 줄 몰랐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자리에서 담호를 뼈째 씹어 먹고 싶었다. 하지만 무림맹의 군사라는 직위로 겁박하기엔 담호의 존재감이 너무 거대했다.

담호는 그의 한마디에 겁을 집어먹고 재물을 갖다 바치는 상인도 아니었고, 그의 명령을 듣는 일개 무인도 아니었다.

그 존재감만으로도 중원의 거대 문파에 맞먹는 절대의 무인이었다. 근 백 년 내 그보다 더 주목을 받았던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남궁창이 아무리 무림맹의 군사로 거대한 권력을 휘두른다고 하지만 뚜렷한 명분도 없이 담호를 핍박할 수는 없었다.

소림사의 방장이 직접 마중 나온 것도 모자라 무림맹의 맹주까지 발걸음을 했다. 강호 최고의 권력자들이 담호를 자신들과 동등한 상대로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미 담호는 그의 손을 훨훨 벗어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더 분했다. 가문의 원수인 담호를 눈앞에 두고 보면서도 가만히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말이다.

남궁창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그래! 참자. 참다 보면 기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내 이제껏 인내하면서 이 자리에 올라왔는데 그것 하나 참지 못할까?’

오래 곱씹은 원한일수록 복수할 때는 더욱 달콤한 법이었다. 남궁창은 그렇게 생각하며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그 순간 남천산이 앞으로 나섰다.

“어서 오시오, 담 대협. 무림맹주인 남천산이라고 하오. 담 대협이 합류한다는 소식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르오. 이렇게 담 대협이 기꺼이 무림맹에 합류하겠다고 오니 내 얼마나 든든한지 모른다오. 하하하!”

남천산이 진정으로 기쁘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담호가 가지는 전략적인 가치를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담호의 합류는 비단 그 한 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사문인 화산파가 합류할 것이며, 담호를 존경하는 수많은 낭인들의 합류를 이끌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담호의 합류로 얻어 낼 수 있는 이득은 그것 말고도 수십 가지가 넘었다. 남천산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호박이 넝쿨째 굴러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쌍수를 들어 담호를 환영했다. 그야말로 간이고, 쓸개고 할 것 없이 다 내줄 표정이었다. 그에 남궁창의 표정이 돌을 씹은 것처럼 구겨졌다.

“원하는 자리가 있으면 기탄없이 말하시구려. 내 어떤 자리라도 내주겠소. 총사(總士)직은 어떻소? 무림맹의 전 병력을 움직일 권한을 가지며, 오직 맹주 한 명에게 보고할 의무가 있으니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을 것이오.”

남천산의 파격적인 제안에 무림맹의 수뇌부들이 입을 떡 벌렸다. 그만큼 총사직이 무림맹에서 갖는 영향력이 엄청났기 때문이다. 권한은 막대하지만 구속은 거의 받지 않으니 이보다 더 좋은 제안이 있을까 싶었다.

그들은 담호가 망설이지 않고 허락할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파격적인 제안이었고,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산문에 모인 군웅들의 시선이 담호에게 모아졌다. 그가 과연 어떤 대답을 할지 기대된다는 얼굴이었다.

모두의 주목 속에 마침내 담호가 입을 열었다.

“비켜!”

“…….”

남천산이 눈을 끔뻑거렸다.

너무 강한 충격은 때론 이성을 마비시키기도 했다. 지금 남천산의 경우가 그랬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충격적인 말이 그가 정상적인 사고를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가 떠듬떠듬 말했다.

“자네…… 지금 무슨 말을?”

“내 앞을 막고 있잖아.”

“제정신인가?”

순간 담호가 고개를 들어 남천산을 바라봤다.

담호의 새까만 눈동자를 마주 본 순간 남천산은 전신에 소름이 오싹 돋는 것을 느끼고는 진저리를 쳤다.

‘이 녀석?’

담호의 새까만 눈동자 안에 무언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것이 살의라는 것을 알아보는 덴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담호의 살의가 도저히 같은 인간의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이나 괴물에 가까운…… 그런 살의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남천산은 강호에서 오랜 세월 잔뼈가 굵은 노강호였다. 신창(神槍)이라는 별호를 얻을 정도로 강대한 무공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때문에 담대한 마음만큼은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하지만 담호의 눈빛을 보는 순간 그런 자부심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심장이 쪼그라드는 것 같은 위기감을 느꼈다.

담호가 지척에서 내뿜는 날것 그대로의 숨결이 느껴졌다. 마치 먹이를 갓 잡아먹은 짐승의 숨결처럼 역한 노린내가 배어 있었다. 이렇게 역한 느낌은 난생처음이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이를 드러낸 채 그의 눈앞에 서 있는 것 같았다. 담호의 살의가 진짜라는 증거였다.

부르르!

몸이 떨렸다.

그것이 공포 때문인지, 아니면 분노 때문인지는 스스로도 구별할 수 없었다.

문제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무인들이 지금 그를 보고 있었다.

소림사와 무림맹 소속뿐 아니라 그 외에도 수많은 무인들이 그의 대응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이 무슨 개 같은 상황이…….’

이대로 비키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담호와 충돌하게 된다. 담호의 눈에 어린 살기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반대로 그의 말대로 비켜서면 그의 체면이 크게 손상된다.

그는 본래 그런 외적인 부분에 크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무림맹의 맹주가 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맹주가 영도자로서의 무게를 잃어버리게 되면 많은 이들이 그를 우습게 보게 된다. 남천산만의 세력이 확고하지 않은 지금 그에게 심각한 위협이었다.

남천산은 그야말로 막다른 골목에 몰린 상황이었다. 그에게 퇴로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겐 막대한 부담이 될 뿐이었다.

남천산의 하얀 수염이 푸들푸들 떨리고, 두 눈에 붉은 핏발이 섰다.

“진짜 이렇게 나올 건가? 정 이렇게 나오면 나도 가만있지 않을 걸세.”

결국 남천산은 자신의 체면을 지키는 것을 택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무림맹의 맹주가 타인의 겁박에 의해 물러나서는 안 됐다.

그는 진심으로 담호와 맞서 싸울 생각을 했다. 어쩌다 상황이 이렇게 된 건지 모르지만, 그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때 그에게 한 줄기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멈추시오, 담 시주.”

소림사의 방장인 광천이 드디어 개입한 것이다.

인자한 표정과 호의적인 시선은 사라지고, 곤혹스러운 표정과 의심의 눈길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는 대체 담호가 왜 이런 난리를 피우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무슨 이유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담호가 마냥 날뛰도록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비록 소림사에 더부살이를 하는 입장이었지만, 어쨌거나 남천산은 무림맹의 맹주였다. 그의 체면이 떨어지면 무림맹의 사기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광천은 그런 상황을 방관할 수 없었다.

“담 시주, 무슨 노여운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잠시 고정하시고 대화로 풉시다. 그것이 순리 아니겠소?”

“남궁창.”

“군사 말이오? 그분을 왜?”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그를 죽일 거야.”

담호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산문에 울려 퍼졌다. 그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나직했지만 산문에 모인 무인들 중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거대한 짐승이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역한 비린내와 전율이 느껴졌다. 무인들은 그 소름끼치는 살기에 진저리를 쳤다.

청천벽력 같은 담호의 선언에 광천은 물론이고 남천산까지 경악했다. 아니, 이 자리에 있는 모든 무인들이 몸을 떨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이는 바로 당사자인 남궁창이었다. 설마 이렇게 많은 군웅들이 모인 자리에서 담호가 자신을 정확히 지목해 죽일 거라고 선언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저, 저 미친놈!’

이미 미친놈인 것을 알고 있었다. 독불장군처럼 거대 문파와 부딪치고 드잡이질 하는 인간이 정상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이 정도로 융통성이 없이 외골수일 줄은 몰랐다.

모두가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담호의 시선은 남궁창 단 한 명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다른 이들의 반응이나 감정 따윈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수많은 시간을 소요하고, 먼 길을 돌아 마침내 이 자리에 섰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남궁창이 있는 이 공간에.

광천과 남천산의 표정이 더욱 딱딱하게 굳었다.

“아미타불! 그것은 안 될 말이오.”

“그렇소! 남궁 군사는 무림맹의 중추이외다. 그가 없이 마교와 효율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은 불가능하오.”

그들이 담호의 앞을 막아섰다.

순간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새까만 눈동자에 스산한 기운이 감돌자 산문에 모여 있는 군웅들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그제야 군웅들은 담호가 진심임을 깨달았다.

‘미친!’

‘제정신이야? 소림사와 무림맹이 있는 곳에서 무림맹의 군사를 죽이겠다고 선언하다니!’

그들은 담호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 외골수에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렇게 무모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그때 남궁창이 앞으로 나섰다.

잠깐 동안 그는 원래의 태연한 신색을 회복하고 있었다.

분명 담호의 느닷없는 선언에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이곳이 소림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소림사의 고승들에 무림맹의 수뇌부, 그리고 수많은 군웅들이 그의 든든한 방벽이 되어 주고 있었다.

자신이 담호를 두려워할 이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하하! 이거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소이다. 담 대협. 무엇 때문에 그리 분노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오해가 있다면 대화로 풀어야지요. 이 남궁 모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무릎 꿇고 용서를 빌 테니.”

남궁창은 대협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그가 이렇게 나오자 많은 군웅들이 탄복한 표정을 지었다. 여러모로 담호의 성급한 모습과 비교가 되었기 때문이다.

담호는 남궁창을 빤히 바라봤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남궁창이 몸을 움찔 떨었다. 하지만 자신의 지위와 이곳에 있는 수많은 이들을 믿었기에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오해?”

“강호를 살아가다 보면 때론 오해도 하고, 의견의 충돌도 하게 되지요. 허나 그렇다고 문제 해결을 주먹으로만 해서 되겠소이까? 내가 잘못한 것을 이야기해 주십시오. 담 대협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도록 고칠 테니까.”

남궁창이 이렇게 나오자 남천산이 쾌재를 부르며 합세했다.

“그렇소! 담 대협. 대화로 풉시다. 모든 은원은 마교와의 대전이 끝난 후에 풀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어쨌거나 가장 중요한 것은 마교로부터 강호를 지키는 것이지, 사소한 은원이 아니잖소. 담 대협은 이미 강호의 대협으로 명성이 자자한 바, 대협으로서의 풍모를 보여 주셨으면 좋겠소이다.”

남천산도 이렇게 나서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남궁세가를 등에 업은 남궁창과 명문가에서 파견된 무인들은 맹주인 자신을 허수아비로 활용하고자 했고, 실제로 초기엔 허수아비 노릇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동안 그는 꾸준히 무림맹 내에서 자신의 세력을 늘렸고, 천도왕 적경천을 영입함으로써 남궁창이나 다른 명문에서 파견된 무인들에 뒤지지 않는 세력을 형성하게 되었다.

때문에 마음 같아서는 남궁창을 내치고 싶었지만, 역설적이게도 아직은 남궁창이 있어야 했다. 마교를 상대하려면 남궁창의 뛰어난 두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남궁창은 양날의 검이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가 필요한 것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남천산은 담호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광천에 이어 남천산까지 남궁창을 옹호하자 장내의 분위기는 완전히 그쪽으로 넘어갔다. 군웅들은 이 소란을 일으킨 담호를 마뜩지 않은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연못을 흐린다더니, 딱 그 격이군.”

“그러게 말일세. 잘 익은 벼일수록 오히려 고개를 숙이는 법인데, 권마에겐 그런 아량이 부족하군.”

“그가 잘 드는 칼일지는 모르지만, 강호를 이끌어 갈 만한 큰 그릇은 아니군.”

한두 명이 떠드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수많은 목소리가 합쳐지다 보니 마치 사자후처럼 크게 울려 퍼졌다.

수많은 무인들이 담호에게 짙은 거부감과 적의를 드러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적의가 일대를 지배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소림사의 계지원주인 광문이 광천의 곁으로 다가왔다.

“방장님, 더 이상 저자의 대답을 기다릴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군웅들의 뜻이 확고한데 반하는 행동을 한다면 무력으로라도 응징해야 합니다. 저희 계지원은 언제든 움직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광문!”

“이것은 제 뜻이 아닌 소림의 전 제자, 그리고 전 무인들의 뜻입니다.”

“으음!”

광문이 이렇게 나오자 광천도 난감해졌다. 어느새 계지원의 무승들은 담호와 남궁창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남궁창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담호를 길들일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번 기회를 통해 담호의 버릇을 고쳐 무림맹, 아니 자신의 칼로 활용할 계획이 순식간에 머릿속에 그려졌다.

남궁창이 한껏 인자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담 대협, 대화를 합시다. 우리는 조금 더 건설적인 관계를…….”

콰앙!

그 순간 굉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남궁창의 앞을 막아섰던 계지원의 무승들이 사방으로 튕겨 나갔다. 담호의 일격이 그들을 모조리 날려 버린 것이다.

“무, 무슨?”

남궁창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런 그의 망막에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담호의 모습이 맺혔다.

“대화는 너 때문에 죽은 이들과 해. 지옥에서…….”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