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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89화 (389/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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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9화 5장. 비바람은 예고도 없이 불어온다(2)

현소 진인은 서글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운경과 달리 그는 한눈에 진궁자를 알아보았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진궁자는 어린 시절 보았던 기억 그대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부인 천궁자와 함께 유독 자신을 아껴 주었던 진궁자였다. 간혹 천궁자에게 야단을 맞아 기가 죽어 있으면 기운 내라고 토닥여 주었던 이가 바로 진궁자였다.

현소 진인의 가슴에는 진궁자의 모든 것이 좋은 추억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더욱 슬펐다. 그를 적으로 마주 봐야 한다는 사실이.

운경은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지만, 현소 진인의 눈에는 진궁자의 몸에 은은하게 흐르는 사기(邪氣)가 보였다.

그가 갑작스레 폐관을 깨고 나온 것도 바로 진궁자의 몸에서 흘러나온 사기 때문이었다. 현소 진인처럼 선기가 가득한 이들에겐 약간의 사기도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진궁자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너는…… 현소구나.”

“맞습니다. 사숙이 그렇게 아끼고 귀여워해 주었던 현소입니다.”

“허! 세월이 참으로 야속하구나. 그 어린아이가 이렇게 나이가 들다니.”

“사숙!”

“사형이 살아 계셨으면 참 좋아했을 텐데.”

사부인 천궁자를 언급하는 진궁자의 목소리에 현소 진인의 눈동자가 크게 출렁였다. 하지만 그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사숙. 살아 계셨으면서 어찌 연락 한 번 없으셨습니까?”

“다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다.”

“사정이란 것이 천사교에 몸을 담은 겁니까?”

“…….”

“역시 맞나 보군요. 사부께서 살아 계셨으면 분명 크게 개탄하셨을 겁니다. 정파의 명문을 자처하는 화산파의 장로가 사교에 불과한 천사교에 몸을 담다니.”

“강호가 무엇이던가? 강호에 흐르는 강이 한 반향으로만 흐르던가? 강을 담는 호수가 겨우 하나뿐이던가? 셀 수도 없이 많은 강이 흐르고,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호수가 모래알처럼 많지. 그게 강호다.”

“궤변이오.”

“강호에 살아가는 자 역시 마찬가지다. 상황에 따라 생각과 이념이 바뀔 수도 있지. 이전의 나는 화산이라는 호수에 살던 조그만 물고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더 큰 호수를 경험하고, 강을 따라 흐르면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다. 이전의 나와 지금의 나는 전혀 다르지 않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조금 더 세상을 보는 눈이 넓어졌다는 것뿐. 나는 더 이상 화산파의 장로라는 굴레에 묶여 있지 않다. 더 큰 이상을 위해 나를 옭매고 있는 모든 것을 벗어던졌을 뿐.”

“그렇다면 천사교의 무인으로 찾아오지, 왜 화산파의 장로라는 신분을 내세워 찾아온 겁니까?”

“…….”

순간 장황하게 떠들던 진궁자의 입이 굳게 닫혔다. 그는 잠시 말없이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눈은 단지 마음만을 드러내는 창이 아니었다. 지닌바 공부와 인생 역시 눈으로 드러났다.

지금 이 순간 진궁자의 눈은 무척이나 사이하게 빛나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보는 것만으로도 현혹이 될 만큼.

운경이 잠시나마 현혹되었을 정도로 진궁자의 공부는 깊었다. 하지만 그런 진궁자의 눈빛을 바라보는 현소 진인의 눈에는 그저 안타까움만 가득할 뿐이었다.

사부 천궁자를 제외하고 가장 좋아하고 존경했던 이가 이렇게 타락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타깝고 이런 식으로 마주 봐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사숙!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누구보다 정의롭던 당신이 왜 천사교의 편에 서신 겁니까?”

“진실이란 동전의 양면 같아서 지금은 무작정 나를 비난하지만,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 것이다. 우리의 대의를…….”

“사숙!”

“그보다 매화신단을 다오.”

진궁자가 하나밖에 남지 않은 손을 현소 진인에게 내밀었다.

“매화신단은 왜 원하는 겁니까?”

“필요한 곳이 있다.”

“어디에 필요합니까?”

“내 제자들을 키우는 데 필요하다.”

“제자?”

“원래 키우던 아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모두 네 제자에게 죽임을 당했지. 수십 년을 키운 아이들이다. 내 희망이고 꿈이었지. 그런 아이들이 모조리 죽었으니 나도 보답을 받아야 하지 않겠느냐?”

“무슨?”

“매화신단을 다오. 매화신단으로 새로운 제자를 키울 테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왜 말이 안 되느냐?”

진궁자의 눈에서 귀화가 피어올랐다. 그의 모습은 도저히 화산파의 도인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무서웠다.

“매화신단을 다오. 그게 아니라면 매화신단을 만들어 냈다는 의원을 넘기거라. 그러면 순순히 물러가겠다.”

진궁자는 더 이상 속내를 숨기지 않았다.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더 뻔뻔히 나가기로 한 것이다.

현소 진인이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진궁자의 마음에 마귀가 깃들어 있었다. 이른바 심마였다.

심마는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는데 정작 본인은 그런 사실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 진궁자처럼 말이다.

담호에게 팔을 잘린 이후 진궁자는 본래의 냉철함을 잃어버렸다. 검객에게 생명 같은 오른팔을 잃은 후 그는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다.

물론 절대지경에 이른 고수답게 왼팔로도 검술을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었지만, 아무래도 오른팔에 비할 수는 없었다. 거기다 수족 같던 제자들까지 모조리 잃다 보니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있었다.

머리를 가득 채운 분노가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화산파와 너는 그 모든 것을 보상해야 해. 너희들은 나에게 빚이 있으니까.”

“어찌 그렇게 망가지셨습니까? 사숙.”

“닥쳐랏!”

쩌어엉!

순간 진궁자가 화를 참지 못하고 노성을 내뱉었다. 그의 사자후에 상궁의 창문이 터져 나갔다.

“장문인!”

“괜찮으십니까?”

상궁의 경계를 서고 있던 제자들이 놀라 뛰어 들어왔다. 안에 들어온 그들이 본 것은 흑빛 기류에 휩싸여 있는 진궁자의 모습이었다.

“무량수불! 심마에 완전히 잠식당했구나.”

현소 진인이 탄식을 토해 냈다.

마음속에 깃든 마귀가 어느새 진궁자를 잠식했다.

흔히들 말하는 주화입마의 한 형태였다. 대부분의 이들이 주화입마를 당하면 전신의 기혈이 꼬여 망가지지만, 극히 드물게 오히려 폭주하는 이가 있었다. 진궁자가 그와 같은 경우였다.

“매화신단을…… 내놓아라.”

진궁자가 귀화를 피워 올리며 현소 진인에게 걸어왔다.

“무량수불! 멈추십시오.”

운경과 제자들이 진궁자의 앞을 막아섰다.

“비켜랏!”

촤하학!

진궁자가 빈 소매를 휘저었다. 그러자 빈 소매가 채찍처럼 늘어나 제자들의 가슴을 강타했다.

“크흑!”

“컥!”

제자들이 비명과 함께 뒤로 나가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운경이 분노해 검을 휘둘렀다.

“챠앗!”

물결 같은 검기가 진궁자를 향해 날아갔다.

진궁자는 더 이상 화산파의 존장이 아니었다. 그는 천사교라는 사교에 영혼을 판 괴물에 불과했다.

그렇게 인정을 하고 받아들이자 마음이 편해졌다.

운경은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따다당!

하지만 그의 검은 진궁자의 소매에 막혔다.

“감히 사문의 존장을 향해 검을 휘둘러? 화산파의 법도가 무너졌구나. 내 오늘 무너진 법도를 다시 세우겠다.”

진궁자가 왼팔을 뻗었다. 그러자 바닥에 나뒹굴던 화산파 제자의 검이 그의 손으로 딸려 왔다.

손에 검을 들자 그의 기세가 더욱 흉포해졌다.

“이야아아!”

커다란 괴성과 함께 그의 검에 검강이 형성됐다. 검강은 섬전과도 같은 속도로 운경에게 날아왔다.

“운경!”

현소 진인의 목소리가 대전 안에 울려 퍼졌다.

현재 운경의 수준으로는 절대 막을 수 없는 검격이었다. 현소 진인의 눈에는 운경이 피를 뿌리며 쓰러지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창문을 뚫고 검 한 자루가 날아왔다. 검은 운경의 코앞에서 진궁자의 검강을 튕겨 냈다.

쩌어엉!

사방으로 충격파가 퍼져 나가며 운경과 현소 진인의 몸이 비틀거렸다. 하지만 그 이상의 충격이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느새 그들의 앞을 막아선 한 사내 때문이었다.

“모두 괜찮으십니까?”

그는 바로 명경이었다.

“명경!”

운경이 반색을 했다.

뒷짐을 쥔 채 오연히 서 있는 명경의 모습은 예전과 달랐다.

백척간두에서 진일보한 모습. 일대종사의 기도가 그에게서 엿보이고 있었다.

명경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진궁자의 검강을 막았던 검이 다시 회수되었다.

“무량수불!”

현소 진인이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이 폐관수련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명경 역시 깨달음을 얻은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의 깨달음은 무척이나 예리하고 날카로운 것이 분명했다.

“놈!”

분노한 진궁자가 다시금 검강을 만들어 내며 덤벼들었다. 명경 역시 물러나지 않고 마주 달려갔다.

촤촤촹!

검과 검이 격돌했다.

검강과 검강이 부딪치며 사방으로 빛의 편린을 뿌려 댔다.

“밖으로 나가셔야 합니다.”

운경이 현소 진인의 손을 끌고 급히 밖으로 나갔다.

콰콰쾅!

그들의 격돌에 수백 년 역사를 가진 상궁이 무너져 내렸다. 그 모습에 운경이 눈을 질끈 감았다.

“아아! 화산파가…….”

운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상궁은 화산파의 역사이자 상징이었다. 마교의 침공에도 무너지지 않고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건물이었다.

선조들이 피땀을 흘려 지켜온 모든 것이 그의 눈앞에서 무너지고 있었다. 그의 마음도 무너지려 하고 있었다.

그때였다.

“운경아!”

부드러운 음성과 함께 어깨에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현소 진인이었다.

“화산파의 역사와 기치는 저런 건물에 있지 않다. 사람……너희들이야말로 화산파의 역사고, 존재의 이유다. 절대 흔들리지 말거라.”

그의 음성이 운경의 가슴에 드리운 어둠을 걷어 냈다.

이제 운경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현소 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채채챙!

무너지는 상궁 속에서 진궁자와 명경이 싸우고 있었다.

한 사람은 화산파의 전대 고수였고, 다른 한 명은 현 시대를 이끌어 갈 젊은 고수였다.

그들의 검은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마치 거울을 보고 싸우는 것처럼.

마침내 먼지가 걷히고 두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진궁자는 흉포했고, 명경은 평화로웠다. 그렇다고 명경이 완전히 우위를 점한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호각이었다. 단지 명경은 폐관수련을 통해 흔들리지 않는 부동심을 얻은 것뿐이었다.

명경이 문득 운경을 바라봤다.

그는 진궁자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단지 상궁에서 느껴진 엄청난 기파에 달려온 것뿐이었다.

명경의 눈은 운경에게 설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운경이 입을 열었다.

“그분을 제압하거라. 설명은 그 후에 하겠다.”

“알겠습니다.”

명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금 진궁자를 향해 덤벼들었다. 그의 검이 허공에 수많은 매화를 피워 냈다.

순간 진궁자의 전신에서 두 가지 이질적인 기운이 피어올랐다. 신령한 선기와 폭발적인 사기가 결합된 선검혈령술(仙劍血靈術)이었다.

화산파의 검공과 사기가 동시에 명경을 공격해 왔다.

진궁자의 검을 막아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검공 대부분은 명경도 알고 있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사기는 달랐다.

마음을 잠식해 오는 사이한 기운을 막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때문에 마음이 양분될 수밖에 없었다.

그때였다.

“아아아아!”

갑자기 맑은 고음이 연화봉 정상에 울려 퍼졌다.

“사숙!”

운경이 현소 진인을 바라봤다. 고음을 내지른 자가 바로 현소 진인이었기 때문이다.

고음이 고막을 파고드는 순간 진궁자가 움찔했다.

마치 아침 햇살에 안개가 증발하듯 그의 눈에 어려 있던 사기가 순간적으로 흩어졌다.

순간 진궁자가 움찔했다. 그리고 명경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쐐애액!

그의 검이 빗살이 되어 진궁자의 몸에 꽂혔다.

“컥!”

진궁자가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의 가슴엔 어린아이 주먹만 한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대라신선이 와도 살릴 수 없는 치명적인 상처였다.

“휴우!”

명경이 검을 회수하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냈다.

현소 진인이 아니었다면 훨씬 더 오래 걸렸을 싸움이었다. 그의 외침은 진궁자의 사기를 흩트렸지만, 명경에겐 알 수 없는 고양감을 안겨 주었다. 덕분에 깨달음을 상회하는 수준의 무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파사현정(破邪顯正)의 힘을 가진 외침.

“무량수불! 그야말로 신선의 노래, 선음(仙音)이구나.”

운경이 망연히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현소 진인이 쓰러진 진궁자에게 다가갔다.

“사숙!”

“현……소.”

진궁자가 피를 토하며 현소 진인을 올려다봤다.

그의 눈에 어려 있던 사기는 어느새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현소 진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현소 진인은 그의 손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진궁자의 손을 맞잡으며 무릎을 꿇었다.

진궁자가 그런 현소 진인을 향해 속삭였다.

“고맙구나. 머릿속의 안……개가 사라진 것 같아.”

“사숙!”

“미안……하다. 어쩔 수…… 그는 모두를 오…….”

진궁자의 음성이 띄엄띄엄 이어지다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현소 진인이 눈을 감았다.

그의 가슴속엔 참담함만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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