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8
388화 5장. 비바람은 예고도 없이 불어온다(1)
금마신개는 더 이상 웃지도, 사람 좋은 표정을 짓지도 않았다. 그의 눈빛은 진중했고, 기도는 태산처럼 무거웠다.
일대종사다운 그의 모습에 방진보는 마른 침만 꼴깍 삼켰다. 방금 전까지 자신의 앞에 있던 사람과 동일 인물인지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극적인 변화였기 때문이다.
금마신개가 말했다.
“잠시 걷지. 조용히 이야기하고 싶네.”
“여기도 조용해!”
담호의 대답에 금마신개가 찌푸리며 방진보를 바라봤다.
방진보도 눈치가 있었다.
“제가 자리를 피해 드릴게요.”
“여기 있어.”
“형?”
“그냥 있어.”
“예!”
담호의 말에 방진보의 엉덩이가 다시 바닥에 붙었다.
금마신개가 대단한 사람인 것은 맞지만 방진보에겐 담호의 말이 더 큰 무게를 지녔다.
담호가 금마신개를 바라봤다.
“이 아이 앞에서 말하지 못할 거면 나에게도 말할 필요 없어.”
“그것 참…… 어쩔 수 없군.”
금마신개는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애써 일어났던 몸을 다시 주저앉혔다.
‘이렇게까지 위신이 통하지 않을 줄이야. 망할!’
금마신개가 하얗게 센 머리를 박박 긁었다. 그러자 손톱 밑에 떼가 새까맣게 끼었다.
그는 더 이상 근엄한 표정을 짓는 것을 포기했다. 그것도 통하는 상대에게나 하는 거지, 담호처럼 권위와 위엄이 통하지 않는 상대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자네 어디로 가는 건가? 방향을 보니 안휘성 같은데 맞나?”
“그걸 왜 묻지?”
“한 번이라도 고분고분 대답할 수는 없나? 거참, 어지간히도 빡빡하게 구는군.”
“…….”
“알았어. 알았다구. 그놈의 눈빛…… 진짜 심장 멎겠군. 내가 자네를 찾아온 것은 충고를 하기 위해서네.”
“충고?”
“그렇다네! 나는 될 수 있으면 자네가 안휘성에 가지 않았으면 한다네.”
“왜지?”
“자네도 짐작하고 있지 않은가? 그곳에 지옥이 펼쳐질 걸세.”
“그래서?”
“굳이 자네까지 그 지옥판에 뛰어들 이유가 없다는 걸세. 차라리 소림사에서 마교와의 결전을 준비하는 게 자네를 위해서라도 나을 게야.”
“…….”
“다 자네를 위해서 하는 말일세. 조금이라도 나이가 많은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게나.”
금마신개의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담호는 그런 금마신개를 빤히 바라봤다. 금마신개도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왜지?”
“말했지 않은가? 안휘성에 지옥이 펼쳐질 거라고.”
“왜 이제 와 기어 나온 거지?”
“무슨?”
“은거한 지 수십 년이 넘었잖아. 그런데 왜 이제 기어 나온 거냔 말이야.”
“그게 무슨?”
“몰라서 묻는 거야?”
“나는 자네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나는 그저 강호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나왔을 뿐이네.”
“그래?”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순간 금마신개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리고 담호는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이관!”
“…….”
“그는 어디에 있지?”
“휴우!”
갑자기 금마신개가 한숨을 내쉬더니 술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입가를 따라 술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금마신개는 순식간에 술 한 병을 비웠다. 그가 소매로 입가를 닦으며 말했다.
“어디까지 알고 있나?”
“천사교, 이관, 결사대.”
“많이 알아냈군. 허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네.”
“…….”
“세상의 일이란 것은 매우 복잡해서 결코 한두 가지 현상으로 설명이 되지 않지. 천사교도 마찬가지라네.”
“역시 천사교 소속이군.”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네.”
“…….”
“말했잖은가? 매우 복잡하다고.”
“그럼 설명해.”
“휴우! 그렇게 속 시원히 말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금마신개가 한숨을 토해 냈다. 그의 한숨 속엔 깊은 시름이 담겨 있었다.
“이관은 어디에 있지?”
“모르네!”
“같은 편 아니었나?”
“아직도 사신제를 모르는군.”
“…….”
“그나마 풍월제 단공월 대협만이 세상에 조금 알려졌을 뿐, 그들의 많은 것들이 비밀에 가려져 있다네. 같은 시대에 활약한 우리들조차도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네. 그러니 그에 대해 아는 것 역시 많지 않지. 더더구나 그의 거처는 일정하지 않다네. 구름 속에 숨은 신룡처럼 꼬리를 보는 것조차 힘이 들 정도지.”
“그걸 나보고 믿으란 거야?”
“믿든 안 믿든 내 말은 사실일세. 그것을 굳이 자네에게 믿어 달라 강요할 이유가 없네.”
담호를 바라보는 금마신개의 눈에는 복잡한 감정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자네라면 어쩌면…….”
“어쩌면?”
“아닐세!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군. 이만 가 봐야겠네.”
금마신개가 갑자기 일어섰다. 그러고는 그대로 허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는 신룡처럼 몸을 꿈틀거리며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안휘성에 가는 것은 부디 재고하게나. 자네는 이곳에 있어야 하네.
은밀한 전음 한 줄기만을 남긴 채.
***
운경은 검을 닦았다.
그는 매일같이 검을 갈고 닦았다. 비록 예상치 못하게 화산파의 장문인이 되면서 무공을 수련하는 시간은 줄어들었지만, 검을 닦는 것만큼은 하루도 빼놓지 않았다.
운경은 자신의 역할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장문인은 최전방에 나서서 싸우는 이가 아니라 화산파 전체를 통솔하는 역할이라는 것을.
앞으로 나서서 싸우는 것은 명경과 매화검수 같은 젊은 제자들의 몫이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스스로도 그런 일들이 적성에 맞다는고 생각했고, 실제로도 그랬다. 그는 누구보다 냉철한 두뇌와 폭넓은 사고를 가지고 있었기에 화산파를 훌륭하게 이끌어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무인으로서의 열망까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는 틈틈이 수련을 했다. 거기에 매화신단의 도움을 받아 공력까지 비약적으로 상승해 예전에 비할 수 없는 무위를 갖게 됐다. 하지만 그는 늘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휴우!”
운경이 검을 내려놓으며 한숨을 내쉴 때였다.
“무슨 한숨을 그리 내쉬는 것이냐?”
갑자기 아스라한 음성이 들려왔다.
순간 운경은 환청을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가 있는 곳은 연화봉 정상의 상궁이었다. 밖에는 수많은 제자들이 번을 서고 있어 외부인은 절대로 접근할 수 없는 중지(重地) 중의 중지였다.
그런 곳에 낯선 음성이 들려오고 있었다.
꾸욱!
운경이 내려놓았던 검을 다시 힘주어 잡으며 입을 열었다.
“누구냐?”
서릿발처럼 차가운 음성이었다.
그 순간 환상처럼 누군가 그의 거처에 나타났다.
신선 같은 풍모를 지닌 중년의 도사였다.
청수한 얼굴이 드러났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현기가 감도는 눈동자, 그리고 푸른 기운이 감도는 머리와 수염이 신비로움을 더했다.
특이한 것은 그의 오른쪽 소매였다. 허전하게 펄럭이는 소매가 그의 팔이 잘려 나갔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운경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도사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기억하기론 화산파 어디에도 이와 같은 풍모를 지닌 도사가 존재하지 않았다.
운경이 검을 들어 중년의 도사를 겨눴다.
“누구냐? 감히 화산의 중지에 침입하다니.”
“허허! 성격이 차분하다고 들었는데 전혀 다르구나.”
“헛소리하지 말고 정체부터 밝혀라.”
운경의 눈빛이 칼날처럼 예리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분명 처음 보는 얼굴인데 이상하게 분위기나 기도가 낯설지가 않았다. 오히려 익숙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중년 도사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경계할 필요 없다. 나는 네 사조니까.”
“사조?”
“그렇다. 나는 진궁자라고 한다. 혹시 내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느냐?”
“진궁자라고? 설마 결사대에 참여했던 그 진궁자?”
“역시 기억하는구나.”
스스로를 진궁자라고 밝힌 중년 도사가 빙긋 웃었다. 그에 운경이 진궁자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결사대가 조직되었을 때 운경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었다. 당시 결사대에 참여했던 천궁자나 진궁자와 같은 고수들과는 아예 만날 기회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때문에 눈앞의 중년 도사가 스스로를 진궁자라고 밝혀도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냥 거짓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진궁자에게서 느껴지는 선기는 오직 화산파의 무공만을 전념으로 갈고닦아야만 몸에 배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상대는 화산파의 무공을 익힌 것이 틀림없었다. 그것도 매우 오랫동안.
운경이 눈을 잔뜩 찌푸렸다.
“정말 진궁자 사조라면 증거를 대 보시오.”
“거참 의심이 많은 아이구나. 할 수 없지.”
순간 진궁자가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주위의 공기가 변했다. 그리고 공기 중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는 매화향.
“태청심법?”
“그렇다. 본문의 장로급 이상만이 익힐 수 있는 태청심법이다. 설마 태청심법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겠지?”
“그렇진 않소. 허나…….”
운경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의 얼굴엔 혼란스러운 빛이 가득했다. 그러자 진궁자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나는 너의 사조인 진궁자가 분명하다. 천궁자 사형을 따라 결사대에 참여했었고, 일차 정마대전을 종식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지.”
진궁자의 목소리는 무척이나 조곤조곤했다. 운경은 자신도 모르게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간 사정이 있어서 화산파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에 대해서는 차후 말해 줄 터이니 의심하지 말거라. 나는 진궁자, 결사대의 일원이자 화산파의 장로였던 무인이다. 즉 너의 사조다.”
“정말 사조님이란 말입니까?”
“그렇다. 운경아.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내가 더 일찍 찾아오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진궁자가 운경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런 진궁자를 운경은 어쩐 일인지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화산파의 장문인이 감당해야 할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다. 네 어깨에 짊어진 그 짐을 이제부터 내가 나누고 싶구나. 허락해 주겠느냐? 운경.”
“저, 저는…….”
“그리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다. 고민할 필요도 없다. 너만 허락해 준다면 나는 나머지 삶을 화산을 위해서 살 것이다.”
“…….”
“정말 멀고 먼 길을 돌아 이곳까지 왔다. 보다시피 나는 많은 상처를 입었고, 쉴 곳이 필요하단다. 내 고향인 화산에서 늙은 한 몸을 쉬고 싶구나. 나를 받아 주겠느냐?”
“사조님이라면야 당연히…….”
“고맙구나.”
진궁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반대로 운경의 눈동자는 몽혼하게 변했다.
“내가 원기가 많이 손상되어서 그러는데 혹시 남는 매화신단은 없느냐? 지금 나에겐 매화신단이 절실히 필요하단다. 혹시 나에게 매화신단을 줄 수 있겠느냐?”
“매화신단은…….”
그때였다. 갑자기 운경의 몸속에서 한 줄기 맑은 기운이 일어나 전신을 휘돌았다. 그러자 몽혼하기만 하던 운경의 눈에 갑자기 초점이 돌아왔다.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까?”
“무슨 말이냐?”
“매화신단.”
“그게 왜?”
“화산파 제자들 외에 매화신단의 존재를 아는 곳은 단 한 곳뿐.”
“…….”
“천사교. 당신은 천사교의 무인이군.”
운경은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스스로를 혈령사자(血靈使者)라고 밝힌 괴인이 매화신단과 함께 종리연을 납치하려고 했던 그 사건을. 현소 진인은 혈령사자가 천사교에 소속되어 있다고 말해 주었었다.
운경이 노성을 토했다.
“감히 진궁자 사조를 사칭하다니. 용서할 수 없다.”
순간 진궁자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화산파의 장문인 정도 되는 아이를 몽혼술(夢魂術) 같은 사술로 완전히 현혹시키는 것은 무리였구나.”
방금 전 그는 운경을 상대로 몽혼술이라는 섭혼술을 펼쳤다. 말 그대로 상대를 현혹시켜 자신의 말을 듣게 하는 수법이었다.
사실 화산파의 장문인 정도 되는 이에게 몽혼술을 쓰는 것이 말이 되지 않았지만 운경이 장문인이 된 기간이 비교적 짧고, 또 젊어 수양이 부족하기에 한 번쯤 시도해 볼 만하다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의 뜻대로 운경은 거의 넘어오는 듯했다. 매화신단이라는 말만 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운경이 검을 꺼냈다.
“정체를 밝혀라.”
“그는…… 그분은 진궁자 사숙이 맞다.”
그 순간 상궁 입구에서 귀에 익은 음성 한 줄기가 들려왔다.
“사숙?”
입구엔 현소 진인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