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0
390화 5장. 비바람은 예고도 없이 불어온다(3)
금채(金寨)는 안휘성과 하남성 경계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한적한 도시였다. 성과 성을 잇는 길목에 자리를 잡고 있는 도시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금채는 인적이 드물었다.
“휴!”
황혜령은 그런 금채의 풍경을 보며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이곳에 온 지도 벌써 여러 날이 지났다. 그동안 그녀는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고 이곳에만 머물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운공을 하고 있는 묵일광의 모습이 보였다.
묵일광은 멀쩡했다. 적어도 겉모습은 말이다. 하지만 그의 내부는 그야말로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신화전주 남현소의 쇄우장은 묵일광의 내부를 철저히 뭉개 놓았다. 내장이 꼬이고, 기혈이 찢기고 갈라져서 내공이 새고 있었다.
묵일광은 필사적으로 운공을 하며 내상을 치유하려고 했지만, 자꾸만 새어 나가는 내공 때문에 간신히 현상 유지만 하고 있었다.
“일광!”
자신을 지키려다가 저리되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하지만 현재 그녀가 묵일광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황혜령은 묵일광이 놀라지 않게 조용히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수수한 차림의 중년 여인이 보였다.
중년 여인이 황혜령에게 알은척을 했다.
“황 소저.”
“분타주님.”
“묵 소협의 상세는 좀 어때?”
“여전히 그대로예요. 악화되지 않고 있을 뿐, 더 나아지지도 않고 있어요.”
“휴! 영약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괜히 미안하네.”
“아니에요. 이렇게 마음 편히 쉴 곳을 마련해 주신 것만 해도 감사할 뿐이에요.”
중년 여인의 이름은 임주하. 객잔의 주인이자, 하오문의 분타주였다. 상처를 입고 찾아온 묵일광과 황혜령의 정체를 한눈에 알아보고 쉴 곳을 마련해 준 이도 바로 그녀였다. 덕분에 지난 며칠 동안 황혜령은 기력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었다.
황혜령은 임주하와 함께 일 층으로 내려왔다. 객잔의 일 층은 무척이나 한가했다. 손님이라고 해 봐야 구석진 곳에 있는 탁자를 차지하고 앉은 몇 명뿐이었다.
“한가하네요.”
“며칠 전부터 이 모양이야.”
“역시 마교 때문인가요?”
황혜령의 물음에 임주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녀의 표정은 무척이나 어두웠다.
벌써 십 년이나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해 온 임주하였다. 그동안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봐 왔기에 눈치와 시류를 파악하는 시야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했다.
“황 소저는 방 안에만 있어 잘 모르겠지만, 지금 금채의 분위기는 무척이나 심각해. 마교는 단순히 무력으로만 안휘성을 점거하고 있지 않아.”
“무슨?”
“그들은 정말 무서워! 이런 건 처음이야.”
임주하의 목소리가 절로 떨려 나왔다.
강호라는 세계가 시작된 이후 강호 제패를 노린 문파들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마교 이전에 천사교가 있었고, 천사교 이전에도 강력한 힘을 가진 문파들은 존재했다.
그들은 무력으로 강호를 일통하려 했고, 실제로 그 직전까지 갔던 문파들도 상당수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야욕은 하나같이 실패했다.
강대한 힘을 바탕으로 무력으로만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다.
강한 힘으로 누르면 그만큼 반발도 세지는 것이 강호의 생리였다. 강호인들은 누가 위에서 억누르는 것을 참지 못했고, 그 이상의 힘으로 반발했다. 결국 수많은 문파들 중 누구도 강호를 제패하는 데 성공한 곳은 없었다. 심지어는 그 강대했던 마교조차도 말이다.
석년에는 무작정 힘을 앞세워 강호를 병탄하려 했던 마교였다. 하지만 수십 년이 흘러 다시 강호에 나타난 그들은 변했다.
“단순히 무력으로만 문파들을 병탄하는 것이 아니야.”
“그럼?”
“문파를 없애 치안이 공백이 된 곳에 포교자들이 나서는 거야.”
“포교?”
“그래! 포교. 백성들에게 마교의 교리를 전파하는 거지. 결국 백성들은 마교의 지지자가 돼.”
“그게 가능하나요? 몇 번의 포교만으로 백성들이 마교의 교리를 믿는다는 것이.”
“나도 그게 가능할 줄 몰랐어. 하지만 가능하더라구. 어차피 백성들에게 기존의 강호인들이나, 마교나 다를 것이 없거든. 오히려 무작정 착취를 하는 기존의 문파들보다는 극락과 내세를 약속하는 마교의 교리가 훨씬 더 잘 먹히지.”
이곳 금채에 있는 백성들 중 일 할이 마교에 넘어갔다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고 있었다. 일 할이라고 하면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 일할이 순식간에 이 할이 되고, 다시 십 할로 불어나는 것이다.
민심은 일단 한번 기울어지면 되돌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마교는 그 점을 철저히 파고들었다.
“마교에 포섭된 금채의 주민들이 눈과 귀가 되어 주고 있어. 이래서는 우리도 제대로 된 정보활동을 할 수 없어. 어쩌면 이곳도 하오문의 분타라는 사실이 이미 알려졌을지 몰라.”
임주하가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하오문의 생명은 은밀할 때 유지된다. 이렇게 대외적으로 다 드러나면 공격의 대상이 되기 십상이었다. 하오문은 다른 문파들과 달리 뛰어난 무력을 지닌 고수들이 많이 없어 더욱 위험했다.
“누가 이 모든 계획을 짰는지 모르지만, 정말 소름이 끼쳐. 무력과 포교, 두 개의 칼을 정말 제대로 사용하고 있어.”
임주하의 목소리엔 은은한 공포심이 담겨 있었다.
그녀가 알고 있던 강호의 싸움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힘과 힘, 개인과 개인, 혹은 세력과 세력의 싸움이었다.
계략과 음모, 치열한 두뇌 싸움이 끼어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그 바탕에는 무인의 자긍심과 선이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 그녀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달랐다.
강호와 전혀 연관이 없는 일반 백성들이 강호와 마교가 발산하는 거대한 인력(引力)에 끌려왔고, 마교의 든든한 기반이 되어 주고 있었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었다.
‘강호와 중원이 달라지고 있어. 세상의 흐름이 바뀐 거야.’
임주하의 눈이 창밖으로 향했다.
아직 황혜령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지만, 지금 이 순간에도 객잔을 은밀히 살피는 시선들이 있었다.
그들은 무공을 익힌 무인이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어설펐지만, 그래서 더 무서웠다.
“황 소저.”
그때 무심히 창밖을 바라보던 임주하가 황혜령을 불렀다.
“예?”
“어서 피하는 게 좋겠어.”
“그게 무슨?”
황혜령의 시선이 임주하가 바라보는 곳을 향했다. 그러자 객잔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한 무리가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하나같이 커다란 횃불이 들려 있었다.
“저들은?”
황혜령의 얼굴에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객잔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은 분명 무공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었다. 추레한 복장과 아무런 기도도 느껴지지 않는 그들의 모습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그들은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객잔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이곳 금채의 주민들이야.”
임주하가 망연히 중얼거렸다.
개중에는 그녀가 아는 얼굴도 섞여 있었다. 평소에 안면을 트고 지내던 인근 주민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그들의 얼굴은 과연 그녀가 알고 있던 사람들인지 의심이 갈 정도로 흉흉하게 변해 있었다.
임주하가 황혜령을 바라봤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아. 내가 시간을 끄는 동안 묵 소협을 데리고 피신해.”
“하지만…….”
황혜령이 망설였다. 임주하의 말을 의심하는 게 아니라, 묵일광의 상태 때문이었다.
지금 묵일광은 한창 운공 중이었다. 함부로 움직였다가는 그나마 현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내상이 악화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묵일광은 두 번 다시 회생할 수 없었다.
그때였다.
쾅쾅쾅!
주민들이 객잔의 문을 거세게 두들겼다.
임주하는 잠시 큰 숨을 들이키고는 담담한 표정으로 문을 열었다. 그러자 횃불을 들고 있는 주민들이 보였다.
임주하가 정중하게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안에 무림인 있지?”
“예?”
뜬금없는 주민들의 말에 임주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선두에 있는 중년의 주민이 목소리를 높였다.
“안에 있는 거 아니까 어서 쫓아내.”
“그게 무슨 말인가요? 아저씨.”
“무림인은 재앙만 불러올 뿐이야. 얼른 쫓아내.”
목소리를 높이는 중년인의 모습에 임주하가 잠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중년인은 인근 객잔의 주인으로 평소 임주하와도 친분이 돈독했다.
그는 매우 친절했고, 배려심이 깊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이렇게 핏대를 세우며 다짜고짜 자신을 몰아세울 줄은 몰랐다.
“금채에 무림인은 필요 없어. 얼른 그들을 쫓아내.”
“맞아! 명존께서 노하실 거야.”
“무림인들을 쫓아내자.”
주민들이 중년인에 동조해 소리를 질렀다. 객잔 앞은 그들의 목소리로 순식간에 시끄러워졌다.
임주하는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거 왜 이래? 다 알고 왔어.”
“알고 왔다뇨?”
“다 들었단 말이야. 이곳에 무림인들이 머물고 있다고.”
“누구한테 들었죠?”
“그걸 알아서 뭐하려고? 그러고 보니까 당신도 무림인이라며? 하, 하오문?”
순간 임주하의 얼굴에 균열이 갔다.
그녀는 급히 주위를 둘러봤다.
이곳 어딘가에 이들을 선동하는 이가 있었다. 그가 주민들에게 그녀의 정체와 황혜령 등의 존재를 알려 준 것이 분명했다.
‘마교구나.’
임주하는 대번에 이들을 선동한 이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등줄기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곳이 하오문의 분타라는 것은 극비 중의 극비였다. 하오문의 수뇌부 외에는 이곳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그런 극비를 마교는 꿰뚫어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의 고혈을 빨아먹는 무림인들은 이곳을 떠나라구.”
“어서 꺼져라.”
주민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처음엔 이곳에 모인 이들만 소리쳤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동 대열에 참여하는 주민들이 더욱 늘어났다.
그렇게 모인 이가 무려 수백 명이 넘었다. 그들은 객잔을 포위한 채 고함을 질러 댔다.
임주하와 황혜령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민들 수백 명이 위협하고 있었지만, 그들이 두려운 것은 아니었다. 그녀들 정도 수준의 고수라면 일반인 수백 명이 모여 있어도 상대가 되지 않으니까.
문제는 아무것도 모르는 일반 백성들이 마교의 선동에 넘어가 그들을 따른다는 것이다. 당장 그들의 앞에 있는 이는 겨우 수백 명에 불과했지만, 그 수가 수천, 수만 명으로 늘어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임주하와 황혜령은 마교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렇게 가다가는 천하가 금세 마교에 잠식당할 거야. 특단의 대책을 세워야 해.’
그때였다.
“우리 말을 듣지 않겠다면 이따위 객잔 태워 버리겠다.”
누군가 큰 소리와 함께 횃불을 던졌다. 그러자 다른 이들도 일제히 횃불을 던졌다.
“안 돼!”
임주하와 황혜령이 막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객잔에 던져진 횃불은 수십 개가 넘었다. 불은 순식간에 객잔으로 옮겨 붙었다.
점소이와 손님으로 위장하고 있던 하오문의 문도들이 양동이로 물을 길어 불을 끄려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화마는 순식간에 객잔 전체를 집어삼켰다.
“안 돼!”
황혜령은 급히 이 층으로 뛰어올라갔다. 묵일광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임주하도 불을 끄는 것을 포기하고 황혜령을 돕기 위해 움직였다.
“잘 타는군.”
객잔이 불타는 광경을 보며 미소를 짓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민들 가운데 교묘히 숨어들어 선동했다.
그들은 마교 내 포교 조직인 중천(中天)에 소속되어 있었다. 중천의 회주는 마모 단운향이었다.
교주인 철관혈이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한다면 단운향이 이끄는 중천은 교리로서 일반 백성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이었다.
중천에 소속된 이들은 대부분 마교의 교리에 정통했다. 그들은 마교가 일차 정마대전에서 패한 후 더욱 교리를 파고들었다.
그들은 패배의 원인을 마교의 교리가 일반 백성들이 체감하는 현실과 괴리가 있기 때문이라 생각했다. 일반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빠져들 수 있게 교리를 연구했다.
지난 수십 년 동안 그렇게 뜯어고친 교리는 마치 역병처럼 백성들 사이로 번져 나갔다. 그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마교의 적은 곧 자신들의 적이라는 일체감.
그들은 마교를 위해서라면 무림인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대시하고 순교할 수 있었다. 그럼으로써 극락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충만했다.
그들이 황혜령이 묶고 있는 객잔을 목표로 삼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신화전주 남현소는 혈륜마녀 요사란과의 약속을 지켜 황혜령과 묵일광을 놓아줬다. 남현소는 그래도 명예를 아는 자였고, 한 번 한 약속을 어기는 자가 아니었다. 그는 약속대로 황혜령에게 손을 쓰지 않았지만, 포교를 하는 중천의 입장은 또 달랐다.
같은 마교 소속이었지만, 중천은 종교적인 색채가 훨씬 더 강했다. 그들은 자비가 없었다. 마교를 믿지 않는 자들은 무조건 적이라 생각했고, 반드시 응징해야 한다고 믿었다.
평범한 객잔이 사실은 하오문의 지부라는 사실을 알아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마교의 교리에 빠져든 백성들이 알려 준 사실들을 취합만 해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잘 타는구나.”
“하오문 따위가 감히 본교에 대항하려 하다니. 모두 타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라.”
중천의 무인들이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들의 무공은 마교의 정예에 비하면 보잘 것이 없었지만, 마교의 교리에 빠져든 백성들을 교묘히 이용할 줄 알았다.
하오문의 분타였던 객잔은 순식간에 시뻘건 화마에 휩싸였다. 불길은 하늘 높이 치솟았고, 강렬한 열기는 방원 수십여 장 안에 있는 사람들을 뒤로 물러나게 했다.
“끝이다.”
중천의 무인들이 미소를 짓는 순간이었다.
촤하학!
하늘 높이 치솟던 불길이 갑자기 크게 출렁이더니 어느 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화마는 몸부림을 치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접인지기는 가공할 힘으로 불길을 잡아끌었다.
그그극!
“뭐, 뭐야?”
“이게 무슨?”
중천의 무인들과 백성들도 인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들의 몸 역시 불길이 빨려 들어가는 공간을 향해 딸려 갔다.
백성들과 중천의 무인들이 기겁해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들의 몸은 바닥에 깊은 고랑을 만들며 한없이 끌려갔다.
가공할 인력 앞에서 그들의 몸부림은 무의미했다.
그들의 얼굴이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대체?”
그 순간 그들은 보았다.
화마가 끌려가는 그곳에 서 있는 검은 인영을.
그가 모든 것을 끌어당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