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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73화 (37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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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3화 8장. 폭풍 속에 흔들리는 것은 일엽편주(一葉片舟)만이 아니다(2)

담호와 초연운은 빈객청의 조그만 정자 위에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헤헤! 오래 기다리셨죠?”

그때 방진보가 거하게 차린 한상을 들고 정자 위로 올라왔다. 상 위에는 소림사에서는 먹기 힘든 각종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모두 방진보가 만든 것들이었다.

고기를 조리할 수 없어 채소로 만든 요리가 전부였지만, 그래도 냄새 하나만큼은 정말 끝내줬다.

“소청이 소홍주도 줬어요. 최소 이십 년은 된 거라서 정말 주향이 끝내줘요. 헤헤!”

방진보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담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방진보는 행복했다.

소홍주가 담긴 병을 열자 진한 주향이 장내에 울려 퍼졌다. 어지간한 일에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담호조차도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을 정도였다.

초연운이 술병을 들며 중얼거렸다.

“좋은 선물을 줬군.”

“소청도 힘겹게 구한 거래요. 몇 병 빼놓았으니 회의 끝난 후 더 가지고 온대요.”

“그래? 바쁜 와중에 우리까지 신경 써 주다니. 고맙군!”

남궁창의 죽음 이후 소림사에 들어와 있던 상단의 주인들은 따로 모임을 갖고 있었다.

무리한 기부를 강요하던 압력의 주체 남궁창이 죽었으니 그들도 대책을 의논해야 했다. 때문에 은소청도 쉽게 몸을 뺄 수가 없었다.

초연운이 담호의 술잔에 소홍주를 가득 따른 후 자신의 잔도 가득 채웠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친 후 단숨에 술을 마셨다. 순간 초연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후아! 끝내주는군.”

“좋군!”

담호도 고개를 끄덕여 초연운의 의견에 동의했다.

목 넘김과 입안에서 느껴지는 향 자체가 달랐다. 술을 좋아하는 초연운이었지만, 이런 명주는 단 한 번도 마셔 본 기억이 없었다.

두 사람은 연거푸 두 잔을 더 마신 후에야 안주를 먹었다. 방진보가 내놓은 요리는 소홍주와 기가 막히게 어울렸다.

초연운이 방진보에게도 술을 권했다.

“너도 한잔 마셔 보거라.”

“저두요?”

“이제 와서 왜 순진한 척해?”

“제가 뭘요?”

“몰래 한 잔씩 마시는 것 알고 있어. 그러니까 내숭 떨지 말고 술잔 받아.”

“그거야 술에 어울리는 요리를 만드느라 맛보는 거죠.”

“변명은. 그래서 안 마실 거야?”

“아니요. 헤헤!”

방진보가 웃으며 술잔을 내밀었다. 초연운은 방진보의 잔에도 술을 가득 따랐다.

담호가 방진보에게 술잔을 내밀었다. 방진보를 처음 만났을 때는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했었다. 그런 아이가 커서 어느새 제 몫을 톡톡히 하고 있었다.

아직은 애티를 완전히 벗지 못했지만, 방진보는 이미 어른이나 다름없었다. 담호가 내민 술잔엔 방진보를 한 사람의 어른으로 인정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챙!

방진보가 담호와 초연운의 술잔에 자신의 술잔을 가볍게 부딪친 후 입가로 가져갔다.

“크으!”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 모습을 본 초연운이 피식 웃었다.

“거봐. 한두 번 마신 게 아니라니까.”

“헤헤!”

방진보는 변명 없이 웃기만 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방진보의 모습은 담호마저 살짝 미소 짓게 만들었다.

그때 초연운이 술잔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 그동안 어떻게 지낸 건가?”

담호의 행보에 대해서는 이미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초연운은 담호에게 직접 듣길 원했다.

담호는 담담한 목소리로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말했다. 사천성에서 마교와의 충돌, 천오경과의 사투, 당문과의 싸움, 그리고 무당파와의 충돌까지도 말이다.

담호의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초연운과 방진보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해 갔다. 화산을 떠나 있었던 그 짧은 시간 동안 담호는 보통 사람이 평생을 살아도 한 번을 경험할 수 없는 엄청난 사건을 수없이 겪었다.

‘진짜 형은…….’

방진보는 그런 이야기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는 담호가 그저 감탄스럽기만 했다.

마침내 담호의 이야기가 모두 끝나자 초연운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천오경만큼은 자신의 손으로 죽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호의 손에 천오경이 죽은 이상 그런 기회는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이 못내 아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담호에게 고마웠다. 어쨌거나 자신의 복수를 담호가 대신 해 줬기 때문이다.

“고맙네! 사부의 복수를 해 줘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사부도 고마워할 거야.”

초연운이 술잔을 들었다. 그는 죽은 사부를 기리며 술을 마셨다. 담호는 그런 초연운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그가 화산을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초연운은 폐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초연운은 그런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예전보다 차분해지고 정련된 느낌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초연운은 진일보한 것이다.

담호는 초연운에게서 차분한 분노를 느꼈다. 초연운은 분노를 차분히 숙성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분노를 표출시키지 않을 정도의 정신적인 수양이 깊어졌다.

그의 친구는 이제 등을 맡겨도 좋을 정도로 성장을 했다. 담호는 그 사실이 기꺼웠다.

그때 초연운이 입을 열었다.

“그런데 지금 무당파를 뒤집어 놓았다고 했나?”

“그래!”

“허참! 정말 믿기지 않는군. 천하의 무당파를 뒤집어 놓다니. 내 친구지만 자네는 정말…….”

초연운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강호의 태산북두라는 소림사에 필적하는 위명을 지닌 곳이 바로 무당파였다. 오죽하면 소림사와 무당파를 합쳐 양대 거두라고 부를까?

강호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를 가진 문파 중 하나였고, 그만큼 기인이사들이 즐비했다. 그런 무당파가 담호 단 일인에 의해 거의 초토화가 되다시피 했다.

믿기 힘든 이야기지만 믿어야 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담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였으니까.

“어쨌거나 무당파를 뒤집어 놓은 것은 잘한 것 같군.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그들은 너무 안일했거든. 화산파 등이 피를 흘릴 때 그들은 전력을 온전히 보존했으니 말 다한 셈이지. 자네 때문에 이제라도 정신을 차렸다니 다행이군.”

초연운의 말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저…….”

갑자기 정자 밑에서 누군가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를 본 초연운이 알은척을 했다.

“소천!”

“아미타불! 세 분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죄송하지만 저희들이 끼어도 되겠습니까?”

담호 등이 앉아 있는 정자를 올려다보는 이는 바로 소림의 기재인 소천이었다. 그의 등 뒤로 또 한 명의 젊은 무인이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초연운이 안력을 끌어 올려 젊은 무인을 바라봤다. 순간 그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청운?”

“알아보는군, 연운. 이렇게 보게 되어 반갑네.”

“자네가 여길 어떻게?”

초연운의 물음에 청운이라 불린 젊은 무인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바로 청성파의 대제자인 청운이었다. 사천일성(四川一星)이라 불리는 촉망받는 기재이자, 구무룡의 일원이었다.

청운이 갑자기 담호에게 포권을 취했다.

“청성파의 청운입니다. 담 대협 덕분에 저희 청성파가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담 대협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

“담 대협이 아니었으면 저희 청성파는 지금도 치욕스러운 봉문을 했을 겁니다. 청성파의 모든 무인들을 대표해 제가 감사의 말씀 꼭 전하고 싶었습니다.”

청운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당문에 의해 청성파가 강제로 봉문을 당할 때 그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이곳 무림맹까지 달려왔다. 하지만 무림맹과 남궁창은 그런 청운의 요청에 선뜻 병력을 내주지 못했다.

무림맹도 본거지를 마교에 내주고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소림사에 더부살이를 하느라 내부가 어수선한 때라 선뜻 지원을 결정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차일피일 지원이 미뤄지고 있을 때 뜻밖의 낭보가 들려왔다. 당문이 담호에 의해 큰 피해를 입고 봉문을 했다는 믿을 수 없는 소문이었다. 하지만 소문은 사실이었고, 덕분에 강제로 봉문을 했던 청성파와 아미파는 다시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정말 담 대협이 아니었다면…….”

청운이 말을 잇지 못했다.

한때는 담호를 질시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담호는 감히 그가 비벼 볼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한때는 구무룡이라는 위명에 취해 세상 모든 것을 우습게 보았던 청운이었다. 하지만 사문의 위기를 겪고 난 후에야 담호가 진정으로 존경할 만한 무인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청운은 담호를 경시하던 마음을 모두 버렸다. 담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엔 존경의 염이 가득했다.

초연운이 그런 청운을 향해 손짓을 했다.

“거기 그렇게 있지 말고 이리 올라오게. 소천, 자네도…….”

그의 손짓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정자 위로 올라왔다. 그러자 이번에 방진보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잔이랑 안주를 더 가져와야겠네. 금방 가져올 테니까 이야기 나누고 계세요.”

방진보는 본능적으로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담호와 회포는 나중에 풀어도 되었기에 그렇게 자리를 비켜 줬다.

초연운은 아직도 서 있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그렇게 어정쩡하게 서 있지 말고 자리에 앉아.”

“아마타불! 고맙네.”

“으음!”

소천과 청운이 조심스럽게 담호 앞에 앉았다. 그때까지도 담호는 별반 반응이 없었다.

원래부터 말수가 적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막상 담호의 침묵을 마주하자니 입안이 바싹 탔다.

“그렇게 긴장할 것 없네. 자네들이 싫어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니까. 이 친구는 원래 그래.”

“으음!”

초연운의 말에도 두 사람은 긴장을 풀지 못했다.

‘이 사람이 권마!’

‘역시 명불허전이구나.’

두 사람 모두 담호가 소림사 산문에서 보였던 무위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단 일인이 소림사의 무승들과 수많은 군웅들을 압도하던 그 광경은 그만큼 충격적이었다.

그때 담호가 입을 열었다.

“무슨 일이지?”

“직접 뵙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습니다,”

“이야기?”

순간 청운의 얼굴에 비장한 빛이 떠올랐다.

“담 대협께서는 무림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

“제가 먼저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현재 무림맹이 썩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오직 기존 문파들의 이득을 대변하고 지키기 위해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청운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남천산과 남궁창을 찾아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어정쩡한 대답과 애매모호한 태도뿐이었다.

그들은 청성파가 너무 멀리 있어 무림맹의 전력을 파견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지원을 계속해서 미뤄 왔다. 그동안 청운이 겪은 심적 고통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고 속이 시커멓게 타들어 갔다. 그래도 자신이 약자이기에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인내하고 또 인내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무림에서 강자가 아닌 약자가 얼마나 살아가기 힘든지. 든든한 배경이 없는 무인이 얼마나 홀대를 받는지 말이다.

청성파가 강성할 때는 청운 역시 대접을 받았다. 하지만 청성파가 봉문을 당하자 그 모든 후광이 눈처럼 사라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잘나서 당연하게 누린다고 생각했던 그 모든 것들이 실은 청성파라는 거대 문파 덕분이었다는 것을.

그 모든 사실을 깨닫자 죽을 만큼 부끄러워졌다.

사천성 제일의 기재라고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다니던 것도, 구무룡이랍시고 여타 중소 문파들의 무인들을 내려 보던 것도.

애초부터 그 자신이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자신은 단지 사문을 잘 만난 운이 좋았던 사람일 뿐이었다.

부끄러움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 기간 동안 청운은 무림맹의 고위 무인이나 명문가의 자제들이 아닌 하급 무인들을 만나고 다녔다.

그들과 만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림맹은 기존의 질서를 지키기 위한 조직일 뿐, 강호 모두를 위한 조직은 아니었다.

청운의 말이 이어질수록 담호의 미간에 깊은 골이 패였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저는 담 대협을 따르겠습니다.”

청운의 청천벽력 같은 선언에 초연운이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설마 청운이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운을 비롯한 구무룡은 대부분 담호를 싫어했다.

나이도 비슷한 데다가 같은 시대를 살고 있었다. 그 말은 곧 강호를 살아가는 동안 내내 담호와 비교된다는 뜻이었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강호인들이 그런 비교를 순순히 받아들일 리 없었다. 더더구나 구무룡처럼 강호의 최정상 기재들이 말이다.

그런 점에서 청운의 이야기는 확실히 충격적이었다.

“즉흥적으로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생각하고 결정한 일입니다. 부디 저를 받아 주십시오.”

청운은 담호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동자엔 한 점의 흔들림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때였다.

“소승도 청운 소협과 똑같은 생각입니다.”

청운에 이어 소천도 합세했다.

그들의 선언에 초연운은 숨을 죽인 채 담호를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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