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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76화 (37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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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6화 1장. 누가 누구에게 자격을 묻는가?(1)

숭산에서 가장 바쁜 이를 뽑으라면 반드시 거론될 만큼 은소청 역시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남궁창의 죽음 이후 무림맹과 거래 조건도 좋아졌기에 그녀는 더욱 의욕을 갖고 열심히 일했다.

“일단 등봉현에 커다란 창고를 만드는 게 우선이야.”

은소청은 탁자 위에 펼쳐져 있는 지도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지도를 보며 창고가 들어설 최적의 위치를 찾고 있었다. 몇몇 예정지가 지도에 빨간 점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일단 이곳이 좋기는 한데 너무 비싸.”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곳은 땅값은 이미 천정부지로 올라 있었다. 등봉현에 수많은 무인들이 유입되자 그들의 주머니를 노린 무기 공방과 기루 들이 연이어 문을 열었다. 갑자기 사람들이 모이면서 덩달아 땅값도 상승했다.

그 때문에 은소청을 비롯해 수많은 상단들이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전쟁은 큰 기회였기에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직접 가 봐야겠네.”

워낙 큰돈이 투입되는 일이었기에 직접 부지를 보고 결정하는 것이 옳을 듯싶었다.

은소청은 당장 상단의 무인들을 호출해 소림사를 나섰다. 숭산을 내려와 그녀가 향한 곳은 등봉현 북쪽에 자리를 잡고 있는 오래된 고택이었다.

오래전에 고관대작이 살았다는 고택은 너무 낡아서 제대로 사용하자면 많은 수리 비용이 들 것 같았다. 하지만 워낙 부지가 넓어 일단 매입하면 활용하는 것은 문제가 없을 듯싶었다.

은소청은 내친김에 주인을 만나 계약까지 마무리했다.

“됐어. 이 정도면 당분간 문제없을 거야.”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화산파가 있는 화음현에 이어 소림사가 있는 등봉현에도 거점을 마련했다. 비록 출혈이 크지만 그래도 미래를 생각한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였다.

“아가씨, 출혈이 너무 큰 게 아닙니까?”

은소청을 수행하는 상인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지금 당장이야 재정에 큰 부담이 되겠지만 미래를 보자면 당연히 해야 할 투자예요.”

“그야 그렇지만…… 혹시라도 소림사와 무림맹이 마교에 지면 이 모든 것이 잿더미가 될 겁니다.”

“어차피 마교가 득세하면 우리는 끝이에요.”

“으음!”

“애당초 선택의 여지는 없어요. 시기의 문제만 있을 뿐.”

“알겠습니다. 아가씨의 뜻이 그렇게 확고하다면야.”

상인이 그제야 수긍을 하고 뒤로 물러났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은소청의 상재는 매우 뛰어난 수준이었다. 특히 대국을 읽는 큰 시야와 통 큰 배포는 상계에서 오랫동안 구른 능구렁이들마저도 감탄할 정도였다.

은가보에 소속된 상인들과 무인들은 은소청을 은가보의 공식 후계자로 인정하고 있었다. 이제까지 보여 준 그녀의 행보와 결과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은소청은 홀가분한 기분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해가 지기 전에 소림사로 돌아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진보는 아직도 수련을 하고 있으려나?’

요 며칠 동안 방진보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방진보는 별채에 틀어박힌 채 담호에게 단련을 받고 있었다. 문을 꽉 걸어 잠그고 있어 소림사의 승려들은 물론이고 초연운조차도 안에 들어가지 못할 정도였다. 당연히 은소청에게도 출입은 허락되지 않았다.

은소청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불만스러운 일이 생길 때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그녀만의 습관이었다.

그녀의 얼굴을 본 상인들과 무인들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은가보의 후계자답지 않게 순진무구한 표정 때문이었다. 그들은 오랜 세월 은소청을 지켜봐 왔기에 이런 표정이 방진보를 만난 후 생겨난 버릇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 숙수가 우리의 주인이 되는 건가?’

‘거참! 세상일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더니…….’

그렇게 상인들과 무인들이 각자의 상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콰당탕!

갑자기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앞쪽 객잔의 벽이 부서지며 대여섯 명의 사내들이 튀어나왔다.

“크윽!”

“제기랄!”

거친 인상의 사내들의 얼굴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은 입가에 흐르는 피를 소매로 닦으며 방금 전 자신들이 뚫고 나온 객잔의 벽을 바라봤다.

“이놈!”

“감히 우리 용천육걸(龍泉六傑)에게 시비를 걸다니.”

그 순간 누군가 뚫린 벽으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이제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얼굴의 무인이었다. 머리에는 영웅건을 질끈 동여매고, 푸른색 전포를 입은 그의 모습은 무척이나 영준해 보였다.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그의 허리에 걸린 채 덜렁거리는 커다란 도였다.

일반적인 도보다 두 배는 더 넓고 무거워 보이는 큼직한 도는, 아직 애티가 가시지 않은 소년의 얼굴과는 전혀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마치 한 번도 요리해 보지 않은 부잣집 귀공자가 부엌칼을 잡고 있는 듯한 이질적인 느낌을 풍겼다.

소년이 사내들을 보며 이죽거렸다.

“용천육걸이라고? 용천육견은 들어 본 적이 있는데…….”

“이익!”

“당신들 악명이 아주 대단하더군. 용천에서 당신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말이야. 용천에서 여섯 마리 개새끼한테 물리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데, 정말이야?”

소년의 말에 스스로를 용천육걸이라 칭했던 사내들의 얼굴이 보기 싫게 일그러졌다. 소년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용천육걸은 절강성 용천 지역에서 온갖 패악질을 자행했다. 용천 자체에 큰 문파가 없었기에 그들의 악행을 제지시킬 이들은 존재하지 않았다.

기분 내키는 대로 살육을 자행하고, 수많은 여인을 겁간했다. 그렇게 용천의 제왕으로 군림하던 그들이 이곳 등봉현으로 들어온 것은 역설적이게도 마교 때문이었다.

마교의 혈풍은 이미 천하를 휩쓸고 있었다. 중원 남부가 그들의 영향하에 들어갔다. 사정은 용천이 있는 절강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절강성에는 구대문파와 같은 거대 문파가 존재하지 않았다. 그 덕에 이제껏 온갖 패악질을 부리고도 무사할 수 있었지만, 역설적으로 그 때문에 마교의 혈풍이 천하를 휩쓸자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그들은 차라리 마교에 투신할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마교는 어중이떠중이 무인들을 철저히 배척했다. 마교에 투신했다가는 딱 이용만 당하다가 버려지기 좋다는 판단이 들었다. 그래서 그들은 차라리 무림맹에 투신하기로 했다.

적당히 과거 이력을 세탁하고 무림맹에 투신한 후 공을 세우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다. 그런데 오늘 뜻밖에 처음 보는 낯선 소년이 그들의 정체를 알아보고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용천육걸의 우두머리 곽정치가 소리쳤다.

“그래서…… 지금 우리랑 싸우겠다는 거냐?”

“싸우다니? 무슨 그런 소리를…….”

“그럼?”

“그냥 밟아 죽이겠다는 거지. 당신들은 마교와의 싸움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테니까. 오히려 뒤통수를 칠 확률이 높기만 하지.”

“그런…….”

곽정치의 턱 근육이 씰룩거렸다.

용천의 제왕으로 온갖 패악질을 부리며 살아왔던 그였다. 무공도 무공일뿐더러 배포도 좋아 이제까지 어떤 적에게도 기세에서 밀렸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 눈앞에 있는 소년에게는 이상하게도 꺼림칙한 마음이 들었다.

그때 용천육걸의 둘째와 셋째가 소리쳤다.

“형님, 저 어린 새끼의 말을 더 들을 필요 없소. 족칩시다.”

“그럽시다. 우리가 언제부터 남의 협박을 듣고도 가만있었소?”

그들은 곽정치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무기를 뽑아 들었다. 그들은 남들을 협박하고 약탈하는 데만 익숙했지, 모욕이나 도발을 감당하는 덴 익숙하지 않았다.

“자, 잠깐만…….”

곽정치가 급히 그들을 만류하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미 분노가 머리끝까지 잠식한 그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소년에게 달려들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곽정치도 어쩔 수 없이 공격하는 데 합류했다. 어쨌거나 그는 용천육걸의 대형이었으니까.

쉬가악!

순식간에 강력한 검기와 도기가 소년을 덮쳐 갔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은가보의 무인들이 놀라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저, 저거?”

“말려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은소청도 눈앞에서 벌어진 갑작스러운 싸움에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썼다.

한편으로는 소년이 무엇을 믿고 저렇게 용천육걸을 도발한 것인지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움직이지 않고 소년을 지켜봤다.

“죽어랏! 이 건방진 애송이.”

“챠아앗!”

용천육걸의 공격이 폭풍처럼 매섭게 휘몰아쳤다. 그때까지도 소년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은소청은 검기와 도기가 몸에 닿기 직전 소년의 입꼬리가 슬며시 말려 올라가는 모습을 봤다. 마치 즐거워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개구쟁이 같은 미소였다.

그 미소를 보는 순간 은소청은 알 수 없는 섬뜩함을 느꼈다.

씨이이액!

그 순간 날카로운 파공음이 거리에 울려 퍼졌다. 흥미진진한 얼굴로 싸움을 구경하던 사람들은 고막을 자극하는 날카로운 소리에 비명을 지르며 주저앉았다.

은소청이 망연히 눈을 끔뻑거렸다.

방금 전까지 그토록 사납게 몰아치던 검기와 도기가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용천육걸이 소년을 공격하던 자세 그대로 멈춰 서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마술처럼 소년의 손엔 커다란 도가 들려 있다는 것이다.

소년은 커다란 도를 내뻗은 자세 그대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은소청뿐만 아니라 거리에 있던 모든 이들이 눈을 끔뻑거렸다. 수많은 이들 가운데 단 한 명도 소년이 언제 도를 뽑아 들었는지 보지 못했다.

“무슨?”

그 순간 은소청은 얼굴에 축축한 느낌을 받고 자신도 모르게 손으로 문질렀다. 얼굴을 문질렀던 손을 바라보던 은소청의 눈이 크게 떠졌다. 손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피?”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얼굴에 묻은 것이 핏방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은소청뿐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는 은가보 무인들과 상인들의 얼굴에도 핏방울이 점점이 뿌려져 있었다.

그때였다.

콰르르!

우두커니 서 있던 용천육걸이 갑자기 썩은 짚단처럼 무너져 내렸다.

“우웩!”

“크윽!”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던 사람들이 갑자기 구역질을 했다. 용천육걸이 단순히 쓰러진 것이 아니라 수십 조각으로 잘게 해체가 되어 무너졌기 때문이다.

바닥에 쌓이는 시뻘건 육편 아래 선혈이 흥건히 고였다.

사람들은 단 한순간에 인간이 고깃덩이가 되는 끔찍한 기적을 목도하고 극도의 혼돈에 빠졌다.

그 모든 것이 소년이 만들어 낸 참극이었다.

소년은 커다란 도를 휘둘러 도신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그러자 도신에 새겨진 참마(斬魔)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글자를 알아본 누군가 소리쳤다.

“차, 참마도객이 분명해. 저렇게 끔찍한 도법은 참마도객밖에 펼칠 수 없어.”

“저 소년이 참마도객(慘魔刀客) 대군상이라고? 세상에!”

“맙소사! 사신성(四新星)이란 말이야?”

곳곳에서 비명과 같은 음성이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강호 최고의 후기지수는 구무룡이었다. 하지만 강호는 넓고 인재는 끊임없이 배출되기 마련이었다. 사신성은 구무룡 이후 등장한 강호 최고의 기재들이었다.

천궁사수(天弓射手) 염초월.

탈명객(奪命客) 오경의.

참마도객(慘魔刀客) 대군상.

환상선자(幻想仙子) 녹수빙.

그들의 존재감이 강렬한 것은 바로 전란의 시대에 두각을 나타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교와의 싸움에서 공을 세웠고, 그 덕에 더욱 깊이 사람들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되었다.

사신성 중에서도 특히 잔혹한 손속으로 유명한 이가 바로 참마도객 대군상이었다.

별호에 들어간 ‘참마(斬魔)’라는 단어처럼 그는 마인을 무참히 참살하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것도 수십 조각이나 내서 말이다. 그래서 인도부(人屠夫)라는 또 다른 별호를 얻기도 했다.

은소청이 눈살을 찌푸렸다.

강호의 정세에 민감한 상인답게 그녀 역시 사신성에 대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참마도객 대군상의 잔혹한 성정도 말이다. 하지만 설마 그 유명한 대군상이 이렇게 어린 소년인지는 몰랐다.

아무리 많이 봐 줘야 은소청보다 겨우 두세 살 정도 많아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어린 나이에 이토록 가공할 무위와 잔혹한 손속이라니.

은소청은 새로운 살성(殺星)의 등장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등골이 오싹했다.

그때였다.

자신이 만들어 낸 참극을 감상이라도 하듯 웃으며 바라보던 대군상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은소청과 은가보의 무인들을 바라봤다.

“이런! 하필이면 그쪽에 피가 튀었네.”

대군상이 은소청을 향해 다가오며 말했다.

그의 말처럼 은소청과 은가보 무인들의 전신에는 피가 점점이 튀어 있었다. 하지만 대군상은 다른 무인들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오로지 은소청만을 바라봤다.

“미안해! 본의 아니게 폐를 끼쳐서.”

“아니에요.”

“내 이름은 대군상이야. 그쪽은?”

“…….”

은소청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왠지 대답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강렬한 대군상의 눈빛은 그녀의 대답을 강요하고 있었다.

결국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은가보의 은소청이에요.”

그녀의 대답을 듣는 순간 대군상의 눈에 이채가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입가에 예의 짓궂으면서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대군상의 잔혹한 손속을 본 은소청의 눈에 그의 미소는 더 이상 장난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은가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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