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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92화 (39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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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2화 6장. 지옥을 보다(2)

묵일광에게 매화신단을 복용시켰다.

천하에 드문 귀물이었지만,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자신의 동생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고, 또 피를 흘린 남자였다. 매화신단은 또 구할 수 있지만, 그런 남자는 또 구할 수 없었다.

묵일광은 매화신단을 복용한 후 운공에 들어갔다. 그리고 담호가 그 곁을 지켰다.

운공을 하는 묵일광, 그리고 그 곁에 말없이 앉아 있는 담호의 모습은 묘하게 어울렸다.

그들과 머지않은 곳에 황혜령과 임주하가 앉아 있었다.

그들이 있는 곳은 객잔 근처 야산에 있는 조그만 모옥이었다. 하오문에서 비상시에만 사용하는 일종의 안가였다.

다행히 객잔이 모조리 불에 타는 사태는 막았지만, 더 이상 그곳을 사용할 수는 없었다. 이미 신분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황혜령이 사과했다.

“죄송해요. 저희 때문에.”

“아니야! 덕분에 동생의 오라버니도 직접 보고, 눈도 호강했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담호를 은밀히 바라보는 임주하의 눈 속엔 은은한 공포가 어려 있었다.

순진한 백성들을 끌어들여 도구로 이용한 마교도 무서웠지만, 더 무서운 것은 그런 백성들조차 가차 없이 죽이는 담호였다.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혹한 살인마라더니.’

원래보다 몇 배는 부풀려 전해지는 것이 강호의 소문이라지만, 담호의 경우엔 오히려 소문이 못한 것 같았다. 그만큼 담호의 모습과 위용은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그제야 왜 하오문의 부문주인 기예화가 그토록 신신당부했는지 알 것 같았다.

―절대 그에 맞서지 말고 협조해요.

기예화의 목소리가 새삼 귀에 울려 퍼지는 듯했다.

“고마워요. 이 은혜 절대 잊지 않을게요.”

“은혜라고 생각하면 오라버니에게 잘 말해 줘.”

“그럴게요.”

“고마워!”

그때였다.

“모두 출출하시죠? 이리 와서 식사하세요.”

갑자기 쾌활한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방진보가 오라는 손짓을 하고 있었다.

황혜령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오랜만에 진보 음식 좀 맛볼까? 간만에 살찌겠네.”

“설마?”

“아마 깜짝 놀라실 거예요. 어쩌면 천상의 맛을 경험하게 될지도.”

임주하는 그때까지만 해도 솔직히 코웃음을 쳤다.

사정상 객잔의 주인으로 위장하고 있는 덕분에 천하의 진미란 진미는 모조리 맛보았으니까.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방진보가 만든 고기 한 점을 입안에 놓는 순간 싹 날아가고 말았다.

‘이게 무슨?’

입안에서 극락이 느껴졌다.

혀가 춤추고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접시 하나가 비워져 있었다. 임주하는 체면도 잊고 방진보에게 접시를 내밀었다.

방진보는 웃으며 그의 접시에 가득 음식을 담았다.

오행이 상통하면서 음식에 담을 수 있는 기운도 늘었다. 덕분에 음식이 더욱 맛있어졌을 뿐만 아니라 원기를 북돋았다.

임주하는 온몸에 활력이 가득 찬 것을 느끼고 경악했다.

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강호에 신성으로 떠오른 누군가의 별호가 떠올랐다.

‘화산대숙수.’

홀연히 나타나 소림사에서 명성을 떨친 소년 고수.

그는 특이하게도 숙수를 자처했다. 하지만 압도적인 무력으로 사신성 중 한 명인 대군상을 이기고 최고의 후기지수 중 한 명으로 발돋움했다.

“소협은 화산대숙수 방진보군.”

“헤헤!”

방진보가 멋쩍은 표정으로 애꿎은 머리를 긁적였다. 도저히 최고의 후기지수라고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임주하는 그런 겉모습에 속아 넘어가지 않았다.

‘하기는 권마를 형이라고 부를 정도니, 얼마나 많은 가르침을 받았을까? 권마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것이 분명해.’

그녀는 제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마음대로 납득하고 말았다.

그때 황혜령이 방진보에게 말했다.

“못 본 사이 실력이 더 늘었네. 열심히 수련한 모양이네.”

“헤헤!”

“고마워! 덕분에 한결 기운이 나.”

“도움이 돼서 다행이네요.”

“네 덕분에 살았어. 생명의 은인이야.”

“에이! 겨우 이 정도가지고 뭘요?”

“아니야. 정말 고마워!”

황혜령이 거듭 고마움을 표하자 방진보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으음!”

묵일광이 나직한 신음성과 함께 눈을 떴다. 덕분에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어 방진보는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황혜령이 단박에 묵일광에게 달려갔다.

“괜찮아? 일광.”

“아가씨!”

“몸은 어때?”

“좋습니다. 아주 활력이 넘쳐요.”

묵일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온몸에 기운이 넘쳐났다. 오히려 부상을 입기 전보다 기운이 왕성했다. 내상의 흔적은 아예 남아 있지 않았다.

묵일광은 몸을 이리 꼬고, 저리 꼬다가 담호를 발견했다.

“형님, 감사합니다.”

그가 고개를 깊숙이 숙여 인사했다.

비록 운공요상을 하느라 꼼짝도 할 수 없었지만, 그의 눈과 귀는 활짝 열려 있었다. 때문에 돌아가는 사정을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담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했다.”

“아닙니다. 제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을 뿐입니다. 제 무공이 약해 아가씨를 고생시킨 것이 그저 죄송스러울 뿐입니다.”

“넌 최선을 다했어.”

담호의 말에 묵일광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만일 황혜령이 잘못되었다면 담호를 볼 면목은커녕, 스스로가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황혜령은 이제 그의 모든 것이 되었다. 황혜령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은 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담호에게 인정받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다.

담호가 황혜령과 방진보 등이 있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묵일광이 조심스럽게 따랐다.

“시장하실 텐데 식사부터 하세요.”

방진보가 그들 몫으로 남겨 두었던 음식을 건넸다.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며 식사를 했다. 조금씩 맛을 음미하는 담호와 달리 묵일광은 허겁지겁 입에 쓸어 담았다.

지난 며칠 동안 운공요상을 하느라 제대로 된 식사는커녕 죽 한 그릇도 변변히 먹지 못했다. 덕분에 배가 등가죽에 붙어 있었다.

순식간에 한 그릇을 비웠는데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더…….”

“여기요.”

묵일광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방진보가 웃으며 음식이 가득 담긴 그릇을 내밀었다.

“어?”

“아직 많이 남았으니까 천천히 드세요.”

“고, 고맙다.”

“뭘요.”

방진보가 빙긋 웃으며 담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담호는 말없이 음식을 비우고 있었다. 최대한 천천히, 그리고 꼭꼭 씹어 먹는 담호의 모습은 경건하기까지 했다.

방진보에겐 무척이나 익숙한 모습이었지만, 같이 있는 임주하에겐 공포스럽게만 보였다.

불타는 객잔 안에서 그녀는 똑똑히 보았다. 담호의 말도 안 되는 엄청난 무위를. 그리고 그 잔혹함을.

일반적인 무인이었다면 무공을 모르는 백성을 그렇게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비록 마교가 선동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임주하의 시선을 느꼈는지 담호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임주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그녀는 하오문의 분타주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했지만, 단 한 번도 담호와 같은 무인을 경험한 적이 없었다.

담호의 감정 없는 눈빛은 그녀가 감당하기엔 너무 가혹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담 대협. 도, 도움에 가, 감사드립니다.”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떠듬거리며 말했다. 어색한 침묵을 어떻게라도 깨고 싶었기 때문이다.

“기예화는?”

“예? 부문주 말씀이십니까?”

“그녀는 지금 어디 있지?”

“아, 아마 본문으로 돌아가셨을 겁니다.”

“그녀를 만날 방법은?”

“제가 연통을 넣으면 됩니다.”

“그럼 연통을 넣어.”

“예? 하지만 이유가 있어야…… 아닙니다. 당장 연통을 넣겠습니다.”

임주하가 급히 대답했다.

입안이 바싹바싹 타고 온몸의 피란 피가 모조리 마르는 느낌이었다. 담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녀의 온몸이 긴장을 하고 있었다.

문득 그녀의 시선이 방진보와 황혜령 등을 향했다.

두 사람은 담호의 곁에 있는 것이 아무렇지 않은지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임주하에겐 그 광경이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저들은 권마를 곁에 두고 저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나는 이렇게 살이 떨리는데.’

그녀는 아무리 담호의 곁에 오래 있어도 그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았다.

그때였다.

“분타주님.”

임주하의 심복이 다급한 표정으로 다가와 귀엣말로 속삭였다. 심복의 말을 모두 들은 그녀의 표정은 더할 수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황혜령이 물었다.

“무슨 일인가요?”

“마침내 마교의 정예들이 합비 인근에 집결했다고 하네.”

“합비라면?”

“그래! 남궁세가가 있는 곳이지.”

임주하의 대답에 황혜령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야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이 정도로 임주하가 저렇게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임주하가 잠시 크게 숨을 들이쉬고는 말을 이었다.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야.”

“그럼?”

“합비에 집결하던 마교의 정예들 중 일부가 일단의 무리에게 급습당해 큰 피해를 입었어.”

“그럼 좋은 것 아닌가요? 마교가 그만큼 타격을 입었다는 뜻이니.”

“마교를 습격한 이들이 패왕채인데도?”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순간 황혜령의 안색이 새하얗게 질렸다.

패왕채는 녹림십팔채의 총채였다. 그리고 그곳엔 그녀의 아비인 황경문이 있었다.

황혜령이 급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아빠가 마교를 선제공격할 리가.”

황경문이 먼저 마교를 선제 공격할리 없었다. 피해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노약자들과 여인들을 모두 다른 산채로 대피시키기까지 했는데, 이제 와 긁어 부스럼을 낼 이유가 없었다.

임주하가 급히 말을 이었다.

“그래! 패왕채가 먼저 마교를 공격할 리 없지. 실제로도 우리의 정보망에 패왕채가 산을 내려왔다는 징후 따윈 파악되지 않았어. 누군가 패왕채로 위장한 거야.”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패왕채로 위장한단 말인가요?”

평소 누구보다 영민한 황혜령이었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담호가 그릇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군.”

“네! 남궁세가예요. 그들이 패왕채의 정예로 위장해 마교를 급습한 것이 분명해요. 그 때문에 분노한 마교의 고수들 중 일부가 패왕채로 향했다고 해요.”

“확실한가?”

“확실해요. 하오문의 안휘성 내의 정보망은 아직도 건재해요.”

임주하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담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남궁세가가 승부수를 던졌군.”

“네! 패왕채를 끌어들임으로써 마교의 전력을 분산시키고, 안휘성 전체를 전장으로 삼겠다는 의도가 분명해요. 어차피 그들은 손해 볼 것 없는 계획이에요. 누가 세운 계획인지 모르지만, 소름이 끼칠 만큼 냉정하고 무서워요.”

임주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묵일광이 들고 있던 그릇을 집어 던지며 일어섰다.

“당장 패왕채로 가야 합니다.”

패왕채는 그의 고향이나 마찬가지였다.

황경문은 그에게 황혜령의 안위를 부탁했지만, 누란의 위기에 처한 패왕채를 그냥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흥분을 하자 겨우 아문 상처가 터져 피가 흘러나왔지만 고통조차 느끼지 못했다.

묵일광의 시선이 담호를 향했다.

“형님!”

담호는 그의 눈에 담긴 강렬한 열망을 읽었다.

“오라버니!”

이번엔 황혜령까지 가세했다.

황혜령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담호는 손을 뻗어 황혜령의 머리를 슥슥 만져 준 후 몸을 일으켰다.

이제까지 동생을 친딸처럼 키워 준 이가 있는 곳이었다. 담호에겐 몇 안 되는 은인 중 한 명이었다.

그것만으로도 그를 도울 이유는 차고도 넘쳐났다.

“어서 가죠.”

어느새 방진보가 식기를 모두 보자기에 담아 말 위에 싣고 있었다. 임주하의 말을 듣는 즉시 떠날 준비를 한 것이다.

임주하는 그런 사람들의 반응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황산은 가장 치열한 전장이 될 확률이 높았다. 어떻게 패왕채를 돕는다고 하더라도 안휘성에 들어온 다른 병력들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걸어가야 할 지옥도가 눈앞에 훤히 보이는 듯했다. 하지만 임주하는 담호를 만류하지 못했다.

담호는 지옥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존재였다.

그녀의 눈에는 벌써부터 지옥 불 한가운데 우뚝 서 있을 담호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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