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산권마-378화 (378/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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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8화 1장. 누가 누구에게 자격을 묻는가?(3)

“우리 조카가 마음에 둔 처자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은가보의 은소청 소저라고 합니다.”

“은가보라면 조카의 처가가 될 만한 자격이 충분하지.”

언주천이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에 은소청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언 대협! 저는 조카분을 오늘 처음 뵈었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는가? 내 조카가 마음에 두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그런…….”

“왜, 내 조카가 자격이 없는 것 같나? 강호에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저 아이의 가문도 강호의 명문가 중 하나라네. 사신성의 일원일 정도로 재능도 출중하고, 무엇보다 내 조카라네. 세상에 이보다 더 좋은 조건을 가진 자가 몇이나 있을까?”

언주천의 목소리엔 자부심이 가득했지만, 듣는 이에겐 거부감이 들게 하기 충분했다.

은소청이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제 의견은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요?”

“그건 아닐세. 자네의 의견도 물론 중요하지. 하지만 그보단 자네 부친의 의견이 더 중요하지 않겠는가? 내 조만간 자네의 집에 사람을 보내서, 아니 내가 직접 찾아가 담판을 짓겠네. 우리 조카라면 자네의 부친도 거절하지 않을 걸세.”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군요. 전 이미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리고 그 사람은 언 대협의 조카가 아니에요.”

결국 참다못한 은소청이 벽력탄 같은 선언을 했다. 그에 대군상이 화들짝 놀랐다.

“설마 그 사람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아니겠지?”

“맞아요!”

은소청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잘 익은 홍시처럼 온통 붉어져 있었다.

홧김에 말했다고 하지만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이 보는 자리에서 방진보에 대한 마음을 고백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놀란 이는 바로 방진보였다.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공개적인 자리에서 들으니 심장이 터질 것처럼 격렬하게 뛰었다.

‘소청!’

방진보가 뜨거운 시선으로 은소청을 바라봤다. 그에 은소청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 순간 대군상이 노성을 내뱉었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용납할 수 없다. 강호의 재녀는 능력이 있는 자만이 얻을 수 있는 법. 너 같은 무지렁이가 감히 은 소저와 같은 재녀를 감당할 수 있겠는가? 지금이라도 주제를 알고 물러나길 바란다.”

그는 방진보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방진보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럴 수는 없어요.”

“뭣이?”

은소청과 함께 있으면 그저 좋았다. 하지만 확신할 수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단순한 호감인지, 아니면 그 이상의 것인지. 하지만 은소청의 곁에 서 있는 대군상을 보는 순간 깨달았다.

그 짧은 순간 자신이 질투를 하고 있었다는 것을. 자신이 아닌 다른 이가 그녀의 곁에 서 있는 사실 자체에 그는 분노했다. 그 말은 곧 자신이 은소청을 친구, 그 이상의 감정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좋아해!”

누구를 가리키는지 주어가 빠진 말이었지만,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았다. 은소청을 향해 하는 말이라는 것을.

은소청의 눈에 격동의 빛이 어렸다.

“응!”

그녀가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대군상의 눈썹이 하늘로 치켜 올라갔다.

“감히!”

자신을 눈앞에 두고 사랑 놀이를 하는 두 사람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는 모욕을 받았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녀와 함께할 자격이 있다고?”

“자격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그녀를 좋아하는 것은 분명해요. 심장이 터질 만큼.”

“이익!”

분노한 대군상의 어깨가 들썩였다. 그 순간 언주천이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조카, 진정하게.”

“하지만…….”

“내가 해결하지.”

언주천의 말에는 묵직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에 대군상이 조금은 진정했다.

그제야 언주천이 방진보에게 말했다.

“아직 깊은 사이가 아닌 것 같은데 이쯤에서 물러나게나.”

“그럴 수는 없어요.”

“자네만 상처 입을 게야.”

“무슨?”

“사랑도 자격이 있어야 하는 걸세. 특히 은 소저 같은 경우라면 말일세. 그녀의 부친이 자네를 용납할 것 같은가? 자네만 상처받을 거야. 그 전에 알아서 물러나게.”

“그럴 수는 없어요.”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군. 군상은 내 조카일세. 진주언가를 배경으로 두었다는 뜻이지. 무력과 배경, 그 어떤 것도 자네는 군상의 상대가 되지 못하네. 그러니 알아서 물러나게. 자네를 안타깝게 생각해 정중하게 충고하는 걸세.”

“그게 충고란 건가요?”

“원래 분에 넘치는 보물은 화를 부르는 법일세. 그 사실을 잊지 말게. 그리고 내가 군상의 뒤에 서 있다는 것도. 참고로 우리 진주언가는 군상을 아주 많이 아낀다네.”

언주천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조곤조곤했다. 하지만 모두의 귀에 또렷이 들렸다. 그만큼 강한 내공을 가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방진보가 중얼거렸다.

“진주언가?”

“그래! 감당할 수 있겠는가?”

“감당할 수 있다면요?”

“감히!”

진주언가를 언급했음에도 방진보가 뜻을 굽히지 않자 이번에는 언주천이 분노했다.

그는 이제까지 자신이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연장자로서 충고도 충분히 했는데 상대가 받아들이지 못하고 저렇게 나오자 분노했다.

하지만 그의 노기 어린 모습에도 방진보는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꼭 큰 배경이 있거나 집안이 좋아야 사람을 좋아할 수 있는 건가요? 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전 소청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요. 그 마음 하나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그 후의 일은 제가 해결하고 감당해야 할 일이지, 언 대협의 강요나 설득으로 물러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허!”

방진보의 당돌한 대답에 언주천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천하의 진주언가가 이렇게 무시당하다니. 자네 사문이 어떻게 되는가?”

“사문요?”

“설마 사문도 없는 것은 아니겠지?”

언주천의 말에 방진보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였을 뿐이다. 이내 그가 말했다.

“제 사문은 화산파예요.”

“화산파라고?”

“네! 화산파가 제 사문이에요.”

“자네, 지금 나한테 거짓을 고하는 건가? 화산파가 봉문을 하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알고 있는 사실. 화산파의 제자들은 화산을 벗어날 수 없는데, 자네가 화산파의 제자라는 건가?”

언주천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내공이 실린 그의 목소리에 많은 이들이 귀를 막았다. 하지만 정면으로 마주한 방진보는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했을 뿐인데 언주천이 왜 이러는지 방진보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언주천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왔다.

“다시 한 번 묻겠네. 자네가 정말 화산파의 제자 맞는가?”

“맞아요.”

“그래도…….”

방진보가 계속해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 언주천의 화가 폭발하려는 순간이었다.

“그는 화산파의 제자가 맞아.”

언주천의 귓전에 울려 퍼지는 차가우면서도 나직한 목소리. 순간 언주천은 전신에 소름이 올라오는 것을 느끼고 급히 뒤를 돌아봤다.

그제야 언주천은 볼 수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장포를 입고 있는 사내를. 산발한 머리에 가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언주천은 그의 정체를 단숨에 알아보았다.

“궈, 권마?”

그는 바로 담호였다. 이제까지 말없이 지켜보던 그가 나선 것이다.

담호가 언주천을 향해 걸어왔다.

한쪽 발을 살짝 절면서.

담호 특유의 엇박자 걸음이었다.

예전에는 그의 걸음을 보고 웃는 이가 무척이나 많았었다. 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웃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담호를 비웃었던 자들 중에 아직까지 살아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단 것을.

이 자리에 있는 이들 중 담호를 모르는 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은 언주천도 마찬가지였다.

언주천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다, 당신이 왜?”

아무리 생각해도 담호가 왜 이곳에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리고 그가 왜 참견하는지도 말이다.

그 순간 담호가 입을 열었다.

“진보는 내 동생이야. 그는 화산파의 제자가 맞아.”

“그런…….”

“무슨 문제 있나?”

언주천의 눈동자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흔들렸다. 설마 이 순간에 담호가 나서서 방진보의 신분을 보장할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언주천은 진주언가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권력자이자 무인이었지만, 감히 담호를 감당할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소림사와 무림맹의 전 무인이 모인 자리에서 군사 남궁창을 죽인 담호였다. 강대한 무공은 둘째치고 일단 적이라 판단하면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과단성과 끝을 보고자 하는 잔혹성은 쉽게 감당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아군일 때는 누구보다 든든하지만 적으로 두게 되면 후환이 끝이 없을 그런 재앙 같은 존재였다.

그런 담호가 진주언가를 두려워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만큼 담호는 버거운 존재였다.

언주천은 감히 그와 척을 질 생각이 없었다.

“문제……없습니다.”

그가 고개를 숙였다.

오대세가 중 하나인 진주언가의 장로가 물러서는 장면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그 모습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강호에서 담호의 위세는 독보적이었다.

언주천은 시류를 파악하고 물러섰지만 대군상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가 입술을 질겅 깨문 채 담호를 바라봤다.

담호를 바라보는 그의 눈에 분노와 질시의 빛이 어렸다.

일찍이 사신성의 일원이 된 대군상이었다. 어려서부터 두각을 드러낸 악마적인 재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그래서 야망이 남달랐다.

그가 마교의 무인들을 그렇게 잔혹하게 죽인 것 역시 명성을 드높이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명성을 쌓아 가다 보면 언젠가는 강호의 최정상에 설 수 있을 거란 확신이 있었다.

담호에 대한 소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전설이라 불려도 부족하지 않은 그의 위용도.

직접 본 담호는 소문보다 오히려 더 대단해 보였다. 아직은 그가 어떻게 비벼 볼 수 없는 그런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방진보는 아니었다.

“그가 화산파의 제자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담호의 시선이 그를 향했다.

두 눈이 마주치는 순간 대군상의 등골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담호의 새까만 눈동자엔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대군상이라고 다른 사람과 다르지 않았다.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데도 이를 악물고 담호의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은 그의 자존심과 오기 때문이었다.

“나는 결코 그녀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자격이 없는 자에게 그녀를 양보하고 싶은 생각 따윈 없단 말입니다.”

“자격이라…….”

“강호에선 오직 강한 자만이 모든 것을 가질 권리가 있습니다. 저는 그에게 묻고 싶습니다. 과연 그녀를 가지고 지킬 만한 자격이 있는지.”

“그러는 너는 무슨 자격으로 그에게 묻는 거지?”

“그건…….”

순간 대군상의 말문이 턱 막혔다.

방진보에게 자격을 말하지만, 막상 그 역시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었다.

은소청을 만난 것도 방금 전이었고, 지금의 행동도 억지를 부리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대군상의 얼굴이 수치스러움으로 붉게 물들어 갔고, 입술이 푸들푸들 떨렸다.

생전 처음 겪는 수치였다. 그래서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담호에게 화를 풀 수도 없었다. 담호는 그가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자칫하다가는 자신뿐 아니라 외가인 진주언가까지 화를 입을 수 있었다.

대군상의 시선이 방진보를 향했다. 담호에게 화를 풀 수 없으니 방진보를 분노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저런 별 볼 일 없는 놈에게 내가 점찍은 여자를 빼앗기다니. 크윽!’

할 수만 있다면 단숨에 방진보의 머리를 깨부수고 싶었다. 담호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 그저 분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자격을 묻겠다 했습니까?”

방진보가 앞으로 나섰다.

“진보야!”

등 뒤에서 은소청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를 불렀다. 방진보는 그런 은소청에게 미소를 보여 줬다.

“괜찮아!”

“하지만…….”

“나도 무인이야.”

방진보의 말은 은소청의 가슴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방진보는 그런 사실도 알지 못한 채 대군상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신은 은소청을 좋아한다.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무시당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설령 그 상대가 강호 최고의 기재 중 한 명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방진보의 마음이었다.

비록 숙수의 길을 걷고 있지만, 그도 무인이었다.

방진보가 대군상에게 포권을 취했다.

“화산파의 대숙수 방진보가 참마도객 대군상 소협에게 비무를 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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