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1
371화 7장. 빚은 반드시 갚는다(3)
남궁창의 칠공에서 피가 터져 나오더니 이내 힘없이 풀썩 쓰러졌다. 그것이 무림맹의 군사 남궁창의 최후였다.
“아!”
누군가 탄식을 터트렸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군사가 저렇게…….”
“그는 정말로 무섭구나. 남궁세가의 가주에 검왕대, 그리고 군사까지 모조리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이로써 남궁세가가 그의 손에 완전히 거덜 난 거나 마찬가지구나.”
군웅들에게 있어 구대문파나 오대세가는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철옹성 같은 존재로 각인이 되어 있었다.
그들이 무너지는 그림은 단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강호에서 그들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중원에서 가장 풍요로운 성(省)을 지배하고 있는 그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자가 나온다는 것 자체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다. 하지만 오늘 그들의 눈앞에서 오대세가에 속하는 거대 세가가 담호 단 한 명에 의해 몰락했다.
이제까지 강호를 지배해 왔던 전설의 몰락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심정은 생각보다 그리 통쾌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두려웠다.
차라리 화산파가 도왔다면 모르겠지만, 이 모든 일은 오롯이 담호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것이었다.
담호는 그들의 상상을 한참이나 벗어난 규격 외의 존재였다.
그 어떤 단어로도 그를 규정할 수 없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존재했던 단어로는 말이다.
이제껏 담호와 같은 무인은 무림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다.
단순하게 담호만큼 강했던 무인을 찾아보자면 꽤나 많았을 것이다. 가장 먼저 떠올릴 수 있는 이들이 바로 구대문파나 오대세가의 개파 조사들이었다.
그들은 시대를 지배했던 자들이었고, 막강한 무력을 바탕으로 오늘날의 거대 세력의 시작점을 만들어 냈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그들에겐 수많은 조력자가 있었고, 그들의 도움을 바탕으로 기반을 닦았다.
담호는 그들과 달랐다.
그는 철저하게 혼자였다.
물론 화산파나 초연운 같은 조력자가 존재했지만, 그들과는 별개로 철저하게 혼자 행동했다.
그 어떤 협상도 없고, 물러섬도 없는 철혈의 승부사가 바로 담호였다.
그 혼자의 힘으로 이제까지 수많은 절대 무인들과 문파들을 무너트리고 이 자리에 섰다.
시신의 산을 쌓고, 피의 강을 만들며 걸어온 무인이 바로 담호였다. 그가 이제껏 이룬 모든 것은 오로지 그만의 역사였다.
강호사를 통틀어 봐도 담호만큼 혈로를 걸은 무인은 존재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공포의 존재로 군림하는 마교의 역대 교주들마저도 말이다.
그래서 더 무섭게 느껴졌다.
믿을 수 없는 역사를 이뤄 가는 무인에게 그들이 마냥 환호를 보낼 수 없는 이유기도 했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광천이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손에 든 염주를 연신 굴렸다.
담호의 믿을 수 없는 무위에 대해서는 이미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과는 느껴지는 충격의 강도가 달랐다.
그의 어깨에 잔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나마 그는 양호한 편이었다. 담호가 소림사에 온 이후 계속해서 대립각을 세웠던 광문은 감히 담호를 마주 보지도 못하고 있었다.
‘피에 굶주린 마인이로다. 어떻게 인간이…….’
그의 어깨와 손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 노력했지만, 그의 몸은 이미 통제를 벗어나 있었다.
그것은 계지원의 승려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의 얼굴엔 공포의 기색이 역력했다.
그때였다.
모두가 경직된 세상 속에서 담호를 향해 다가오는 세 사람이 있었다.
“담호!”
“형!”
“오빠!”
초연운, 방진보, 은소청이었다.
다른 이들과 달리 그들의 얼굴엔 반색이 가득했다.
특히 방진보와 은소청은 눈물마저 글썽이고 있었다. 담호가 그들을 보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두 사람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그들에게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담호를 다시 만난 것이 반가울 뿐이었다.
담호는 그들을 말없이 다독여주었다. 그사이 초연운이 다가왔다.
“연운.”
“이제야 자신이 생겼어.”
“…….”
“자네를 도와줄 자신이.”
초연운이 빙그레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그 손을 마주 잡았다.
***
“휴우!”
옅은 한숨과 함께 이마에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는 여인이 있었다. 곁에 있던 커다란 사내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괜찮으십니까? 아가씨.”
“괜찮아! 그저 조금 더울 뿐이야.”
“힘들면 말씀하십시오.”
“난 괜찮아.”
미소를 짓는 여인은 바로 황혜령이었다. 그녀의 곁에 함께하고 있는 덩치 큰 남자는 바로 묵일광이었다.
두 사람은 황산의 패왕채를 떠나 북상을 하고 있었다.
아비인 황경문의 명대로 화산으로 피신을 떠나는 길이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런 황혜령의 마음을 읽은 묵일광이 그녀를 위로했다.
“총채주님은 괜찮으실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가씨.”
“그렇겠지?”
“확실합니다. 패왕채는 천험의 요새입니다. 총채주님과 형제들이 마음먹고 지키는 이상 그 누구도 패왕채를 어찌할 수 없습니다. 설령 마교라 할지라도 말입니다.”
“일광의 말을 들으니 그래도 조금 위로가 되네.”
“위로가 아닙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그래!”
황혜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녀의 한결 개운해진 표정을 확인한 후에야 묵일광이 주위를 둘러봤다.
황산을 떠난 지도 꽤 되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 안휘성을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그들이 게을러서가 아니었다. 안휘성의 혼란한 상황이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교가 인접한 강서성까지 영역을 확장하면서 안휘성 전체에 비상이 걸렸다. 안휘성의 맹주는 대대로 남궁세가였다.
담호 때문에 가주와 검왕대 등을 잃고 세력이 크게 악화되었지만, 그래도 안휘성의 맹주라는 지위는 그대로였다. 안휘성의 무가와 문파 들이 남궁세가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안휘성 주요 관도에는 수많은 무인들이 깔렸다. 그들은 마교의 무인들을 색출해 내기 위해 눈에 불을 켠 채 검문을 하고 있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황혜령과 묵일광의 움직임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괜히 무인들의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이 없기에 그들은 인적이 뜸한 도로로만 이동했다. 때문에 아직도 안휘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일단 안휘성만 벗어나면 바로 속도를 올릴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황혜령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이 석양에 온통 황금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해가 지는데도 여전히 덥네.”
“그러게 말입니다. 아주 푹푹 찌네요.”
“오늘도 노숙을 해야겠지?”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이 길엔 민가가 없으니까요. 저쪽으로 십여 리만 가면 적당한 곳이 있습니다. 오늘은 그곳에서 노숙하면 될 겁니다.”
“그 문제는 일광이 알아서 해.”
“예!”
묵일광의 대답에 황혜령이 다시금 미소를 지었다.
정말 우직하기 그지없는 사내였다. 그래서 그녀는 그를 신뢰했다. 아비 황경문과 오라비 담호와 거의 동격으로 말이다.
묵일광의 말처럼 십여 리를 더 가자 노숙할 만한 곳이 나타났다.
어지간한 전각보다 더 큰 거대한 바위 아래 움푹 파인 곳이 있어 웬만한 비바람은 모조리 막아 주었다. 근처에는 조그만 개울도 있어 그야말로 노숙하기엔 최적의 지형이었다.
“피곤하실 텐데 잠시만 쉬고 계십시오, 아가씨.”
“나도 도울게.”
“아닙니다. 저 혼자 할 수 있습니다.”
황혜령이 도와주겠다고 말해도 묵일광이 거절했다. 그는 강제로 황혜령을 쉬게 하고 땔감을 주워 모았다.
아무리 여름이라고 하지만 산속의 밤은 제법 추웠다. 모닥불을 피우지 않으면 감기 몸살에 걸리기 딱 좋았다. 그리고 혹시 모를 짐승을 쫓고 요리를 하기 위해서라도 불은 반드시 필요했다.
묵일광은 능숙한 솜씨로 모닥불을 피우고, 요리를 할 준비를 했다. 곰만큼이나 덩치가 큰 묵일광이었다. 때문에 외모만 보고 투박할 거라 생각하기 일쑤였지만, 사실은 무척이나 세심한 남자였다.
그는 황혜령이 편히 쉴 수 있도록 주변을 정비한 후 요리를 하기 시작했다. 요리라고 해 봤자 건량을 이용한 간단한 죽을 만드는 것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묵일광은 방진보가 패왕채에 있을 때 간단히 만들 수 있는 요리를 배웠다. 그 모든 것이 황혜령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묵일광이 그렇게 요리를 하는 사이 해가 완전히 떨어지고 어둠이 사위를 잠식했다. 기온이 순식간에 뚝뚝 떨어졌다. 방금 전까지 그렇게 더웠었다는 사실이 거짓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주위를 환하게 밝히는 모닥불이 있기에 황혜령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사이 묵일광은 착실히 음식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황혜령이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그러자 쏟아질 듯 야공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별들의 바다가 그녀의 망막에 가득 들어왔다.
“아!”
절로 탄성이 터질 만큼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음식을 하던 묵일광도 잠시 움직임을 멈추고 그녀처럼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얼굴에도 황혜령과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남들이 보았다면 바보라고 할 만큼 그는 황혜령을 맹목적으로 챙겼다. 하지만 정작 묵일광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좋았다. 황혜령과 함께하는 이 순간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묵일광에게 황혜령은 단순한 주군의 딸이 아니었다. 그는 그보다 훨씬 깊은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녀와 함께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묵일광은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죽이 끓으면서 고소한 냄새가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묵일광은 죽이 다 되었음을 직감하고 모닥불에 걸린 솥을 내렸다.
“다 됐습니다, 아가씨.”
묵일광이 그릇 가득 죽을 뜰 때였다.
꼬르륵!
갑자기 배곯는 소리가 어둠 속에 울려 퍼졌다.
순간 황혜령이 얼굴이 벌게져 말했다.
“나 아냐.”
“아가씨?”
“정말 나 아니라니까.”
황혜령은 묵일광이 오해를 할까 손을 내저었다. 그에 묵일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였다.
“배고파! 나도 얻어먹으면 안 될까?”
어둠 속에서 갑자기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묵일광이 노성을 내뱉었다
“누구냐?”
“아, 나 나쁜 사람 아니야. 그렇게 경계하지 않아도 돼.”
어둠 속에서 묘령의 여인이 나타났다.
하늘색 장포를 걸친 이십 대 후반의 여인이었다. 마치 꿈꾸는 듯한 몽롱한 눈동자를 소유한 눈부신 미녀였다. 그녀의 등장에 주변의 어둠마저도 물러나는 듯했다.
특이한 것은 그녀의 등 뒤에 걸려 있는 비파였다. 마치 장신구처럼 덜렁거리는 비파가 더해져 그녀는 더욱 신비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여인의 몽롱한 시선은 묵일광의 앞에 놓여 있는 솥에 고정되어 있었다.
“내가 정말 배고파서 그러는데 좀 나눠주지 않겠어? 보답은 톡톡히 할게.”
여인은 한쪽 손으로 배를 움켜잡은 채 구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런 여인의 모습에 묵일광이 잠시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때 황혜령이 나서 말했다.
“언니, 이리 와요. 우리 함께 먹어요.”
“정말?”
“네! 그렇지 않아도 일광 오라버니가 손이 커서 죽을 넉넉하게 했어요. 함께 먹어도 충분하니까 걱정하지 마요.”
“고마워! 동생. 복받을 거야.”
여인이 활짝 웃으며 황혜령 곁으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무척이나 소탈해 보였다.
황혜령은 그녀에게 먼저 죽이 담근 그릇을 건네주었다.
“드세요.”
“고마워!”
여인은 사양하지 않고 허겁지겁 죽을 먹었다. 묵일광이 황혜령을 보았다.
“아가씨!”
“괜찮아!”
황혜령은 미소를 지었지만 묵일광은 웃을 수 없었다.
‘그녀가 스스로 말할 때까지 접근하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묵일광의 무위를 생각할 때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여인을 바라봤다. 그러자 여인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어. 난 좋은 사람이니까.”
“좋은 사람?”
“그래! 내 이름은 요사란이야.”
“요사란?”
묵일광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이상 물어볼 수도 없었다. 스스로를 요사란이라고 밝힌 여인이 다시 죽 그릇에 고개를 묻고 허겁지겁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거 정말 맛있네. 너무 맛있어.”
어둠 속에 그녀의 탄성이 울려 퍼졌다. 그녀의 음성은 묘한 여운을 남기며 멀리멀리 퍼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