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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7화 4장. 도고일척(道高一尺)이면 마고일장(魔高一丈)이라…(3)
소림사가 있는 숭산을 떠난 담호와 방진보는 쉴 새 없이 말을 달렸다. 휴식도 말 위에서 취했고, 식사도 간단한 건량으로 말 위에서 해결했다. 하지만 아무리 흑귀가 천하에 다시없을 명마라 하지만 살아 있는 생명체인 이상 지칠 수밖에 없었다.
방진보가 타고 있는 말은 더했다. 아예 혀까지 길게 내밀고 있는 모습이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결국 담호와 방진보는 잠시 쉬어 가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휴식을 취하기로 한 곳은 강기슭의 조그만 공터였다.
“휴!”
말에서 내린 후에야 방진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전신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방진보 같은 무공의 고수라 할지라도 말 위에서 하루를 온전히 보내는 것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다. 마치 전신이 몸살에라도 걸린 것처럼 덜덜 떨리고 있었다.
반면 담호는 처음 흑귀를 탈 때와 별반 다르지 않는 모습이었다. 그런 담호의 모습에 방진보는 내심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흔히들 말을 타는 것이 별로 힘이 들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은 무척이나 고된 일이었기 때문이다.
방진보는 말에서 내려 잠시 운기조식을 했다. 그러자 몸 안에 쌓여 있던 피로가 단박에 날아갔다.
“형, 잠시만 기다리세요.”
방진보는 바로 식사 준비에 들어갔다.
담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어둠이 내려앉은 강을 바라봤다. 수면 위로 보이는 수많은 조그만 불빛들, 반딧불이였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반딧불이들이 수면 위를 스치듯 날아다니고 있는 모습은 환상적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담호의 머릿속엔 온통 황혜령에 관한 것뿐이었다.
아직 무사하다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마음은 급했지만, 담호의 이성은 차갑기만 했다.
초조해한다고 해서 상황이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이성이 차가워야만 냉철하게 판단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었다.
담호는 황혜령이 있는 안휘성으로 가는 최단 거리의 행로를 머릿속으로 그려 보았다. 몇 번이고 수정한 끝에 최적의 행로를 계산해 냈다.
그사이 방진보는 뚝딱뚝딱 음식을 만들고 있었다.
말린 고기와 곡물 가루를 꺼내 끊이고, 미리 준비한 향신료로 맛을 첨가했다. 순식간에 그럴듯한 화과가 만들어졌다. 방진보는 화과 한 그릇을 떠서 담호에게 내밀었다.
“형, 드세요.”
“고맙다.”
“헤헤!”
방진보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담호의 옆에 앉았다.
안휘성에 가면 어떤 위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방진보는 두렵지 않았다. 담호와 함께 가기 때문이다.
담호의 동생인 황혜령은 그와도 인연이 깊었다. 패왕채에 머물 때 많이 친해져서 허물없이 지냈기에 친누나와도 같았다. 그녀를 구하는 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었다.
담호는 묵묵히 수저를 움직였다.
방진보가 만든 화과는 정말 맛있었다. 겨우 곡물 가루 몇 가지와 말린 고기로 어떻게 이런 맛을 내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방진보가 만든 음식이었기에 담호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원래 무엇이든 명인의 경지에 이른 사람들은 재료를 탓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은 이해할 수 없는 간단한 재료만으로도 최상의 효과를 끌어내는 사람들. 담호는 방진보도 그런 이들 중 한 명이라 생각했다.
방진보가 준 화과를 반쯤 비웠을 때였다. 갑자기 담호가 수저를 내려놓으며 어둠에 잠긴 강가를 바라봤다.
“왜 그러세요? 형.”
방진보가 의아한 표정으로 담호를 바라봤다.
그 순간 담호가 입을 열었다.
“나와!”
그제야 방진보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담호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봤다. 내공을 집중해 안력을 끌어 올렸지만, 보이는 것은 온통 어둠뿐이었다. 하지만 방진보는 포기하지 않고 어둠을 계속해서 노려봤다.
그때였다.
무언가 어둠 속에서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뭐, 뭐야?”
방진보가 화들짝 놀라며 경계태세를 취했다.
“이 늙은이가 놀라게 했구만. 미안하네.”
어둠 속에서 일어난 존재가 말을 했다.
그는 곧 수풀을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모닥불에 비친 그의 모습을 확인하자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거, 거지?”
“맞네! 늙고 병든 거질세. 이 늙은이를 위해 화과 한 그릇을 대접해 주겠나? 너무 배가 고파서 그러네.”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이는 바로 늙은 거지였다.
하얗게 센 머리에는 때가 가득해 반들거렸고, 다 떨어진 옷은 얼마나 기웠는지 온통 바느질 자국투성이였다. 특이한 것은 그의 손에 들린 죽장이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사용해 왔는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죽장의 표면은 반질거렸다. 하지만 그보다 더 특이한 것은 죽장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문양들이 가득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흐음! 화과 냄새가 너무 좋구만. 이 늙은 거지에게 부디 한 그릇 적선해 주지 않겠나?”
늙은 거지가 입을 열자 몇 개 남지 않은 이가 보였다. 그마저도 다 썩어 금방이라도 빠질 것만 같았다.
방진보가 자신도 모르게 곁에 있는 담호를 봤다.
담호는 말없이 늙은 거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둠에 물든 시선이 섬뜩할 만도 하건만 늙은 거지는 여전히 해맑은 모습으로 모닥불 위에서 끓고 있는 화과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담호의 대답이 들리지 않자 늙은 거지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거참, 사람 인심 하고는. 공짜로는 주지 못한다는 건가? 좋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늙은 거지가 허리춤에서 꺼낸 것은 제법 큰 호리병이었다. 호리병을 흔들자 찰랑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늙은이의 목숨보다 귀한 술이라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겠는가?”
“앉아!”
그제야 담호의 입이 열렸다.
늙은 거지는 헤벌쭉 웃으며 담호의 맞은편에 앉아 코를 벌름거렸다.
“흐음! 향이 아주 끝내주는군. 어찌나 냄새가 좋은지 내 칠흑 같은 어둠을 헤치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 아닌가? 어서 퍼 주게나.”
그는 허리에 차고 있던 표주박을 방진보에게 내밀었다. 음식을 채근하는 모습이 마치 어린아이 같았기에 방진보는 미소를 지으며 화과를 가득 퍼 줬다.
늙은 거지는 행복한 표정으로 화과를 한 입 떠먹었다.
“으음! 역시 내 생각이 틀리지 않았군. 정말 끝내주는구나.”
그는 내친 김에 호리병 마개를 열었다. 그러자 향긋한 주향이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우와!’
주향을 맡는 순간 방진보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의 예상 외로 주향이 끝내줬기 때문이다.
당연히 싸구려 독주가 들어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명주가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늙은 거지는 술을 한 모금 들이켠 후 담호에게 술병을 건넸다. 담호는 말없이 술병을 받아 한 모금 마셨다.
술이 입안으로 들어오자 담호도 살짝 놀랐다. 향이나 맛, 모두 처음 느껴 보는 최상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정도라면 최고의 재료로 술을 담근 후 족히 수년은 묵혀 둔 것일 터였다.
담호는 한쪽에서 눈을 초롱초롱 빛내는 방진보에게도 술병을 건넸다.
“헤헤!”
방진보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순간 그의 눈빛이 변했다.
“우와! 이건 정말 끝내주네요.”
“흐흐! 좋지? 죽통주야. 내가 직접 담근 거지.”
“직접요?”
“그래! 술을 담그는 것이 이 늙은이의 유일한 취미거든.”
늙은 거지가 갑자기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옷을 들췄다. 그러자 안쪽에 주렁주렁 매달린 조그만 호리병 십여 개가 보였다.
방진보의 눈이 크게 떠졌다.
“설마 그제 전부?”
“흐흐! 이 늙은이의 피 같은 술이다. 이번 강호행에 마시려고 특별히 가지고 나온 거지.”
“정말 그 안에 다 술이 들었다는 말인가요?”
“거, 녀석! 속고만 살았나?”
“죄송해요.”
방진보가 급히 사과를 하자 늙은 거지가 피식 웃었다.
“아니다. 그보다 이 화과, 네가 만든 거냐?”
“네!”
“솜씨가 제법이구나. 이 늙은 거지가 평생 맛본 화과 중 제일이다.”
“가, 감사해요.”
“맛좋은 술에 훌륭한 안주까지 있으니 이 늙은이가 신선이 부럽지 않구나. 크아!”
늙은 거지는 연신 화과를 떠먹으며 감탄사를 토해 냈다. 그런 거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미소 짓게 만들었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최고라고 하는데 싫어할 이유가 없었다. 방진보는 늙은 거지를 경계하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우지 못했다.
“끝내주는군!”
늙은 거지는 순식간에 화과 한 그릇을 뚝딱 해치웠다.
“한 그릇 더 드릴까요?”
“흐흐! 좋지!”
늙은 거지는 사양하지 않았다.
후르륵!
그는 아예 그릇째 훌훌 들이켰다. 방진보는 그런 거지의 모습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급히 담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담호는 늙은 거지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화과를 먹고 있었다. 조금씩 천천히.
그는 마치 늙은 거지를 없는 사람처럼 취급하고 있었다. 늙은 거지도 뒤늦게 그런 담호의 태도를 알아차렸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거참, 젊은 친구가 얼음처럼 차갑구만. 늦긴 했지만 우리 통성명이나 하세. 나는…….”
“금마신개(禁魔神丐)겠지.”
“그걸 어떻게?”
늙은 거지가 놀라 입을 뻐끔거렸다. 그 모습이 꼭 뭍에 올라온 물고기 같았다.
방진보는 늙은 거지에게 이런 모습이 있었나 싶어 놀랐다.
늙은 거지, 금마신개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그걸 어떻게 알았나?”
“추결개.”
“그 녀석이 벌써 말한 건가?”
“술 몇 잔 마시더니 말하더군.”
“망할 녀석 같으니라구. 본방 최대의 기밀을 술 몇 잔에 정신이 팔려 그렇게 털어놓다니.”
금마신개가 투덜거렸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은 아니었다.
그의 눈빛이 바뀌었다.
“맞네! 정식으로 소개하지. 내가 바로 개방의 태상장로인 금마신개라네.”
“…….”
담호는 말이 없었다. 그에 금마신개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면 후배가 알아서 자신을 소개해야 하는데 담호는 빤히 바라볼 뿐 이름을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크흠!”
금마신개가 괜히 헛기침만 했다. 그래도 담호가 말할 생각이 없는 것 같아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호의 선배가 이름을 밝혔으면, 후배도 이름을 밝히는 것이 예의인 것 같은데.”
“언제부터 거지가 예의를 찾았지?”
“그거야 그렇지만…….”
“이미 알고 찾아왔잖아.”
“…….”
“그렇지 않은가?”
담호의 말에 금마신개가 말문이 턱 막혔는지 잠시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내 그가 넉살 좋게 웃었다.
“크하하! 이거 정말 못 당하겠군. 미안하네! 사과하겠네.”
“…….”
“그렇다고 오해하지는 말게. 다른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라 정말 궁금해서 찾아왔으니까. 오랜만에 강호에 나왔더니, 자네의 위명이 가장 쩌렁쩌렁 울려 퍼지더군. 그래서 보고 싶었네. 현 강호의 정상에 있는 후배의 모습이.”
방금 전까지 사람 좋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절대자의 기도가 묵직하게 피어올라 사위를 압도했다.
방진보는 숨을 죽인 채 그런 금마신개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이분이 개방의 태상장로?’
지금이야 많이 위축되었다고 하지만 한때는 구파일방(九派一幫)이라는 소리를 들었던 개방이었다. 구파는 당연히 구대문파였고, 일방은 바로 개방을 말함이었다. 구대문파에 비견될 만큼 엄청난 세력과 힘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일차 정마대전의 여파로 세력이 많이 축소되어 예전만큼의 위용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그래도 강호에서 개방을 무시할 수 있는 문파나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금마신개는 그런 개방의 태상장로였다.
‘태상’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엄청난 무게감을 알기에 방진보는 숨을 죽인 채 금마신개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금마신개는 어마어마한 위엄을 발산하며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의 위엄에 짓눌려 감히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 정도 위압감으로 담호를 어찌할 수는 없었다.
담호가 금마신개를 빤히 바라봤다. 감정이 전혀 엿보이지 않는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에 금마신개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이런 눈빛이 익숙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가 신분을 밝히면 존경과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봤지, 이렇게 소 닭 보듯 바라보지는 못했다. 강호의 그 누구도 말이다.
하지만 금마신개는 웃었다.
“하하! 그렇게 빤히 바라보니 부끄럽구만. 그냥 그렇다구. 그러니 크게 신경 쓰지 말게나. 이미 서로를 알고 있는데 통성명이 무슨 필요 있겠나? 그냥 술이나 마시세.”
방진보가 그런 금마신개를 보며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끔뻑거렸다.
이제까지 담호를 상대했던 자들은 하나 같이 모욕감에 얼굴을 붉히거나 심신이 위축되어 고개를 들지 못하기 일쑤였다. 금마신개 같은 반응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역시 개방의 태상장로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구나.’
방진보는 새삼 세상이 넓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넓고 기인이사는 모래알처럼 많았다. 금마신개 역시 그런 이들 중 한 명이었다. 단지 차이점이 있다면 그들 중에서도 무척이나 특출 난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다.
금마신개가 웃음을 뚝 그쳤다.
“자네에게 할 말이 있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