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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3화 6장. 지옥을 보다(3)
“흐음!”
무척이나 오랜만에 보는 햇볕에 단운향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면서도 수척했다.
단운향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울창한 산림에 둘러싸인 고택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녀가 있는 이곳은 마교의 운남성 비밀 분타였다. 그녀가 상처를 입고 이곳에 찾아온 것이 벌써 몇 달 전이었다.
중상을 입은 그녀의 등장에 당연히 분타에 비상이 걸렸다. 솜씨 좋은 의원들이 모두 동원되어 그녀를 치료했다. 외상을 치료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내상을 치료하는 것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주 힘든 것도 아니었다.
문제는 그녀가 입은 정신적인 상처였다.
담호와의 만남은 그녀의 정신에 커다란 상처를 냈다. 너무 깊고, 날카로워서 완치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상처였다.
그를 떠올리면 자다가도 경기를 일으키고, 온몸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담호가 단운향의 마음속에 심은 공포의 잔향은 너무도 깊이 박혀 그녀를 괴롭혔다.
처음 얼마간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환상에 시달렸을 정도였다. 그나마 몇 달 동안 정양해서 이제야 어느 정도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오셨습니까?”
“마모를 뵙습니다.”
분타의 무인들이 단운향에게 분분히 인사를 해 왔다.
마교 내에서 단운향이 가지는 위치와 상징적인 의미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상처를 입고 분타에 온 즉시 본단에서 고수들이 파견되어 분타를 물 샐 틈 없이 지키고 있었다.
그때 분타주가 단운향에게 달려왔다.
“마모님. 이제 완전히 회복하신 겁니까?”
“덕분에 완치할 수 있었어요. 고마워요.”
“아닙니다. 그보다 중천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중천에서?”
순간 단운향의 눈이 반짝였다.
“그분은 스스로를 혈노(血老)라고 밝히셨습니다.”
“당장 그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요.”
“알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시지요.”
분타주가 앞장서 단운향을 안내했다. 그를 따라 도착한 곳은 분타 가장 안쪽에 위치한 심처였다.
심처에 도착하자마자 단운향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혈노.”
“마모님.”
심처에 있던 노인이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도무지 나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얼굴 가득 패인 주름살과 곳곳에 피어난 검버섯. 주름살에 파묻힌 눈엔 진물이 가득했고, 몸 전체를 가리는 허름한 장포 사이로 드러난 두 손에도 고목의 껍질을 연상시키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노인의 이름은 혈노였다. 그는 단운향이 가장 신뢰하는 이였다.
마교 내에서도 혈노의 나이를 아는 이는 존재하지 않을 만큼 그는 오랜 세월을 살아왔다. 그가 언제부터 마교에 몸을 담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단운향도 혈노가 몇 살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운향이 기억하고 있는 것은 그녀가 아주 어릴 때도 혈노가 지금 모습 그대로였다는 것이다.
혈노라는 이름도 그의 본명은 아니었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모두가 그를 혈노라고 불렀고, 그때부터 혈노는 그의 이름이 되었다.
혈노가 고개를 들어 단운향을 바라봤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많이 좋아졌어요.”
“다행입니다.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고마워요, 혈노.”
단운향이 혈노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표했다.
교주인 척관혈을 제외하면 혈노가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다.
혈노는 단운향을 유심히 바라봤다. 진물이 뚝뚝 떨어지는 그의 망막엔 수척한 단운향의 얼굴이 고스란히 맺혀 있었다.
“전검류의 천 노사와 벽암류의 젊은 주인이 죽었다 들었습니다. 사실입니까?”
“맞아요. 그들은 권마의 손에 죽임을 당했어요. 그는…….”
“무서웠습니까?”
“…….”
단운향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질겅 깨물었다. 혈노는 그런 단운향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마치 속내를 모두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눈빛 앞에선 그 어떤 거짓도 말할 수 없었다.
“무서웠어요.”
“그렇군요.”
“그는…… 정말 무서웠어요. 그는 마치, 마치…….”
“알겠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마치 어린 딸아이를 다독이는 아비처럼 혈노는 단운향을 감쌌다.
“이로써 확실해졌습니다. 권마야말로 본교의 생사대적인 마선이 분명합니다.”
“마선이란……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명존의 세상을 거부하는 자, 그야말로 본교의 유일무이한 대적이 분명합니다.”
단운향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중천은 단순히 포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교의 교리를 새롭게 정립하고 주관하는 조직이었다. 회주는 마모인 단운향이 맡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자는 혈노였다.
혈노는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현 교주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교리를 새롭게 정립했다. 그 과정에서 등장한 이가 바로 마선이었다.
위협하는 존재가 없는 지존은 타락하기 마련이라는 것이 혈노의 지론이었다. 그래서 그는 마선을 등장시켰다.
교도들을 단합시키고, 경각심을 키워 줄 존재.
명교의 신인 명존에게 대항하는 절대악(絶對惡).
그가 바로 마선이었다.
단운향은 마선이 단순히 허구의 존재라고만 생각했다. 새롭게 정립한 교리에나 나오는 존재이지, 실재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눈앞에서 혈노가 담호가 마선임을 천명하고 있었다.
단운향이 고개를 저었다.
“말도 안 돼요. 마선이 실재할 리 없잖아요.”
“말이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상상하는 모든 것은 실재로 이뤄지기 마련입니다.”
“혈노!”
단운향이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혈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차라리 잘되었습니다.”
“뭐가 잘되었다는 건가요?”
“마선이 실재한다는 것이 증명된 셈이니 교도들이 더욱 본교를 확실히 믿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혈노의 음성은 무척이나 나직해서 마치 속삭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울림은 무척이나 깊어서 사람의 마음을 파고들었다.
혈노의 주름진 입술이 치켜 올라가고, 누런 이빨이 드러났다. 웃고 있는 것이다.
그의 웃음을 보는 순간 단운향은 이상하게 마음이 편해지는 것을 느꼈다.
“으음!”
“위기는 곧 기회입니다. 권마 때문에 많은 피해를 입었지만, 이를 잘만 이용하면 오히려 더 큰 이득을 얻어 낼 수 있을 겁니다. 저희가 왜 모든 교리를 새롭게 정립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본다면 더욱 이해하기 쉬울 겁니다.”
단운향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반발하던 사실을 잊고 완전히 수긍하고 있었다.
“마선을 부각시켜 내부의 단결을 유도한다? 이 말이군요.”
“맞습니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부디 교주님께도 잘 말씀해 주십시오.”
“물론이에요.”
“그리고…….”
혈노가 갑자기 품에서 누런 책자를 하나 꺼내 단운향에게 건넸다.
“이게 뭔가요?”
“얼마 전 백마총(百魔塚)에서 발견한 무서입니다.”
“백마총에서?”
단운향의 눈이 빛났다.
백마총은 역대 교주의 시신이 묻혀 있는 곳이었다. 당연히 금지로 지정해 함부로 침입할 수 없게 했다. 하지만 일차 정마대전에서 패하고 궁지에 몰렸을 때 척관혈은 백마총을 개방했다. 백마총에는 교주들이 죽기 직전 남긴 심득이 다수 존재했기 때문이다.
죽은 자들의 심득마저 박박 긁어모아야 할 정도로 척관혈과 마교도들은 절박했다. 그들은 죄를 짓는 심정으로 백마총을 개방했고, 역대 교주들이 남긴 심득을 모두 수거했다.
그렇게 모은 심득들이 현 마교의 든든한 기반이 되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게 있던가요? 모두 수거한 줄 알았는데.”
“운이 좋았습니다.”
“하늘이 아직 본교를 버리지 않았군요. 이런 중요한 시기에 이런 무서라니.”
“명존께서 보살펴 주시는 한 본교는 영원할 겁니다.”
“고마워요. 이건 잘 사용할게요.”
단운향이 혈노가 내민 무서의 책장을 바라봤다.
“천사심마공(天邪心魔功)? 본교에 이런 무서가 있었던가요?”
“십팔 대 교주께서 영면하시기 직전 얻은 깨달음을 정리한 것 같습니다.”
“으음!”
“어쨌거나 한번 살펴볼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았어요. 천사심마공은 제가 한번 자세히 살펴본 후 교주께 전해 드릴게요.”
단운향이 천사심마공을 품안에 집어넣었다. 그에 혈노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이제 본단으로 가야겠어요. 준비하세요.”
“저도 말입니까?”
혈노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단운향은 이제껏 혈노와 중천을 꼭꼭 감춰 둔 채 외부에 잘 노출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때일수록 혈노의 도움이 필요해요. 교주께서도 중천의 존재를 크게 인정하니 혈노를 반길 거예요.”
“알겠습니다.”
단운향이 품속에 있는 책자를 어루만졌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충만해져 왔다.
그녀가 앞장서 걸음을 옮겼다.
혈노가 그녀의 뒤를 따르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권마…… 마선, 잘 어울리는군. 아주 잘 어울려.”
그렇지 않아도 주름진 얼굴이 더욱 깊이 패이며 누런 이가 드러났다.
***
“이쪽입니다.”
묵일광이 앞장서 일행을 이끌었다.
패왕채가 있는 안휘성은 그의 앞마당이나 마찬가지였다. 일반 사람들은 모르는 지름길이나 산길을 그만큼 꿰뚫어 보고 있는 자도 드물었다.
묵일광은 최단거리 행로로 일행을 인도했다.
때로는 강을 건너고, 때로는 커다란 산을 넘어야 했다. 그래도 뒤쳐지는 사람 한 명 없었다.
묵일광과 황혜령은 그만큼 절박했고, 담호와 방진보는 무공의 고수인 데다가 명마를 타고 있었다. 뒤쳐질 이유가 없었다.
담호는 흑귀의 등에 탄 채 묵일광이 안내해 주는 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다.
‘이관.’
담호는 그 이름을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미 몰락한 천사교를 이 세상에 다시 살린 자.
그는 아직도 꼭꼭 숨은 채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왜 마교와 무림맹의 충돌을 조장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럼으로써 그가 얻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한 것이 하나 없었다.
마치 실체가 존재하지 않는 안개와 싸우는 느낌이었다.
만일 같은 사신제의 일원인 단공월과의 만남이 없었다면 담호는 아예 이관의 존재를 믿지 않았을 것이다.
담호가 고개를 흔들었다.
‘실재한다면 만나게 되겠지.’
지금 이 시점에 복잡한 생각 따윈 필요 없었다.
담호는 당장 눈앞에 직면한 상황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때 묵일광이 앞을 가리키며 외쳤다.
“장강입니다. 이곳에서 운마도강선을 타야 합니다.”
그의 말처럼 눈앞에 광활한 강이 앞을 가로마고 있었다. 중원의 젖줄이라 불리는 장강이었다.
이 거대한 강이 안휘성을 남북으로 가르고 있었다. 안휘성의 북쪽엔 남궁세가가, 남쪽의 황산에는 패왕채가 존재했다. 정파와 녹림의 암묵적인 경계선이 바로 장강이었다.
“휴우!”
“으음!”
황혜령과 방진보가 말을 멈춰 세우며 한숨을 내쉬었다.
말은 안 했지만 그들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벌써 사흘이나 말을 달렸다. 고강한 내공과 체력으로 어떻게 버티고 있었지만, 심신이 많이 지친 상태였다. 그들에겐 약간의 휴식이 절실했다.
“운마도강선이 도착할 때까지 조금이라도 쉬십시오, 아가씨.”
“음!”
황혜령이 호흡을 가다듬으며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방진보도 말에서 내려 한숨을 돌렸다. 강호 유랑에 익숙해진 방진보에게도 이런 강행군은 결코 쉽지가 않았다.
방진보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담호를 바라봤다.
‘역시!’
그토록 강행군을 했건만 담호의 얼굴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그는 무심한 얼굴로 도도히 흐르는 장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진보가 담호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먼저 담호를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형님!”
묵일광이었다.
그가 손으로 장강 상류를 가리키고 있었다.
“저건?”
“배?”
방진보와 황혜령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 상류로부터 커다란 배가 떠내려 오고 있었다. 평상시 장강을 운행하는 운마도강선이었다. 그런데 배의 상태가 이상했다.
선체 곳곳에 구멍이 뚫리고 난간이 부서져 있었다. 바람을 한껏 머금고 있어야 할 돛은 처참하게 찢겨져 있었고, 난간 사이로 팔다리가 삐져나온 채 힘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쿵!
떠내려 온 배가 그대로 담호 등이 있던 선착장을 들이받으며 멈춰 섰다.
담호와 묵일광이 동시에 몸을 날려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곳에서 그들이 본 것은 지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