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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79화 (37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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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9화 2장. 뒷물결이 앞 물결을 밀어낸다(1)

“비무?”

대군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불감청고소원(不敢請固所願)이라고 했던가?

감히 청할 수는 없지만 바라마지 않던 상황이 펼쳐졌다. 그것도 눈엣가시 같은 방진보에 의해서.

“좋다! 비무를 받아들이겠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목소리로 말이다.

이제 와 은소청과 잘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여자라도 정이 떨어질 만큼 질척하게 행동했으니까.

하지만 그 대가로 방진보에게만큼은 본때를 보여 주고 싶었다. 감히 자신에게 망신을 준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 줄 것이다.

‘숙수? 결국 음식이나 만드는 천한 직업 아니던가?’

대군상이 이를 빠득 갈며 도를 꺼내 들었다.

햇빛이 도에 부딪쳐 갈라지며 사방으로 비산했다.

참마도(斬魔刀).

외가인 진주언가에서 선물한 명도였다.

천하에서 손꼽히는 장인이 만들어 날카롭기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수많은 이들의 피를 머금은 참마도에서는 음산한 귀기(鬼氣)마저 느껴졌다.

“으음!”

“정말 대단하군.”

주위에 모인 사람들이 몸을 흠칫 떨며 뒤로 물러났다.

성격은 어떨지 모르지만 대군상의 실력만큼은 진짜였다. 거기에 참마도라는 귀물까지 더해지니 그 기도가 실로 살벌했다. 하지만 그에 맞서는 방진보의 표정은 평온했다.

대군상의 기파가 바늘처럼 피부를 아프게 찔러 왔지만, 이상하게도 두렵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상대의 기파를 느끼자마자 몸 안에 잠재해 있는 오행의 기운이 기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섯 가지의 기운이 상통하면서 전신에 활력이 느껴졌다.

방진보가 허리에 차고 있던 주도를 꺼내 들었다.

“저게 뭐야?”

“설마 요리할 때 쓰는 칼?”

짧고 뭉툭한 주도의 등장에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설마 신성한 비무에 주도를 꺼낼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몇몇 이들의 얼굴엔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강호인들끼리 우열을 겨루는 비무는 신성한 것이었다. 그런 신성한 대결에 요리할 때나 쓰는 칼을 꺼낸 것 자체가 무인들에겐 모욕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성질 급한 사람들은 욕설을 내뱉었고, 꽤 많은 이들이 실망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방진보의 표정엔 별반 변화가 없었다. 그만큼 정신 수양이 깊다는 증거였다.

“놈!”

주도를 본 대군상 역시 그들과 반응이 다르지 않았다. 그는 방진보에게 무시를 당했다고 생각했다.

“화산파의 제자…… 아니, 숙수라고? 숙수 따위가 감히 나를 능멸한단 말이지? 이곳에서 네놈의 팔 하나를 잘라 내어 죄를 묻겠다.”

팟!

동시에 그가 대지를 박찼다.

순식간에 공간을 단축해 방진보의 앞으로 쇄도해 온 그가 참마도를 휘둘렀다.

쉬앙!

절정의 고수도 막기 힘들 만큼 날카로운 각도와 세기로 참마도가 날아왔다.

촤앙!

하지만 방진보는 어렵지 않게 대군상의 도를 쳐 냈다. 예상치 못한 방진보의 기민한 반응에 대군상이 더욱 노해 소리쳤다.

“제법 한 수를 숨겨 둔 모양이구나. 어디 이것도 받아 봐라. 챠앗!”

참마회령도(斬魔懷靈刀).

오늘날 그를 만든 성명절기가 펼쳐졌다.

도기가 그물처럼 쫙 펼쳐지더니 그대로 방진보를 덮쳐 왔다. 하지만 방진보는 당황하지 않고 보법을 펼쳐 뒤로 물러났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움직이는 화산파의 상승 보법인 암향표(暗香飄)였다. 마치 누군가 등 뒤에서 줄을 걸고 당기는 것처럼 방진보는 그렇게 순식간에 십여 장이나 이동했다.

“잔재주를 펼치다니?”

대군상이 재빨리 비전의 보법을 펼쳐 방진보를 따라붙었다. 그리고 참마회령도의 절초를 연거푸 펼쳐 냈다.

최하학!

그의 참마도에 공기와 공간이 무참히 잘려 나갔다.

용천육걸을 무참히 죽인 바로 그 초식이었다. 단 일수에 사람을 수십 조각 낼 수 있는 무시무시한 공격이 방진보를 향해 연신 펼쳐졌다.

소름 끼치는 살의의 파동이 느껴졌다. 근원은 바로 대군상이었다. 그런데도 방진보는 두렵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군상의 살기는 실로 대단했다. 방진보와 별 차이가 나지 않는 나이를 감안하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렬했다. 하지만 그런 살기도 방진보의 굳건한 정신을 어쩌진 못했다.

방진보가 대군상의 공격을 피하는 와중에 슬쩍 고개를 돌려 담호를 바라봤다.

대군상의 살기가 제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담호에 비할 수는 없다. 대군상이 창공을 활공하는 매라면, 담호는 날개만으로도 천하를 뒤덮는 대붕이었으니까.

담호는 팔짱을 낀 채 미동도 없었다. 어떠한 경우에도 개입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하지만 방진보는 섭섭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담호가 그만큼 자신을 믿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촤하학!

참마도가 공간을 가르며 방진보의 미간을 향해 날아왔다.

반드시 죽이겠다는 일념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이미 단순한 비무 수준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고 행하는 생사투와 다르지 않았다.

언제나 미소가 가득하던 방진보의 얼굴이 처음으로 차갑게 변했다. 동시에 눈매도 날카롭게 변했다.

꾸욱!

주도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대군상처럼 도기가 맺히거나 눈에 띄는 변화는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변했다. 싹 바뀐 공기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었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느낀 이는 바로 방진보를 상대하는 대군상이었다.

‘이 녀석!’

갑자기 등골이 오싹했다.

후웅!

그 순간 은빛 실선이 그의 옆구리를 훑고 지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피륙이 베이는 것을 피했지만 옷자락이 길게 갈라져 펄럭였다.

방진보의 주도가 그의 공세를 뚫고 상처를 입힌 것이다. 그제야 대군상은 방진보가 자신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대단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이익!”

대군상이 피가 나도록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상황이 꼬이고, 또 꼬였다.

외가인 진주언가도 힘을 쓸 수 없는 상황이고,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자신했던 방진보는 오히려 예측할 수 없는 무위를 발휘해 그를 위험에 몰아넣고 있었다.

츄화학!

방진보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했다.

아직은 앳된 얼굴이 급속히 확대됐다. 늘 미소를 짓던 그 얼굴에 굳은 결의와 단호한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방진보의 주도가 현란하게 움직이는 순간 허공에 매화가 피어났다. 오직 삼십육매화검수들만이 익힐 수 있는 이십사수매화검(二十四手梅花劍)이 펼쳐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이십사수매화검은 매화검수들이 익힌 것과는 또 달랐다.

현소 진인이 오직 그만을 위해 다듬은 매화검, 아니 매화도(梅花刀)였다. 일반적인 도의 삼분의 일 크기밖에 되지 않는 주도로 펼치기 최적화된 도법, 그것이 바로 방진보의 매화도였다.

카카캉!

참마도와 주도가 연신 격돌했다.

방진보는 대군상만큼이나 빨랐고, 또 강렬했다.

두 개의 도가 격돌할 때마다 연신 불똥이 튀었고, 강렬한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저럴 수가!”

“대 소협에게 전혀 뒤지지 않잖아?”

천하의 대군상을 상대로 한 치도 밀리지 않는 방진보의 모습에 군웅들이 놀라 수군거렸다.

참마도객 대군상의 무위야 이미 강호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지만, 방진보는 전혀 생소한 인물이었다.

강호에 비록 기인이사와 기재들이 모래알처럼 많다고 하지만 대군상에 필적할 만한 기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당연히 대군상이 이길 거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방진보는 그들의 편견을 산산이 깨부수며 대군상과 호각으로 겨루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었다.

매화도를 펼쳐 대군상과 대등하게 싸우는 방진보의 모습은 군웅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져 주었다.

이십사수매화검을 제대로 펼치기 위해서는 상청심공(上淸心功)을 익혀야 했다. 때문에 삼십육매화검수들도 모두 상청심공을 익혔다. 하지만 방진보는 아니었다.

그가 익힌 것은 오행군자공, 본래라면 절대로 매화도를 펼칠 수 없어야 했다. 하지만 현소 진인과 담호, 두 사람이 힙을 합쳐 가능하게 만들었다.

‘지금이라면?’

방진보의 주도가 갑자기 눈부신 빛을 토해 냈다. 통상의 매화검과 달리 오색이 뒤섞인 도기(刀氣)였다.

우웅!

화기와 금기가 상통하고, 목기와 수기가 상생했다. 그리고 지기가 그 모든 기운을 한데로 이끌었다.

“챠핫!”

방진보가 강렬한 외침을 토해 냈다.

매화천리향(梅花千里香), 만인천일취(萬人千日取).

매화향이 천리를 갈 지니, 만인이 천 일을 취하리라.

매화도 최강의 초식이 연이어 펼쳐졌다.

순간 대군상은 온 세상이 매화에 뒤덮인 듯한 환상을 보았다. 아니, 그것은 환상이 아니었다. 실제로 방진보의 주도가 오색 찬연한 매화를 가득 피워 내고 있었다.

오행군자공을 익힌 방진보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신기였다.

엄청난 위기감이 대군상을 엄습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상대의 공격에 담긴 가공할 위력을.

피하고 반격하는 것이 순리였다. 하지만 대군상의 자존심이 발동했다. 발톱 사이에 낀 때만큼도 보지 않던 상대의 공격에 허둥지둥 피하는 우스운 꼴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정면으로 부딪쳐 부순다.’

대군상은 전 공력을 투입해 참마회령도의 최강 절초인 광륜혈마참(狂倫血魔斬)의 초식을 펼쳐 냈다.

“울어라! 참마도여!”

우웅!

그의 부름에 응해 참마도가 거친 울음과 함께 본래의 흉포한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방진보가 펼쳐 낸 매화도의 절초와 격돌했다.

쩌어엉!

순간 공간이 터져 나갔다.

두 개의 초식이 격돌한 공간이 일그러지고, 그 충격파가 일대를 해일처럼 휩쓸고 지나갔다.

“크윽!”

“헙!”

해일 같은 기파에 휩쓸린 무인들이 이리 넘어지고, 저리 엎어졌다. 오직 담호만이 제자리에 서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석상처럼 무미건조하던 그의 얼굴에 한 줄기 호선이 그어졌다. 담호가 드물게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다른 이들의 눈에는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만 보일 뿐이지만, 담호의 눈은 그 너머의 진실을 보고 있었다.

“오라버니.”

하지만 진실을 확인할 방법이 없는 은소청의 얼굴엔 근심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녀는 담호가 안심시켜 주길 바랐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이며 주먹을 가볍게 뻗었다. 그러자 엄청난 바람이 일어나 시야를 가리고 있던 자욱한 먼지를 순식간에 날려 버렸다. 그리고 진실이 만인 앞에 드러났다.

“아아!”

“이럴 수가!”

눈앞에 펼쳐진 믿기 힘든 결과에 사람들이 눈을 부릅떴다.

한 사람은 서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리고 무릎을 꿇은 자의 옆에는 두 동강이 난 도가 나뒹굴고 있었다.

“대 소협이…….”

“참마도가 부러지다니.”

무릎을 꿇은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자는 바로 대군상이었다.

핏발 선 눈동자에 공포와 혼돈, 그리고 불신의 빛이 어려 있었다.

“참마도가 한낱 주도 따위에…….”

그의 망막에 반 동강이 난 참마도가 맺혀 있었다.

대군상의 상징과도 같은 참마도였다. 그런 참마도를 동강 낸 것은 다름 아닌 방진보의 주도였다.

“어떻게?”

그가 발작적으로 고개를 들어 방진보를 바라봤다.

촤하학!

그 순간 그의 어깨에서 엄청난 양의 피분수가 치솟아 올랐다.

“군상아!”

이제까지 숨을 죽인 채 지켜보던 언주천이 급히 대군상에게 달려갔다. 그가 부축했을 때는 이미 대군상이 정신을 잃은 후였다.

그때였다.

“와아아! 화산의 대숙수가 참마도객을 꺾었다.”

“강호에 신성이 등장했다.”

“최고다!”

승부의 결과를 확인한 군웅들이 일제히 함성을 터트렸다.

강호는 언제나 새로운 영웅의 등장에 목말라 있었다. 새로운 영웅의 등장은 언제나 폭발적인 환호를 불러왔다. 그 등장이 극적인 것이라면 더욱 그랬다.

방진보의 등장이 그 경우였다.

근래 등장한 후기지수 중 최고라는 참마도객을 꺾은 화산파의 어린 무인. 그런데 그 어린 무인의 정체가 요리를 만드는 숙수라니.

사람들은 새로운 기재의 극적인 등장에 열광적인 환호를 보냈다. 그에 방진보가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런 식의 환호와 관심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사람들의 환호 중심에 서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은소청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리를 했기 때문이다.

“권마의 보증이 거짓이 아니었군.”

“허! 사신성을 능가하는 새로운 기재의 탄생이구나.”

사람들의 목소리가 귓전을 간질였다.

“진보야!”

은소청이 방진보에게 달려왔다.

‘형은?

방진보는 은소청을 껴안으며 담호를 찾았다.

사람들 사이로 사라지는 담호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홀로 맹주부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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