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3
383화 3장. 대지는 불타고, 사람은 눈물을 흘린다(2)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묵일광은 전신의 피가 싸늘히 식는 것을 느꼈다.
도끼를 거머쥔 손끝이 간지러웠다. 마치 수많은 개미가 그의 손끝을 물어뜯는 것처럼 말이다.
묵일광이 서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평범한 체구의 사내가 보였다.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얼굴의 중년인이 언제부턴가 팔짱을 낀 채 그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실로 막강했다.
황혜령은 그를 보는 순간 거대한 산악을 연상했다. 그만큼 그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아!”
황혜령이 자신도 모르게 탄식을 내뱉을 만큼 말이다.
묵일광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상대의 산악과도 같은 기세는 둘째치고, 그가 가까이 접근할 때까지 자신이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중년인이 독한 마음을 먹었다면 황혜령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황혜령의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묵일광으로서는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묵일광이 도끼를 꼬나 쥔 채 물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네가 죽인 녀석들의 주인.”
중년인이 무심히 대답하며 육편으로 화한 수하들의 흔적을 바라봤다. 그런 그의 눈엔 서늘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그 녀석들은 쓰레기였지. 내 명령도 없이 대금무관을 습격해 전멸시켰으니까. 그래서 내 손으로 죽이려 했어.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졌군. 네가 죽였으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 해 준 셈이지.”
“그러면 나에게 고마워해야겠군요.”
“허나 놈들은 내 부하였어. 죽어도 내손에 죽었어야지, 다른 누군가의 손에 죽은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군.”
“…….”
묵일광의 눈가가 파르르 떨었다.
중년인의 목소리에 담긴 살의에 일대의 공기가 싸늘히 식었다.
도끼를 꼬나 쥔 묵일광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의 가공할 살의에 그의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묵일광이 허리를 쫙 폈다.
될 수 있으면 마교와는 충돌을 하지 않고 안휘성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한바탕 피를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가 황혜령에게 말했다.
“아가씨, 만일 제가 밀릴 것 같으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도주하십시오.”
“그럴 순 없어.”
“아가씨! 그러셔야 합니다. 약속해 주십시오.”
묵일광의 목소리는 비장했다.
황혜령이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묵일광은 단순한 적이 아닌 그야말로 생사대적을 눈앞에 둔 모습이었다. 그녀는 묵일광이 이렇게까지 긴장을 한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의 절실함이 표정에서 그대로 전해져 왔다.
“약속할게! 일광이 불리할 것 같으면 도망갈게.”
“약속했습니다?”
“약속했어.”
황혜령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묵일광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이제야 미련 없이 최선을 다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묵일광이 중년인에게 포권을 취했다.
“녹림의 묵일광이오.”
“내 이름은 남현소다. 신교의 신화전주가 바로 나다.”
“역시 마교였구려.”
“신교다.”
남현소가 묵일광의 말을 정정했다. 그에 묵일광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와서 그런 사소한 것들을 따질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상대는 마교의 초강고수였다.
지난 삼 년 동안 그 역시 많은 성장을 했다고 하지만, 감히 승부를 자신할 수 없는 그런 상대였다.
묵일광이 슬쩍 황혜령의 얼굴을 바라봤다. 어쩌면 마지막 보는 모습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가슴 깊이 각인시켰다.
그가 공력을 끌어 올리며 물었다.
“신교가 이곳 안휘성엔 어쩐 일이시오?”
“이미 짐작하고 있지 않느냐?”
“역시 남궁세가 때문이겠구려.”
“그렇다. 권마에게 남궁창이 죽은 지금이 절호의 기회지. 우리는 남궁세가를 병탄할 것이다.”
순간 묵일광의 눈빛이 일렁였다. 담호가 무림맹의 군사인 남궁창을 죽였다는 소식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강호를 뒤흔들 만한 파괴력을 가진 소식이었다. 하지만 묵일광은 애써 동요를 감추며 물었다.
“남궁세가 다음은 황산의 패왕채이겠구려.”
“그것을 어떻게 알았느냐?”
남현소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실제로 그들의 계획이 그랬기 때문이다.
안휘성의 맹주는 누가 뭐래도 남궁세가였다. 남궁세가만 처리하면 다른 문파들은 구심점을 잃고 지리멸렬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남는 것은 황산의 패왕채 하나뿐이었다.
패왕채는 수만 녹림도의 정점에 존재하는 산채. 패왕채까지 처리하면 구심점을 잃은 녹림도 따위야 순식간에 일개 도적으로 전락할 뿐이다.
묵일광이 입술을 힘껏 깨물었다. 살점이 찢겨져 나가며 피가 흘러나왔지만 고통조차 느낄 수 없었다.
물러서지 못할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설령 이 자리에서 목숨을 잃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츠으으!
묵일광의 전신에서 핏빛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혈천부법을 극성으로 익힌 자에게서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내 이름은 묵일광이오. 당신들이 치려는 패왕채 출신이지.”
“그런가? 싸울 이유가 충분하군.”
남현소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가 팔짱을 풀었다.
묵일광의 투지가 공기를 타고 전해져 왔다. 이 정도의 투지를 발산하는 젊은 무인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그래서 즐거웠다.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 덤벼라! 녹림의 젊은 영웅이여.”
“챠앗!”
남현소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묵일광이 기합을 터트리며 쇄도했다.
촤아악!
두 자루 도끼가 무시무시한 핏빛 부기(斧氣)를 폭출해 냈다. 커다란 바위라도 산산이 부술 만큼 어마어마한 위력이 담긴 공격이었다.
묵일광의 도끼가 남현소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그 순간 남현소가 손을 들었다.
덜컥!
순간 묵일광의 도끼가 허공에서 멈춰 섰다.
“큭!”
묵일광의 눈에 믿을 수 없다는 빛이 떠올랐다.
부기가 맺힌 도끼를 남현소는 맨손으로 멈춰 세운 것이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남현소가 나머지 한손으로 그의 가슴을 공격했기 때문이다.
묵일광은 피하는 대신 나머지 도끼로 공격을 막았다.
쩌엉!
그 순간 도끼 전면에 남현소의 주먹이 작렬했다. 핏빛 부기가 어려 있던 도끼가 마치 유리처럼 산산이 부서져 비산했다.
“커억!”
뒤이어 강렬한 충격이 묵일광의 전신을 강타했다. 순간적으로 숨이 턱 막혀 왔지만 묵일광은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 고통을 참았다.
“몸뚱이가 제법 단단하구나.”
남현소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떠올랐다.
묵일광은 도끼를 크게 휘둘러 남현소의 손을 떨쳐 냈다. 그리고 전신의 공력을 모두 도끼에 주입했다.
츠츠츠!
옅게 퍼져 있던 핏빛 부기가 뭉치더니 이내 뚜렷한 도끼 형상을 만들어 냈다.
도끼로 만들어 낸 강기, 바로 부강(斧罡)이었다.
검으로 강기를 만들어 내면 검강이라 부르고, 도로 강기를 형성할 수 있으면 도강이라 불렀다.
일반적으로 검강이나 도강을 만들어 내는 것보다 부강을 만들어 내는 것이 훨씬 고되고 공력의 소모가 극심했다. 깨달음의 문제라기보다 공력의 문제였다.
도끼가 검이나 도보다 훨씬 크고 면적이 넓었다. 당연히 넓은 면을 모두 에워싸자면 공력이 더욱 많이 소모될 수밖에 없었다.
대신 엄청난 무게와 크기를 고스란히 파괴력으로 전환할 수 있기에 도강이나 검강에 비해 위력이 월등했다.
묵일광은 그런 도끼의 이점을 충분히 살려 초식을 펼쳤다.
혈월관살(血月貫殺).
혈천부법 최강의 파괴력을 가진 초식이 남현소를 향해 펼쳐졌다.
츠아아아!
거대한 도끼가 공기를 가르며 남현소에게 날아왔다.
일대의 공기를 시뻘겋게 달구면서 날아오는 도끼가 두려울 만도 하건만 남현소의 표정엔 변화 하나 없었다.
남현소는 오히려 부강이 어린 도끼의 궤적으로 몸을 날렸다. 간발의 차이로 부강이 그의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살이 떨리고, 심장이 요동칠 상황에서도 남현소의 눈빛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반대로 묵일광은 심장이 멎을 정도로 경악했다.
남현소의 차가운 눈빛이 가슴에 꽂혔다. 뒤이어 그의 손바닥이 묵일광의 가슴에 흡착됐다.
콰왕!
굉음이 터져 나오고 묵일광의 몸이 포탄처럼 튕겨 나갔다. 그런 그의 가슴엔 남현소의 손바닥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쇄우장(碎宇掌).
남현소의 성명절기였다.
쇄우장은 침투경(浸透勁)을 이용해 상대의 외부가 아닌 내부를 파괴하는 장법이었다. 마교 내에서도 쇄우장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몇 안 될 정도로 고절한 무공이었다.
이 한 수에 묵일광의 내부는 엉망이 되었다.
기혈이 흔들렸고, 내장이 진탕되었다.
묵일광의 거대한 몸이 꺼지기 직전의 촛불처럼 위태하게 흔들렸다.
“끝이다.”
남현소가 그런 묵일광을 향해 일장을 날렸다. 마무리를 하려는 것이다.
그때였다.
“챠앗!”
황혜령이 기합과 함께 남현소에게 일장을 날렸다. 그에 묵일광이 피를 토하며 소리쳤다.
“아, 안 돼!”
황혜령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 순간 남현소의 장력이 방향을 바꿔 황혜령을 강타했다.
쾅!
“허윽!”
강렬한 타격음과 함께 황혜령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묵일광이 그녀를 급히 껴안았다.
“아가씨!”
“이, 일광!”
“도주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으셨습니까?”
“미……안! 약속 안 지킬 거야.”
“아가씨!”
“내가 어떻게 일광을 버려?”
“크윽!”
“차라리 같이 죽으면 죽었지. 그렇게 못 해.”
묵일광의 품에 안겨 황혜령이 처연히 웃었다. 그런 황혜령의 모습에 묵일광이 울컥했다.
“아가씨!”
“차라리 같이 죽을지언정 헤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 그러니까 혼자 도망가란 이야기는 하지 마.”
“알겠습니다.”
묵일광이 황혜령의 가녀린 몸을 힘껏 껴안았다.
그녀의 온기가 품안 가득 느껴졌다.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남현소가 그런 두 사람을 보며 혀를 찼다.
“쯧! 못 봐 주겠구나.”
그가 다시금 쇄우장을 펼치려 손을 들었다. 이제 손을 내리치면 묵일광과 황혜령의 목숨은 끝이었다. 하지만 남현소는 손을 내리치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묵일광과 황혜령 뒤쪽에 서 있는 여인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치 유령 같았다.
소리도, 기척도 없이 나타나 말없이 두 사람의 뒤에 서 있었다. 묵일광과 황혜령은 아예 그녀의 존재 자체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그만큼 그녀의 등장은 은밀했고, 소름이 끼칠 정도로 고요했다.
남현소의 눈빛이 변했다.
그가 애써 손에 모았던 공력을 흩어 버리며 입을 열었다.
“요 군장(軍將).”
“오랜만이네, 남 전주.”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여는 여인은 바로 요사란이었다. 그녀의 등장은 남현소에게도 뜻밖이었다.
“당신이 왜?”
“나와 인연이 있는 아이들이라서 말이지.”
“그들이 녹림 소속이란 것은 알고 있었소?”
“아니, 그건 몰랐어. 그저 우연히 만나 교분을 나눴을 뿐이야.”
요사란의 대답에 남현소가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혈륜마녀 요사란은 사대군장의 일원, 마교 내의 서열로만 따지면 그보다 상위의 존재였다. 저렇게 순진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그녀의 나이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만큼 무공도 강대했다.
그녀가 괜히 사대군장의 일원이 된 것이 아니었다. 요사란과 겨뤄 아직까지 목숨을 구한 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녀의 무력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내가 어찌하면 좋겠소? 요 군장.”
“한 번만 살려 줘.”
“그건…….”
“나한테 빚 하나 지운다고 생각해.”
“알겠소.”
남현소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애송이 둘의 목숨을 담보로 요사란에게 빚을 지울 수 있다면 이쪽에서 남는 장사였다. 요사란은 그만한 존재감과 가치가 있는 무인이었다.
그제야 요사란의 등장을 알아차린 황혜령과 묵일광이 그녀를 올려다봤다.
“어, 언니?”
“왠지 보내고 나서도 안심이 되지 않더라니.”
“언니도 마교도였어요?”
“그래! 신교의 사대군장 중 한 명인 혈륜마녀가 바로 나야. 너에겐 그런 사실을 알려 주고 싶지 않았는데.”
“아!”
황혜령의 반응에 요사란이 살짝 얼굴을 찡그렸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반응이었지만, 그래도 살짝 신경이 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오연한 표정을 지었다.
“당장 안휘성을 떠나. 동생.”
“언니?”
“안휘성에 지옥이 펼쳐질 거야.”
요사란이 자신의 하얀 두 손을 내려다봤다.
이 손이 이곳 안휘성에 지옥의 문을 열어젖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