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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82화 (38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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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화 3장. 대지는 불타고,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1)

황혜령은 기지개를 켜며 객잔의 방을 나섰다. 그런 그녀의 안색은 파리하기만 했다.

그녀가 밖에 나와서 가장 먼저 본 사람은 바로 묵일광이었다.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일광!”

“몸은 좀 어떠십니까?”

“이젠 괜찮아. 오늘은 떠나도 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황혜령의 대답에 묵일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대로라면 며칠 전에 객잔을 떠났어야 했다. 하지만 황혜령이 갑작스럽게 앓으면서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황혜령은 갑작스러운 고열에 시달렸다. 힘들게 불러온 의원의 말로는 피로로 인한 몸살이라고 했다. 패왕채를 떠난 후 제대로 쉰 적이 없었기에 어쩌면 당연한 결과일지 몰랐다.

결국 그녀가 나을 때까지 객잔에 머물 수밖에 없었고, 오늘에서야 황혜령은 움직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주방에 말해서 죽을 만들어 두었습니다. 입맛이 없으시겠지만, 식당에 내려가셔서 드시지요.”

“그럴까?”

“조금이라도 드셔야 체력 회복이 훨씬 빠릅니다.”

“알았어. 부축해 줘.”

“제 손을 잡으십시오.”

묵일광이 커다란 손을 내밀었다. 황혜령은 그의 손에 의지해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침상에 누워 있었더니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도 황혜령은 힘을 내서 걸음을 옮겼다. 힘들다고 먹지 않으면 그렇지 않아도 약해진 체력이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묵일광에 의지해 겨우 일 층으로 내려온 황혜령의 살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언니?”

식당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 있는 이는 요사란이었다.

“동생!”

요사란이 고개를 들어 황혜령을 바라봤다.

“떠난 것 아니었어요? 언니.”

“계획이 바뀌었거든.”

“그래요?”

“그보다 몸은 좀 어때? 심하게 앓았잖아.”

“이제 겨우 진정된 것 같아요.”

“다행이네! 이리 와. 함께 앉자.”

“네!”

황혜령은 사양하지 않고 요사란의 맞은편에 앉았다. 요사란의 시선이 황혜령의 뒤에 서 있는 묵일광을 향했다.

“당신도 자리에 앉지 그래?”

“저는 이렇게 서 있는 것이 편합니다.”

묵일광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의 얼굴에서 경계의 빛을 읽은 요사란이 피식 웃었다.

함께 동행한 이래 묵일광은 단 한순간도 그녀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았다. 그런 묵일광의 태도가 짜증 날 만도 하건만 요사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무인에게 있어 타인을 경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묵일광의 그런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묵일광이 손짓을 하자 점소이가 죽이 담긴 그릇을 들고 달려왔다.

“각종 보양재가 들어간 영양죽입니다. 저기 대협분께서 얼마나 신경을 쓰셨는지 모릅니다.”

점소이가 죽 그릇을 내려놓으며 묵일광을 칭찬했다. 그에 묵일광이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다른 곳을 바라봤다.

황혜령이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수저를 들었다.

보양재가 얼마나 들어갔는지 모르지만 맛있는 것은 확실했다. 그녀는 조금씩, 하지만 쉬지 않고 죽을 먹었다.

요사란은 그런 황혜령의 모습을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봤다.

어느 정도 배가 차자 황혜령의 창백하던 얼굴에 조금씩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제야 묵일광은 안도 어린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그녀가 앓아서 얼마나 놀랐는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을 어서 떠나고 싶었지만 그녀를 간호해야 했기에 억지로 머물렀다.

“살 거 같아.”

황혜령이 수저를 놓으며 중얼거렸다.

이제야 기력이 조금씩 돌아왔다.

그래도 무공까지 익혔는데, 이 정도로 심하게 앓을 줄은 몰랐다. 정말 죽다 살아난 기분이었다.

요사란이 물었다.

“괜찮아?”

“그런 것 같아요.”

“다행이네.”

“언니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네요. 죄송해요.”

“죄송은…….”

요사란이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잠시 황혜령을 빤히 바라봤다. 그에 어색한 황혜령이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동생은 참 좋은 사람인 것 같아.”

“네?”

“그래서 좋아.”

요사란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그에 황혜령의 표정이 더욱 어색해졌다.

묵일광은 꺼림칙한 표정으로 요사란을 바라봤다.

벌써 며칠 전에 헤어졌어야 하는 인연이었다. 그런데 황혜령이 아프면서 인연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그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묵일광도 녹림에서 내로라하는 고수였다. 등에 지고 있는 도끼 두 자루면 누구에게도 쉽게 지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당연히 무위만큼 눈썰미도 대단했다. 그런 그가 보기에 요사란은 결코 범상한 존재가 아니었다. 마치 안개가 끼어 있는 산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모호했다.

그녀를 가린 안개는 너무 짙어 태산처럼 큰 산인지, 아니면 동네 뒷산만큼 조그만 산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더욱 꺼림칙했다.

묵일광이 황혜령에게 말했다.

“아가씨, 이제 그만 일어나셔야 합니다.”

“아! 그래.”

황혜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언니, 저희는 이제 가 볼게요.”

“그래! 인연이 있으면 또 보겠지. 어서 가 봐.”

“예!”

황혜령은 요사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한 후 묵일광과 함께 객잔 밖으로 나왔다.

“후아!”

황혜령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신선한 공기가 폐부 가득 밀려오자 정신이 한결 맑아졌다.

“나 때문에 시간이 많이 지체됐지?”

“아닙니다.”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미안해하실 것도, 고마워하실 것도 없습니다. 아가씨를 지키는 것은 제 일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묵일광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돌려 다른 곳을 바라봤다. 황혜령은 그런 묵일광을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봤다.

“여기서 조금만 더 가면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답니다. 그곳에서 말을 구해야겠습니다.”

“알아서 해.”

“네!”

두 사람은 부지런히 걸었다. 중간에 황혜령이 살짝 힘에 부친 듯 멈춰 서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묵일광이 멈춰서 보조를 맞춰 줬다.

그렇게 걷다 쉬다를 반복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상당한 거리를 올 수 있었다.

오랜 시간 걷느라 숨이 가쁜지 황혜령의 얼굴은 붉게 상기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 아름다워 보였다. 묵일광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넋을 잃은 채 바라보았다.

그가 정신을 차린 것은 관도 반대편에서 걸어오는 사람들의 기척을 감지한 후였다.

십여 명의 사람들이 관도를 가득 채운 채 걸어오고 있었다.

‘무인?’

묵일광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관도는 모든 이들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그런 곳에서 무인을 만나는 것은 별로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특히 지금처럼 전란의 시대에는 말이다.

문제는 무인들에게서 풍기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다는 것이다.

거칠 것이 없다는 듯이 관도 전체를 가득 채우고 걸어오는 모습 하며 사나운 눈빛이 특히 거슬렸다. 마치 먹잇감을 찾아 눈을 빛내는 늑대들 같았다.

그때였다.

“일광!”

황혜령이 조용히 그를 불렀다.

“예! 아가씨.”

“조용히 지나가자.”

“알겠습니다.”

묵일광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황혜령은 길 한쪽에 비켜서서 무인들이 지나가길 기다렸다.

가까워질수록 그들의 모습이 또렷하게 보였다. 얼마나 오래 씻지 않았는지 그들의 머리는 떡이 져 있었고, 얼굴엔 시커먼 때가 가득했다. 몸에 걸친 회색 피풍의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고, 피풍의 사이로 도와 검 같은 무기들이 덜렁거리고 있었다.

“크흐흐! 이러다가 전주님에게 혼나는 것이 아닌가 몰라?”

“우리가 말하지 않으면 전주님이 어떻게 알겠어?”

“하기는! 이 정도의 여흥도 허락되지 않는다면 무슨 재미로 살까?”

뭐가 즐거운지 그들은 웃고 떠들고 있었다. 그때마다 누런 이빨이 보였다.

‘혈향?’

그들이 스쳐가는 순간 지독한 피비린내가 묵일광의 콧속을 파고들었다. 순간적으로 정신이 다 아득해질 정도로 강렬한 혈향이었다.

묵일광이 자신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이것 봐라?”

“아무래도 알아차린 것 같지?”

“그런 것 같네.”

갑자기 무인들이 멈춰 서서 자신들끼리 떠들기 시작했다. 순간 묵일광은 강렬한 위기감을 느꼈다.

무인들이 몸을 돌려 묵일광과 황혜령을 바라봤다.

“계집이네?”

“예쁜데?”

“그러게! 아주 예쁘네.”

그들의 얼굴에 떠오른 것은 분명 색욕이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묵일광이 황혜령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그냥 가라.”

“어라? 곰탱이가 말도 하네.”

“고깃덩이가 덩치만 믿고 까부네. 흐흐!”

하지만 무인들은 오히려 묵일광을 비웃었다.

묵일광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공기가 바뀐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쉬각!

예고도 없이 무인들이 묵일광을 기습했다. 그들의 검이 시퍼런 빛을 발산하며 공기를 갈랐다.

“감히!”

채앵!

하지만 그들의 공격은 묵일광의 커다란 도끼에 막혔다. 이미 대비를 하고 있었기에 묵일광의 반격은 즉각 이뤄졌다.

촤하학!

어린아이 몸통만큼이나 커다란 도끼가 무시무시한 도기를 폭출해 냈다. 그에 기습 공격했던 무인들이 약간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이것 봐라.”

“제법이네!”

“그래 봤자 고깃덩이지.”

그들은 오히려 투지를 발산하며 묵일광을 공격했다.

“아가씨! 뒤로 물러나십시오.”

“응!”

황혜령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났다. 그녀는 이런 때일수록 자신이 물러나 운신의 폭을 넓혀 주는 것이 오히려 묵일광을 돕는 것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묵일광이 도끼를 휘두르며 외쳤다.

“웬 놈들이냐? 정체를 밝혀라.”

“흐흐! 지옥에서 염왕에게나 물어보거라.”

그들은 오히려 묵일광을 조롱하며 공격해 왔다.

카카캉!

도끼와 낭인들의 무기가 격돌하며 사방으로 불똥이 튀었다. 개개인의 무력은 묵일광에 비할 수 없었지만, 십여 명이나 합공을 하니 그 위력이 엄청났다. 때문에 묵일광도 일시지간 어쩌지 못하고 방어에 치중해야 했다.

순식간에 십여 합이 넘게 격돌했다.

낭인들의 공격은 실로 매서웠다. 먹이를 노리는 늑대처럼 잔혹했고, 허점이라 생각되는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왔다.

어느 순간 묵일광의 눈빛이 흉포하게 변했다.

“마교, 네놈들은 마교의 무인들이구나.”

이미 수차례나 마교의 무인들과 싸워 봤던 묵일광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특징과 초식을 기억해 두고 있었다.

“눈썰미가 제법이구나.”

“네놈이 죽을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죽어랏!”

낭인들의 눈빛이 섬뜩하게 변했다.

묵일광의 말처럼 그들은 마교의 무인들이었다. 정확히는 마교 내원의 신화전 소속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오기 전 대금무관(大金武官)이라는 조그만 무관을 몰살시켰다. 마음껏 죽이고, 약탈하고, 살육을 즐겼다.

이미 피를 봤기에 그들의 정신은 상당이 고양되어 있었고,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그래서 묵일광의 거대한 덩치를 보고도 위축이 되지 않았고, 쉽게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묵일광을 제압한 후에는 곁에 있는 예쁜 계집을 겁탈한다는 것이 그들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예상과 달리 묵일광은 엄청난 강자였다.

카캉!

“크윽!”

“이 곰 같은 새끼가!”

커다란 도끼와 부딪칠 때마다 무기가 부서지고, 그들의 몸이 크게 흔들렸다. 그만큼 묵일광의 도끼에 실린 역도는 가공했다.

묵일광의 눈이 흉흉하게 변했다.

“챠앗! 선풍광렬참(旋風狂裂斬).”

순간 두 자루 도끼가 회전하며 엄청난 부기를 사방으로 흩뿌렸다.

촤아악!

폭풍 같은 부기가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비명도, 반격도 없었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엔 수많은 육편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의 선풍광렬참이었다.

지난 삼 년 동안 묵일광은 더 발전했고, 이젠 그 어떤 고수에게도 밀리지 않는 실력을 갖게 됐다.

“후우!”

묵일광이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리며 도끼를 수습할 때였다.

“쯧! 늦었군.”

갑자기 누군가의 목소리가 그의 귓전에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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