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6
386화 4장.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2)
“허허! 모두 떠나고 나니 쓸쓸하구먼.”
황경문이 빈 공터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평소였다면 어린아이들이 뛰어노느라 정신없었을 공터가 오늘은 텅 비어 있었다.
광룡채의 몰살 직후 노약자들은 이미 절강성에 있는 장흥채(長興寨)로 피신시켰다. 그 때문에 산채의 절반 이상이 텅텅 비어 있었다.
“다들 잘 도착했는지.”
별일 없을 거라 생각하면서도 걱정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걱정이 늘었다는 것은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 황경문은 새삼 자신의 나이를 실감했다.
“원래대로였다면 벌써 총채주직을 넘겨주고 은퇴했어야 했거늘.”
오늘따라 마음이 유독 약해지는 황경문이었다.
그때였다.
“총채주님!”
호피를 입은 중년인이 그를 부르며 다가왔다.
금도패웅(金刀覇熊) 용철경.
녹림십팔채의 하나인 철웅채(鐵熊寨)의 채주가 바로 그였다.
그는 패왕채에서 노약자들을 장흥채에 피난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휘하의 녹림도들을 이끌고 패왕채로 들어왔다. 미력한 힘이나마 보태겠다고 달려온 것이다.
용철경과 철웅채 무인들의 합류는 황경문에게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용철경은 패왕채에 합류하자마자 대부분의 대소사를 황경문을 대신해 처리했다.
덕분에 그를 향한 황경문의 신뢰는 무척이나 컸다.
“무슨 일인가?”
“산 아래 정세를 파악하러 간 녀석들에게서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급보?”
황경문의 얼굴이 돌덩이처럼 굳었다.
“마교의 정예가 남궁세가로 향하고 있는 징후가 파악되었답니다.”
“그게 사실인가?”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한 사실입니다. 벌써 몇 개의 무관이 놈들에게 당했다고 합니다.”
“결국…….”
황경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토록 오지 않길 원했던 최악의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감고 있는 그의 눈엔 피에 잠긴 안휘성의 모습이 선하게 보이는 듯했다.
“놈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파악됐는가?”
“그게 철저히 분산해서 이동하는 바람에 전혀 파악이 되지 않고 있습니다.”
“으음!”
“일단은 아이들에게 최대한 파악해 보라고 명령을 내려놨습니다.”
“잘했네!”
황경문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눈을 떴다.
그의 눈빛은 언제 번민으로 가득 차 있었느냐는 듯이 맑고 깨끗했다.
미련이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떨쳐 버렸다.
노약자들은 장흥채로 보냈고, 하나밖에 없는 딸도 화산파로 보냈다. 남는 미련이 없으니 여한이 없이 싸울 수 있었다.
“산채에 경계령을 내리게.”
“알겠습니다, 총채주.”
“철경아!”
“예?”
“고맙다.”
“무슨?”
황경문의 뜬금없는 말에 용철경이 영문을 몰라 했다.
“어쩌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곳에 자발적으로 달려와 줘서 정말 고맙구나.”
“에이! 난 또 뭐라고. 그런 말씀 하지 마십쇼. 녹림도가 내세울 것이 의리밖에 더 있겠습니까? 전에 다른 채주 놈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달려오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용철경, 이제라도 총채주와 함께 생사를 함께할 겁니다.”
용철경이 멋쩍은 표정으로 뒤돌아섰다.
황경문은 그런 용철경의 뒷모습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용철경이 채주로 있는 철웅채는 이곳에서 천 리 먼 곳에 있었다. 산동성에 위치해 있었기에 이번 혈란에서도 안전했다. 그런데도 굳이 이곳까지 전력을 이끌고 달려왔다.
죽을지도 모르는 이 자리에.
‘고맙다.’
황경문의 시선이 문득 하늘을 향했다.
오늘따라 유독 딸의 얼굴이 그리웠다.
‘잘 가고 있느냐? 혜령아.’
***
소림사의 산문 밖에 담호와 초연운, 방진보가 함께 서 있었다.
초연운이 흑귀에 짐을 싣는 담호를 보며 말했다.
“안휘성에 가려면 서둘러야겠군.”
이미 담호로부터 사정을 들은 초연운이었다.
그는 담호를 붙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빨라 가라고 등을 떠밀었다.
담호의 동생이라면 자신에게도 동생이나 마찬가지니까.
그의 시선이 방진보에게 향했다. 방진보는 당연하다는 듯이 담호를 따라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초연운은 그런 방진보를 말리지 않았다.
이미 어엿한 무인으로 인정받는 방진보였다.
초연운이 장난 식으로 부르는 화산대숙수였지만, 그 별호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구무룡 다음가는 무게를 가진 별호였다. 적어도 새롭게 출현한 후기지수들 중에서는 으뜸이라 할 수 있었다.
지금의 방진보라면 도움이 되면 됐지, 결코 짐이 되지 않을 것이다.
“다 실었다.”
말에 모든 짐을 실은 방진보가 손을 탁탁 털었다.
방진보의 말은 소림사에서 특별히 내준 것이었다. 비록 흑귀보다는 못하지만, 그래도 나름 명마에 속하는 것이다.
소림사가 담호를 얼마나 신경 쓰고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담호가 초연운에게 다가왔다.
“갈게.”
“조심하게!”
“내가 말한 거 기억하고 있지?”
“천사교? 물론일세.”
초연운이 고개를 크게 주억거렸다.
“특히 적경천을 경계해.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각별히 주의하겠네. 믿게나.”
“믿어!”
담호의 말에 초연운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담호와 같은 자에게 신뢰를 받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초연운을 믿기에 담호는 무림맹을 떠날 수 있었다. 초연운은 담호가 신뢰하는 단 한 명의 친구였다. 그라면 소천이나 해소월 등을 잘 이끌 수 있을 것이다.
초연운이 담호의 어깨를 두들기며 말했다.
“자네야말로 무사히 돌아오게나.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그러지!”
“쓸데없이 말이 길어졌군. 어서 가게나.”
“음!”
담호가 흑귀에 올라탔다.
방진보도 말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저도 갈게요. 형도 각별히 조심해야 해요. 형도 내가 챙겨 줬어야 했는데.”
“그놈의 잔소리!”
“솔직히 우리 중 형이 가장 걱정되거든요. 이미 전적도 있고.”
“네네! 화산대숙수님이 걱정해 주셔서 무한한 영광입니다. 소생 각별히 몸조심하겠습니다.”
“쳇! 하여간 갔다 와서 봐요.”
“알았다.”
두 사람이 피식 웃었다.
만나면 매일같이 아웅다웅 다투지만 그래도 그들만큼 서로를 걱정해 주는 이들도 없었다. 서로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엔 정이 담겨 있었다.
그때였다.
“진보야!”
산문 위에서 묘령의 소녀가 급히 달려왔다. 산문에 도착해 숨을 헐떡이는 그녀는 바로 은소청이었다.
“소청!”
“인사도 없이 가면 어떡해? 하마터면 못 볼 뻔했잖아.”
은소청의 눈엔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었다. 방진보가 그런 은소청에게 다가가 손으로 눈물을 훔쳐 주었다.
“말할수록 힘드니까. 그리고 금방 돌아올 테니까.”
“그래도 말은 해야지.”
“미안해!”
“긴말 안 할게. 부디 조심해!”
“응!”
방진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조심해!”
“또 뭘?”
“다른 여자.”
“응?”
“여자 조심하라구. 바람피우면 가만 안 둘 테니까.”
은소청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화산대숙수라는 별호를 얻은 후 방진보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꽤 많았다. 그들은 모두 은소청 또래의 여자들이었다.
어린 여자 무인들이 보기에 방진보는 매우 매력적인 존재였다. 사신성 중 하나인 대군상을 찍어 누르는 무력, 거기다 화산파 출신이고, 담호의 비호를 받고 있다.
방진보와 잘만 되면 어마어마한 배경을 두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인지 많은 여자 무인들이 노골적으로 방진보에게 접근해 왔다.
은소청이 곁에서 쌍심지를 켜고 있는데도 그랬는데, 자유로우면 또 얼마나 달라붙을지 알 수 없었다.
“난 또 뭐라구? 걱정하지 마. 난 너밖에 없으니까.”
“진짜지?”
“그럼!”
“믿을게!”
“응!”
방진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에이! 눈꼴시어 더 못 봐주겠네. 제기랄! 누가 보면 몇 년은 사귄 줄 알겠다.”
곁에서 초연운이 투덜거렸지만, 방진보와 은소청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에 초연운의 눈이 쫙 찢어졌지만 더 이상 뭐라 말하지는 않았다.
담호가 흑귀의 고삐를 잡으며 말했다.
“가자!”
“예!”
방진보가 은소청과 떨어져 말에 올랐다. 그제야 담호의 시선이 초연운을 향했다.
이미 인사는 끝이 났다. 더 할 말은 없었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담호가 흑귀의 옆구리를 가볍게 찼다. 그러자 흑귀가 무서운 속도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앗! 같이 가요, 형!”
뒤늦게 방진보가 그의 뒤를 따랐다.
“진보야!”
은소청은 순식간에 멀어지는 방진보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 봤다. 그녀의 곁으로 초연운이 다가왔다.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녀석은 강하니까.”
“네!”
“그나저나 부러운 녀석이네.”
“뭐가요?”
“이렇게 아름다운 데다가 부자인 여자를 애인으로 두었으니 하는 말이야. 넌 저 녀석이 뭐가 좋다고 그렇게 눈물을 훌쩍이냐? 네가 열 배는 아깝구만.”
“흥! 그렇게 띄워 줘 봐야 줄 것 없어요.”
“쳇! 역시 안 통하네.”
초연운이 입술을 삐죽거리며 소천 등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은소청이 고개를 돌려 초연운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런 그녀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초연운이 자신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일부러 가볍게 말한다는 것을.
참 좋은 사람이었다.
마교에 모든 것을 잃고도 그는 늘 웃었다. 어느 때는 섬뜩하게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같은 편이기에 의지가 되는 남자였다.
초연운이 소천 등에게 말했다.
“자, 슬슬 우리도 움직여 볼까?”
***
“권마가 떠났습니다.”
“목적지는?”
“그것까지는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천랑객(天狼客) 구의진의 말에 적경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놈이 뭔가를 눈치챈 것 같나?”
“그것 역시 알지 못합니다. 허나…….”
“허나?”
“놈은 생각보다 똑똑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힘을 앞세워 살육을 일삼는 것 같지만, 항상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 냈습니다. 그는 가진 바 힘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줄 압니다.”
“그래서?”
“이대로 보내면 자신의 무력을 이용하여 또 어떤 변수를 만들어 낼지 모릅니다. 차라리…….”
“차라리 제거하자?”
“그렇습니다.”
구의진은 일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의 얼굴엔 어느새 짙은 살기가 어려 있었다.
적경천이 물었다.
“가능하겠나?”
“가능합니다.”
“자칫하다가는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음이야. 어쩌면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진실에 접근했을지도 몰라.”
“그러니까 더더욱 제거해야 합니다.”
구의진의 목소리가 절로 높아지고, 살기가 더욱 짙어졌다. 천랑객이라는 별호처럼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늑대 같은 모습이었다.
적경천은 그런 구의진을 잠시 바라봤다.
수십 년을 같이해 온 사이였다. 얼굴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누구보다 믿는 동생이었다.
어떤 일을 맡기더라도 구의진이라면 분명 훌륭히 해낼 것이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아니었다.
“우리는 이곳에서의 일에 집중한다.”
“형님!”
“우리가 굳이 나서서 피를 흘릴 필요는 없어.”
“피를 흘리지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권마를 우습게 보지 말게. 여태까지 그의 손에 죽은 자들 중에 고수가 아닌 자가 없었어. 그들 중에는 자네와 비견될 만한 고수들도 상당수 있었고.”
“…….”
“자네를 못 믿는 것은 아니야. 단지 이곳에서의 일이 우선이라는 걸세. 그는 우리의 몫이 아니야.”
“알겠……습니다.”
결국 구의진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의 눈엔 수긍할 수 없다는 빛이 역력했다.
적경천이 그런 구의진을 뒤로하고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그러자 소림사와 무림맹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제 곧 세상이 바뀔 거야. 자네는 어떻게 하면 우리의 후배들인 결사대를 잘 이용할 수 있을지 고민하면 돼.”
적경천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