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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75화 (37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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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5화 8장. 폭풍 속에 흔들리는 것은 일엽편주(一葉片舟)만이 아니다(4)

남천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단지 십여 명에 불과할 뿐이었다.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소수였다. 그런데 그 소수의 인원이 풍기는 기도가 방 안을 묵직하게 채우고 있었다.

신창이라 불릴 만큼 남천산 역시 강호 최고 수준의 고수였고, 실제로 그의 무위는 무림맹에서도 대적할 자가 없을 만큼 대단했다. 그런 적경천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그의 눈앞에 서 있는 십여 명의 무인들 때문이었다.

어떤 이는 젊고, 어떤 이는 나이가 든 외모를 하고 있었다. 남자도 있었고, 여자도 있었다. 그야말로 십인십색(十人十色)의 외모였다. 하지만 하나같이 강력한 기도를 발산하고 있었다.

한 명, 한 명이 무림맹의 맹주인 남천산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강력해 보였다.

남천산은 전율했다.

“적 선배께서 모셔 오신다는 분들이…….”

“맞네! 이들일세. 은거한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설득하느라 시간이 많이 걸렸다네. 인사부터 하게나. 이쪽부터 적성신군(赤星神君) 유성월 대협, 천인대적검(千人對敵劍) 장진명 대협, 천산설화(天山雪花) 소보원 여협이라네. 그리고…….”

적천경의 소개가 이어질수록 남천산의 눈동자에 경랑이 일었다.

적성신군 유성월은 적천경과 동시대의 고수였다. 성격이 냉정하고 차분해 어떤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았고, 무엇보다 무공이 강해 당할 이가 그리 많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는 사신제 중 하나인 혈광사신(血光死神) 호천산과 막역한 사이였다. 핏빛 전설을 써 내려간 호천산이 친구로 인정할 정도로 강력한 무위와 냉철한 심계의 소유자가 바로 유성월인 것이다.

일차 정마대전 당시 그 역시 결사대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호천산과 함께 마교의 본단에 쳐들어갔고, 장렬히 산화했다고 알려졌었다. 적어도 지금까지는 말이다.

“저, 정말 유성월 선배님이십니까?”

“그렇다네. 내가 바로 적성신군 유성월일세. 강호의 뛰어난 후배를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갑네.”

“아!”

유성월의 인사에 남천산이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강호의 전설인 사신제와 동시대에 살았던 무인, 그중에서도 혈광사신과 특별한 인연을 맺었던 무인을 눈앞에서 보게 되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남천산의 놀람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평범한 중년인처럼 보이는 장진명의 별호는 천인대적검. 검 한 자루만 쥐어 주면 능히 천 명을 상대할 수 있다고 해서 붙은 별호였다. 실제로 일차 정마대전 당시 그는 홀로 근 천여 명에 달하는 마교의 무인들을 상대했다. 천 명을 모두 죽이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패퇴시킴으로써 강호에 위명을 드날렸다.

천산설화 소보원은 여자라는 신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강호 최정상의 자리에 올랐던 최고의 고수였다. 그녀는 새외 명문인 천산설문(天山雪門)이 배출한 최강자였다.

여인의 몸으로 마교와의 싸움에 뛰어들어 수많은 전과를 올렸다. 그녀가 이뤄 낸 성과는 결코 남자 고수들에 뒤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욱 뛰어났고, 그에 수많은 이들이 그녀에게 열광했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녀는 그리 나이 든 모습이 아니었다. 중년의 미모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오히려 단아한 모습에 기품까지 깃들어 범상치 않은 위압감을 풍기고 있었다.

“잘 부탁드리겠네. 맹주.”

“무림맹을 이끌어 가는 맹주를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그들은 남천산에게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했다.

“이, 이렇게 어려운 걸음을 해 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남천산의 얼굴에 감격 어린 빛이 떠올랐다.

담호 때문에 정신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남천산에게 그들의 등장은 천군만마 그 이상이었다.

“강호에 다시 나오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기왕 나왔으니 신명을 다해 맹주를 돕겠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네.”

노고수들이 연이어 포권을 취하며 인사를 해 왔다. 의례적인 인사일 수도 있었지만 받는 남천산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바닥까지 떨어졌던 자존감이 다시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비록 그 수는 열 명에 불과하지만, 하나하나가 세상을 쩌렁쩌렁 울릴 수 있는 고수들이었다. 그런 이들의 합류는 남천산으로 하여금 두려울 것이 없게 만들었다.

남천산이 한결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강호의 대위기를 맞아 은거했던 선배 고수들이 이렇게 합류해 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앞으로도 많은 도움과 지도 부탁드리겠습니다.”

“문제가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하시게나. 이미 말씀드렸다시피 신명을 다해 도울 테니.”

십여 명의 고수들 중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구의진이 대답했다. 천랑객(天狼客)이라는 별호처럼 늑대를 연상시키는 외향이 인상적이었다.

구의진의 말에 남천산이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도 골치 아픈 문제가 있었는데 잘되었습니다.”

“그게 무엇인가?”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자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군사가 죽었고, 애써 기틀을 잡았던 무림맹의 질서가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게 누구인가? 감히 무림의 지존인 맹주의 심기를 거스르는 자가?”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담호…… 권마라 불리는 자입니다.”

남천산의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

담호는 불이 환히 켜진 소림사를 무심히 바라봤다.

새벽 동이 트기 직전이었다. 세상이 가장 어두울 시각, 하지만 소림사는 그런 상식을 부정하기라도 하듯이 대낮처럼 환하기만 했다. 소림사의 곁에 붙어 있는 무림맹의 임시 총단 역시 불야성을 이루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소림사와 무림맹에 모여 있었고, 하루 열두 시진이 숨 돌릴 틈도 없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

새벽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내뿜는 열기가 담호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담호는 석상처럼 제자리에 선채 그 모든 풍경을 바라봤다.

담호는 소천에게 긍정의 말도, 또 부정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천과 청운은 담호와 뜻을 함께하겠다고 다짐했다. 초연운이 그런 두 사람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골치 아픈 일은 자신에게 맡기라면서.

아마 지금쯤이면 그들끼리 의기가 투합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담호는 초연운이 알아서 잘 해결해 줄 거라고 믿었다.

그때였다.

“형!”

익숙한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방진보였다.

방진보가 담호의 옆으로 다가와 섰다.

오랜만에 만난 담호와 회포를 풀 사이도 없이 소천과 청운에게 자리를 내줘야 했던 방진보였다. 섭섭할 만도 하건만 방진보의 얼굴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다.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았지만, 방진보도 이제 어엿한 한 사람의 무인이었다. 그 정도의 일로 섭섭함을 표할 만큼 정신적인 수양이 얕지 않았다.

“헤헤!”

방진보가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담호는 별다른 말이 없었지만, 상관없었다. 그래도 좋았으니까. 가장 좋아하는 담호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방진보는 소림사에 온 보람을 느꼈다.

담호가 물었다.

“화산은?”

“다들 잘 계세요. 매화검수들을 비롯해 많은 일대제자들이 폐관수련에 들어갔어요. 아, 태상장로님도 폐관에 드셨어요.”

“사부가?”

“예! 천사교를 상대하려면 깨달음이 필요하시다고 하셨어요.”

방진보의 말에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현소 진인다운 결정이었다.

어차피 현재 화산파는 봉문을 한 상황이었다. 대외 활동을 완전히 멈춘 상태이기에 외부의 관심이 그나마 적었다. 지금 시기를 최대한 활용해서 전력을 비축해 두어야 했다.

앞으로 다가올 싸움은 그 어느 싸움보다 혹독할 것이 분명했기에.

“운경 사형이 고생이 많겠군.”

“에휴! 말도 마세요. 아마 화산파에서 제일 마음고생을 하는 사람을 꼽으라면 그분일 거예요. 곁에서 지켜보는 것이 고욕일 정도라니까요. 그래도 정말 잘하고 계세요.”

화산파와 같은 거대문파를 이끌어 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재정적인 규모도 워낙 엄청나고, 이해관계가 얽힌 속가제자들과 그들이 세운 문파, 그 외에도 생각하고 계산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때문에 화산파와 같은 거대 문파를 잘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순수한 무력에 고도의 정치력까지 뒷받침이 되어야 했다.

다행히 운경은 무력이 조금은 떨어졌지만, 대신 뛰어난 정치력과 폭넓은 용인술을 가지고 있었다. 부족한 무력은 명경이 보완해 주었고, 현소 진인이 정신적인 지주가 되어 주니 마음껏 자신의 능력을 펼칠 수 있었다.

운경이 잠을 언제 자는지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운경은 일에 집중했다. 많은 제자들이 그런 운경을 존경했다.

방진보는 담호가 화산파에 없었을 때 일어났던 일들을 시시콜콜 이야기했다. 그리고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이야기를 묵묵히 들었다.

“아! 맞다. 그리고 저희가 매화신단을 만들어 냈어요.”

“매화신단을?”

“네! 형이 화산을 떠난 후 신의 누나가 매화신단을 다시 재현해 냈어요.”

매화신단을 다시 재현해 냈다는 이야기에는 천하의 담호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오래전에 제조법이 사라진 매화신단을 현 시대에 다시 살려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뛰어난 천재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천재성만으로 매화신단 같은 영약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다.

종리연이 얼마나 많은 밤을 불면으로 지새웠을지 눈에 환히 보이는 듯했다.

갑자기 담호가 손을 뻗어 방진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도 고생 많았다.”

“에이! 제가 뭘요? 다 신의 누나가 했는걸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방진보의 얼굴엔 뿌듯한 감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실제로 방진보의 도움이 없었다면 종리연도 매화신단을 다시 만들어 내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을 것이다.

“아, 참!”

갑자기 방진보가 생각났다는 듯이 품에 손을 집어넣었다.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보인 그의 손엔 조그만 목함이 들려 있었다. 방진보는 목함을 담호에게 내밀었다.

“뭐냐?”

“매화신단이에요. 문주님이 형에게도 전해 주라 했어요.”

“나는 이제 이런 것이 필요 없다.”

담호가 고개를 저었다.

영약을 이용해서 내공을 증진시키는 데는 한계가 존재한다. 담호처럼 내공이 이미 극에 달한 절대고수에겐 영약을 통한 내공의 증진은 기대할 수 없었다.

담호는 매화신단을 거절했지만, 방진보가 억지로 손에 쥐어 주었다.

“문주님도 알고 계세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비상시를 대비해 가지고 계시라고 했어요.”

매화신단 같은 영약은 단순히 내공의 증진 효과뿐만 아니라 요상약으로서의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어지간한 내상약보다 월등히 뛰어난 효과를 자랑했다.

담호처럼 온몸을 내던져 싸우는 무인일수록 많은 상처를 달고 살았다. 그 사실을 잘 알기에 운경은 방진보의 손에 매화신단을 쥐어 보냈다.

담호는 그런 운경의 배려를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었다. 그는 매화신단이 든 목함을 품에 집어넣었다.

“헤헤!”

그제야 방진보가 안심한 표정으로 웃었다.

담호는 방진보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얼굴이지만, 체격만 놓고 보자면 어지간한 어른 못지않게 컸다.

방진보에게서는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방진보의 나이 대의 무인은 감히 성취하기 힘들만큼 강력한 내공이었다.

방진보가 쌓은 내공엔 그의 피땀이 녹아 있었다. 오행군자공을 이용해 음식의 재료가 가진 원래의 효능을 최대한 북돋은 후 자신의 몸으로 시험을 반복했다.

그렇게 수 년을 노력한 끝에 방진보의 오행군자공은 상생(相生)의 경지에 올랐다.

오행의 조화(造化)까지는 아니더라도 상통(上通)하는 경지까지는 꿈꿔 볼 만한 위치에 도달한 것이다.

담호는 그런 방진보의 경지를 한눈에 꿰뚫어 보았다. 무언가 계기만 주어진다면 방진보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는 벽을 허물고 한층 더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담호는 그런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몸이나 풀어 볼까?”

“지금 당장요?”

“문제 있느냐?”

“아뇨!”

방진보가 힘껏 고개를 저었다.

담호와 같은 절대고수에게 지도를 받는다는 것은 모든 무인들의 꿈이었다. 그것은 방진보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요리에 뜻을 두고, 오행군자공을 그쪽으로 발전시켜 가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방진보는 오행군자공을 운용했다. 그러자 오행의 기운이 움직이며 방진보의 몸에서 형형색색의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오행의 기운이 표출되는 것이다.

“챠앗!”

방진보가 그대로 담호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보통 대련이라고 하면 각종 예의와 형식을 차리기 마련이었지만 방진보에겐 그런 것이 없었다. 담호가 싸우는 것을 곁에서 가장 오래 지켜봤기에 그의 싸움 방식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극한의 효율을 추구하는 독행류의 방식을.

방진보의 손에서 화산파의 절학이 풀려 나왔다. 방진보는 그야말로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을 펼쳤다.

쉬쉬쉭!

새벽 동이 터오르는 빈객청의 연무장은 방진보의 그림자로 가득 찼다.

그때 누군가 종종걸음으로 빈객청 안으로 들어왔다. 얼굴에 피곤한 빛이 가득한 여인은 바로 은소청이었다.

남궁창의 죽음 이후 그녀와 다른 상단의 주인들은 무림맹의 기부 금액을 의논했다.

압력의 주체였던 남궁창이 없어졌기에 한결 편안해진 분위기에서 회의는 진행됐지만, 오히려 결론을 내는 것은 더 늦어졌다. 그래서 꼬박 밤을 지새우고 만 것이다.

빈객청 안으로 들어오는 은소청의 얼굴엔 설렘이 가득했다. 오랜만에 담호를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오라버니, 진보…….”

쾅!

“크헉!”

그 순간 뇌음이 터지고 누군가 튕겨져 나와 그녀의 발치에 나뒹굴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은소청의 얼굴이 경직됐다.

“지, 진보야?”

먼지투성이가 되어 나뒹구는 이는 방진보였다. 하지만 방진보는 은소청이 부르는 것도 듣지 못했는지 일어나자마자 바로 담호에게 덤벼들었다.

방진보는 전력을 다해 담호에게 부딪쳐 갔다. 하지만 담호란 벽은 너무 높았다. 수없이 무너지고, 좌절했다. 그래도 방진보는 또다시 일어나 전력으로 부딪쳤다.

“아!”

그런 방진보의 모습에 은소청은 눈을 떼지 못했다.

여명(黎明) 아래 자신의 모든 것을 던져 거대한 벽에 부딪쳐 가는 방진보의 모습은 그녀에게 커다란 감동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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