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2
372화 8장. 폭풍 속에 흔들리는 것은 일엽편주(一葉片舟)만이 아니다(1)
“아! 잘 먹었다. 덕분에 살았어.”
요사란이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중얼거렸다. 그녀의 얼굴엔 진정으로 살았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황혜령이 그런 요사란에게 물었다.
“더 드실래요?”
“아니야! 이 정도면 충분해.”
요사란이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그런데 언니는 어쩌다가 야산을 헤매고 다닌 거예요?”
“일행을 잃어버렸어.”
“정말요?”
“응!”
요사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가요?”
“몰라! 내가 귀찮았나 봐. 갑자기 없어졌어.”
“그런?”
“덕분에 하루 종일 산을 헤맸어.”
“하루 종일 헤맸다구요?”
“응!”
황혜령이 미간을 찌푸렸다.
요사란이 하루 종일 헤맸다고 하는 산은 그리 넓지도, 높지도 않았다. 무공을 모르는 사람이라도 반나절이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는 그런 조그만 산이었다.
“언니 혹시?”
“응?”
“평소에도 길을 잘 못 찾거나 하지 않아요?”
“음!”
요사란이 잠시 미간을 구긴 채 침음성을 흘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서 황혜령은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직감했다.
‘길치구나.’
간혹 그런 사람이 있다. 방향 감각이 고장 나서 똑같은 길을 남들의 몇 배는 헤매고 다니는 사람이. 요사란도 그런 부류 같았다.
“하! 고생하셨겠네요.”
“응!”
“그럼 내일 함께 가요. 산 아래까지 안내해 줄 테니까.”
“정말?”
요사란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렇지 않아도 몽환적으로 보이는 눈동자가 빛을 받아 신비롭게 빛났다. 황혜령은 그런 그녀의 눈동자가 무척이나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마치 어둠 속에서 스스로 빛을 발하는 보석 같았다.
“하! 이거 너무 고마운데. 밥도 얻어먹었는데, 산 아래까지 데려다준다니. 이 보답을 어떻게 하지?”
“보답하실 필요 없어요. 별것도 아닌데.”
“아니야. 남에게 은혜를 입었으면 반드시 보답해야 한다고 했어.”
요사란이 길고 하얀 손가락으로 잠시 붉은 입술을 어루만졌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어둠 속에서도 무척이나 육감적으로 보였다.
“좋아! 보답으로 내가 연주 한 곡 할게.”
“연주요?”
“오래된 친구한테 비파를 연주하는 법을 배웠거든. 제법 들어 줄 만할 거야.”
요사란은 즉시 등에 메고 있던 비파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비파를 연주했다.
따당! 따다당!
어둠 속에 힘찬 비파음이 울려 퍼졌다.
“아!”
“으음!”
황혜령뿐만 아니라 묵일광까지도 요사란의 연주에 감탄했다.
요사란의 비파음은 도저히 여자가 탄주한다고 볼 수 없을 정도로 강한 힘과 기백이 담겨 있었다. 마치 천군만마가 드넓은 광야를 질주하는 듯한 착각이 들게 할 정도로 웅혼하면서도 가슴을 울렸다.
묵일광은 요사란을 경계하던 마음을 잊고 비파음에 빠져들었다. 가슴이 울렁울렁했다.
맹세코 이런 탄주는 난생처음이었다. 요사란의 하얀 손가락은 쉴 새 없이 비파 줄 위를 오갔다.
마치 손가락이 수십 개로 늘어난 것처럼 환상적인 움직임에 황혜령은 넋을 빼앗겼다. 그리고 마침내 요사란의 탄주가 끝났을 때 그녀는 체면도 잊고 박수를 쳤다.
“와! 언니, 정말 끝내줘요. 제 평생 들어 본 탄주 중 최고였어요.”
“그래? 애써 배운 보람이 있네.”
황혜령의 극찬에 요사란이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말 최고예요.”
“역시 친구의 말을 듣길 잘했네. 배우면 쓸모가 많을 거라더니.”
“친구요?”
“응! 음(音)에 통달한 친구가 있었어. 그 친구한테 배웠어.”
“정말 대단한 분인가 봐요?”
“정말 대단했지. 그가 연주하면 모든 사람들이 넋을 잃었거든.”
“저도 한번 뵙고 싶네요. 언니도 이 정도인데, 언니를 가르친 분은 어느 정도인지.”
“나도 소개해 주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네.”
“왜요?”
“이 세상 사람이 아니거든. 몇 년 전에 엄한 사람에게 시비를 잘못 걸어서 맞아 죽었어.”
“미안해요. 제가 괜한 말을 꺼내서.”
“괜찮아! 제 명이 거기까지였는데 동생이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리고 오래돼서 괜찮아.”
요사란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황혜령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에 요사란이 미소를 지었다.
“착하네!”
“네?”
“동생은 이름이 어떻게 돼?”
“황혜령이라고 해요.”
“이름도 마음만큼 예쁘네. 마음에 들어.”
“감사해요.”
“그리 오래 동행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함께 가는 동안만큼은 우리 친하게 지내자구.”
“네!”
황혜령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던 요사란의 시선이 묵일광을 향했다.
“그쪽도.”
“예?”
“친하게 지내자구.”
“예!”
예상치 못한 요사란의 말에 묵일광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요사란은 그런 묵일광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순간 묵일광은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요사란의 눈빛이 뇌쇄적이거나 유혹적이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눈빛엔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힘이 있었다. 가뜩이나 경계심을 가득 끌어 올린 묵일광조차도 흔들릴 정도로 말이다.
‘도대체?’
그때 요사란이 다시 비파를 탄주하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노래까지 곁들였다.
그녀의 조그만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청아한 음성이 비파소리와 어우러져 멀리 멀리 퍼져 나갔다.
묵일광은 방금 전까지 경계하던 것도 잊고 그녀의 목소리와 탄주에 빠져들었다.
요사란의 탄주는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
동정호변의 악양은 무척이나 유서가 깊은 도시였다. 고래로부터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아름다운 풍광에 반해 이곳을 찾았고, 그만큼 많은 역사적인 유물들이 곳곳에 존재했다.
하지만 근래 들어 악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오래된 유물들이 아니라 옛 무림맹 터에 들어선 거대한 전각군이었다.
부서지고 불타 폐허만 남은 빈터에 들어선 전각군은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기를 질리게 만들 정도로 엄청난 위압감을 풍겼다.
거대한 성채를 연상시키는 전각군은 바로 마교의 본단이었다. 처음 마교의 본단이 세워졌을 때 악양을 비롯한 호남성의 백성들은 두려움에 떨었다.
백성들은 마교가 악양의 사람들을 탄압하고, 강제로 마교를 믿게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악양을 점거한 후에도 마교는 백성들에게 별다른 제재를 하거나 강제로 포교를 하지 않았다.
마교가 적의를 드러내는 존재는 오직 무림에 적을 둔 문파들뿐이었다. 그 외엔 그 어떤 참견도 개입도 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처음엔 의심의 눈길로 바라보던 사람들도 점차 일상생활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경계심이 옅어졌을 때 마교는 은밀히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었다.
중원 각지에 흩어져 있던 마교도들을 악양과 호남성 전역에 투입했고, 그들은 일반 백성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파고들어 마교에 호의적인 소문을 퍼트렸다.
“마교(魔敎)가 아니라 신교(神敎)다.”
“마교라는 이름은 그들의 교리를 두려워한 중원의 문파들이 악의적으로 붙인 이름이다.”
소문과 함께 많은 신화상단을 통해 엄청난 자금이 시중에 풀렸다. 많은 백성들이 그에 혜택을 받았고, 안 좋은 인식도 점차 개선되었다.
시작이 힘들어서 그렇지, 일단 한번 인식이 좋은 쪽으로 바뀌자 악양과 호남성에서 마교는 급속히 세를 불려 나갔다. 무림맹이 건재할 때도 큰 혜택을 받지 못했던 백성들에게 마교의 지원은 가뭄의 단비와도 같았다.
“무림맹이나 강호인들이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뭐가 있나? 힘이 있다고 으스댈 줄만 알았지, 티끌만 한 도움이라도 준 게 있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림맹보다 차라리 마교가 낫네.”
곳곳에서 그런 이야기들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악양과 호남성에서부터 민심이 마교로 기울어 갔다. 특히 마교의 본단이 자리를 잡은 악양의 민심은 마교를 전폭 지지하고 있었다.
이미 악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이 마교를 믿고 있다는 소문이 떠돌 정도였다.
그 모든 계획의 중심에 군사인 상한천이 있었다. 일련의 과정들이 그의 지휘하에 이뤄졌고, 결국 악양은 마교의 확실한 근거지가 되었다.
상한천은 마교의 전각들 중에서 두 번째로 큰 전각을 거처로 삼았다. 무림맹의 남궁창이 그랬듯이 그 역시 자신의 거처에 군사부를 꾸렸다.
마교에서 가장 뛰어난 두뇌를 가진 인재들이 군사부에 자리를 잡았고, 천하의 정보가 수집되었다.
상한천은 이곳에 앉아서도 천하의 사정을 손금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그의 얼굴은 마치 돌덩이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남궁창이 죽었다고?”
“그렇습니다. 지급으로 들어온 첩보입니다. 지금 진위를 확인 중에 있지만,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습니다.”
상한천의 앞에는 그의 심복이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이름은 추고월, 마교의 정보 조직을 총괄하는 자로 상한천의 깊은 신임을 받고 있었다.
추고월이 가지고 온 정보는 바로 소림사에서 무림맹의 군사 남궁창이 죽었다는 것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아 추고월은 정보 조직에 정보의 진위를 다시 한 번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상한천에게 달려왔다.
“남궁창이 죽었다? 그것도 권마에게 맞아서?”
상한천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믿기 힘든 정보였다.
남궁창은 무림맹의 군사였다. 비록 자신의 계획에 빠져 악양에서 쫓겨났지만, 그래도 무림맹이라는 거대 세력의 이인자였다. 그런 이가 타인에게 맞아 죽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남궁창을 죽인 자가 담호라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실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아는 담호는 절대 뒷일을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거슬리는 게 있으면 일단 무참히 파괴하고 보는 사람이었다. 그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남궁창을 죽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구원(舊怨) 때문인가?”
상한천이 중얼거렸다.
삼 년 전 남궁창은 의도적으로 담호의 행로에 대한 정보를 흘렸다. 차도살인지계인 줄 알면서도 상한천은 남궁창이 내민 미끼를 물어 혈명대와 칠대마인 중 두 명을 파견했다.
이 싸움에서 마교는 혈해판관 등천소와 만월선자 진혜원을 비롯해 수백 명의 혈명대를 잃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뼈아픈 손실이었다.
당시 담호는 그들에게 발목이 잡혀 화산에 늦게 도착했다. 그 때문에 화산파는 큰 타격을 입었고, 친구인 초연운은 왼쪽 발이 잘리고 말았다.
“그때의 원한을 잊지 않고 갚은 것인가?”
다른 누구도 아닌 권마가 행한 일이기에 납득이 갔다.
상한천이 손가락으로 자신의 턱을 두들겼다. 추고월은 그런 상한천을 말없이 바라봤다.
상한천이 다시 입을 연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였다.
“소림사와 무림맹의 분위기를 파악하도록. 정말 남궁창이 권마에게 죽은 것이 맞다면 사기가 저하되었을 터, 그 상황을 이용해야 한다.”
“알겠습니다.”
적들의 혼란은 이쪽에겐 큰 기회가 된다.
상한천은 결코 기회를 놓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의 머릿속에는 지금 상황을 이용할 수 있는 수많은 계책이 떠오르고 있었다.
“정말 무모한 자입니다. 비록 소림사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지만, 그래도 무림맹의 본진이 있는 곳에서 군사를 죽이다니.”
“그래! 적이라면 앞뒤를 가리지 않고 물어뜯는 미친개나 다름없지. 그의 눈에는 거슬리는 모든 것이 적으로 보일 거야.”
“어떻게 명문정파라 할 수 있는 화산파에서 그런 무인이 나올 수 있는지 정말 의심스럽습니다.”
“어디에나 변종은 있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그런 변종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큰 기회야.”
“기회라면?”
“그로 인해 남궁세가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지 않은가?”
“아!”
순간 추고월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우선 금마각과 신화전을 안휘성으로 움직이게. 교주님께는 내가 재가를 받을 테니.”
“알겠습니다.”
추고월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금마각과 신화전은 모두 내원 소속으로 마교 내에서도 강대한 전력을 자랑했다. 둘 중 하나만 출동해도 중원의 어지간한 문파 따윈 흔적도 없이 지울 수 있었다.
상한천은 결코 주어진 기회를 놓치는 이가 아니었다. 조그만 빈틈도 헤집고 들어가는 그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아!”
상한천의 명을 이행하기 위해 몸을 일으키던 추고월이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이 탄성을 내뱉었다.
“왜 그러는가?”
“그러고 보니 안휘성에 그분이 있습니다.”
“그?”
“혈륜마녀(血輪魔女)께서 아직 그곳에 있습니다.”
“잘됐군! 그녀에게 급히 연통을 넣게나.”
“존명!”
추고월이 대답과 함께 물러났다.
혼자 남은 상한천의 입가엔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하필 그곳에 그녀가 있다니 남궁세가엔 재앙이군.”
마교의 무력을 상징하는 사대군장(四大軍將).
사대군장 중 가장 집요하고 잔혹한 군장(軍將)의 이름은 혈륜마녀 요사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