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
394화 7장. 녹림의 하늘이 무너지다(1)
“이건?”
어지간한 일에는 동요를 하지 않는 묵일광이 눈을 잔뜩 찌푸린 채 갑판 위에 펼쳐진 참혹한 광경을 바라보았다.
갑판 위는 마치 붉은색 안료를 뿌려놓은 것처럼 시뻘겠다. 갑판의 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리는 붉은색 액체는 분명 사람의 피였다. 곳곳에 보이는 살점과 뼈가 그 사실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마치 커다란 맷돌로 사람을 갈아 버린 것처럼 참혹한 풍경에 묵일광은 욕지기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도대체?”
묵일광이 혼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담호는 갑판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갑판의 중앙에 선 그는 사방을 둘러보았다.
바닥 전체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지만, 자세히 보면 나선형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 중심이 담호가 서 있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부터 나선형의 기운이 뻗어 나갔고, 배위에 있던 사람들을 휘감았다. 그리고 맷돌처럼 갈았다.
담호의 눈동자에 어린 검은 빛이 일렁였다.
‘강기공(罡氣功).’
흔히들 무공에 입문하면 외공과 함께 내공을 수련한다.
부단히도 내공을 수련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력을 느끼고 초식에 담게 되는데, 이 정도 경지에 이르면 비로소 제대로 된 무공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할 수 있었다.
검으로 따지면 기력을 싣게 되는 경지, 강호에서 활동하는 대부분의 무인들이 이 경지에 머물러 있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면 검으로 기를 표출할 수 있게 되니 이것을 검기라 불렀다.
검기로 사람을 상하게 할 수 있다고 해서 흔히들 검기상인(劍氣傷人)의 경지라 불렀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간 것이 강기(罡氣)였다.
밤하늘에 빛나는 찬연한 빛처럼 기력이 유형화되어 스스로 빛을 낸다. 강기를 검에 실으면 검강(劍罡)이 되고, 도에 실으면 도강(刀罡)이 되는 것이다.
강기는 단순히 내공만 높다고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깨달음이 수반되어야 했다. 그 벽은 높고도 높아 강호 대부분의 고수들이 강기의 벽 앞에서 좌절을 했다.
따라서 강기를 운용할 수 있느냐가 강호의 절대고수를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강기공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절대고수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결정됐다. 같은 강기공이라도 깨달음과 익힌 바 무공 종류에 따라 위력 또한 크게 차이가 났다.
바닥에 남은 흔적은 도저히 강기공을 펼쳤다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미세했다. 담호가 아니었다면 그 흔적을 발견하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강기공을 섬세하게 운용했다는 것을 뜻했고, 그러면서도 파괴력만큼은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껏 강호를 주유하면서 수없이 많은 적들과 싸운 담호였지만, 이 정도로 강기를 능숙하게 다루는 무인의 흔적은 처음이었다.
마치 경지에 이른 화가가 몇 번의 붓놀림으로 자신의 실력을 자랑하듯, 강기공의 주인은 섬세한 강기운용과 과격한 손속으로 자신의 경지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의 오만함과 자신감, 그리고 포악한 마음이 잔향처럼 남아 담호의 가슴을 자극하고 있었다.
담호가 그렇게 배 위에 남은 흔적으로 흉수를 가늠하고 있을 때 묵일광이 다가왔다.
“이들은 남궁세가의 무인들입니다.”
“남궁세가?”
“예!”
묵일광이 피로 물든 동패를 내보였다. 피로 물든 동패에는 남궁(南宮)이라는 두 글자가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남궁세가의 직계들만 가질 수 있는 동패입니다.”
“…….”
“아무래도 이들이 마교를 습격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 같습니다.”
묵일광의 말에 담호의 미간에 더욱 깊은 골이 패였다.
정말 이들이 마교를 습격해 패왕채로 유인하는 임무를 맡은 남궁세가의 무인이라면 그들의 임무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곳에서 패왕채까지는 아직도 상당한 거리가 남아 있었으니까.
담호가 다시 한 번 갑판을 둘러보았다.
무인은 무공으로 말하기 마련이었다. 강기공의 주인 역시 자신이 남긴 흔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이건 겨우 시작에 불과하다고.
그의 살의가 공기의 파동을 타고 아직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고수가 겨우 남궁세가의 무인들 일부를 죽이는 것으로 만족할 리 없었다.
“서둘러야겠다.”
“예!”
묵일광이 굳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운마도강선에 타고 있는 모든 이가 죽었다. 남궁세가의 무인은 물론이고, 선부와 수십 필의 말까지도 제대로 된 형태를 남기지 못하고 갈렸다.
그 참극을 보고도 위기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묵일광은 무인도 아니었다.
묵일광은 급히 운마도강선 뒤쪽에 있는 쪽배를 내렸다. 급한 대로 쪽배를 타고 도강하려는 것이다.
“오라버니?”
황혜령이 담호를 불렀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담호는 말없이 그녀를 안아 주었다.
***
“참으로 푸르르군. 아름다워!”
황경문이 녹음이 가득한 황산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진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평생을 이곳 황산의 패왕채에서 지내온 황경문이었다. 수천, 수만 번도 반복해서 봐 온 풍경이었다. 눈에 익을 대로 익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풍경인데도 오늘따라 유독 아름답게 느껴졌다.
“허! 나이가 들면 감성이 풍부해진다더니. 내가 딱 그 모양이구나.”
황경문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지웠다.
지금은 한가하게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황산엔 총 경계령이 내려진 상황이었다. 패왕채와 인근의 산채에서 지원 온 녹림도들이 황산 전체를 요새로 만들고 경계를 서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을 총괄하는 이가 녹림십팔채 중 하나인 철웅채의 채주인 용철경이었다.
용철경은 황경문을 대신해 능동적으로 움직였다. 병력을 배치하고, 방어진을 만드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휴! 이젠 나도 늙었구나. 아무래도 이번 혈란만 지나가면 총채주 자리를 물려주고 은퇴해야겠어.”
무공이나 체력의 문제가 아니었다. 야속한 세월을 견디지 못하고 같이 늙어 버린 마음이 문제였다.
“이번 기회에 일광과 혜령을 아예 혼인시키고 나는 그들의 뒤나 봐주어야겠구나.”
묵일광이 황혜령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었다. 최근에는 황혜령의 마음 또한 묵일광에게 많이 기울었으니 혼인시키는 데는 문제가 없을 것이다.
황경문이 그렇게 행복한 상상을 할 때였다.
콰아아!
갑자기 산 아래서 난폭한 바람이 불어왔다.
황경문은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을 느꼈다.
“이건?”
황경문 또한 절대지경에 이르렀다고 자부하는 고수, 바람에 담긴 살의를 단박에 감지했다.
콰앙!
“습격이다.”
“우와악!”
그 순간 황산 아래서 폭음이 터져 나오고 녹림도의 비명에 가까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왔는가?”
황경문이 애병 패왕도를 힘껏 움켜잡았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뒷방 늙은이처럼 감상에 젖어 있던 모습 따윈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 그는 녹림도의 정점에 서 있는 녹림의 지배자였다.
“총채주님!”
용철경이 그에게 달려왔다.
“적입니다.”
“드디어 왔군.”
“생각보다 놈들의 움직임이 빠릅니다.”
용철경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는 마교가 움직이는 시점을 빨라도 열흘 후로 보고 있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되어야 남궁세가와 승부를 내고 이쪽으로 움직일 거라 예상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황경문은 태연했다.
“변수가 있었나 보군. 적들의 전력은?”
“아직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하긴 이제 와 전력을 파악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나? 최선을 다해 싸우면 될 뿐이지.”
“적들은 결코 이곳까지 올라오지 못할 겁니다. 황산은 이미 철옹성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래!”
용철경의 자신 있는 말에 황경문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행동과 달리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역력했다.
산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을, 그 안에 담긴 살의를 용철경은 아직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황경문과의 격 차이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총채주님께서는 이곳에서 기다리십시오. 이 용철경이 당장 산 아래로 뛰어가 마교놈들을 작살 내 놓겠습니다.”
“그러게.”
“그럼!”
용철경이 황경문에게 포권을 취한 후 산 아래로 달려갔다. 그 뒤를 패왕채의 정예들이 따랐다.
“마교 놈들에게 녹림의 힘을 보여 주자.”
“우와아아!”
산 아래로 뛰어가는 무인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다.
“후우!”
황경문이 그들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산 아래서 불어오는 바람이 더욱 강해졌다. 바람은 소름 끼칠 만큼 강렬한 살의를 담고 황경문의 피부를 휩쓸고 지나갔다.
“오는가?”
황경문이 무심히 중얼거리며 애병 패왕도를 꺼냈다.
웅웅!
그의 별호와 동일한 이름의 중도는 언제부턴가 강렬한 울음을 흘리고 있었다.
도의 울음, 도명(刀鳴)이었다.
패왕도가 이 정도의 도명을 흘리는 것은 실로 오랜만의 일이었다.
‘너도 긴장을 하는 것이냐? 아니, 긴장은 내가 하는 것인가?’
어깨 위에 잔경련이 일어나고 있었다.
황경문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눈을 떴다. 그러자 떨림이 가시고, 한껏 긴장되었던 전신의 근육이 이완됐다.
절대고수답게 순식간에 최적의 상태를 되찾은 것이다.
그때였다.
슈우욱!
갑자기 광풍이 그를 향해 불어왔다.
그 순간 황경문은 보았다.
광풍 속에 숨어 있는 검은 무언가를.
마치 새의 날개를 연상시키는 커다란 그것은 황경문을 향해 빗살처럼 날아왔다.
“어림없다.”
황경문은 노호성을 내뱉으며 패왕도를 휘둘렀다.
파캉!
패왕도에 부딪친 날개는 저만치 튕겨 나갔다. 하지만 허공에서 불가사의한 궤도를 돌며 다시 황경문을 향해 날아왔다.
위이잉!
마치 수만 마리의 벌들이 일제히 날갯짓을 하는 듯한 소리가 소름 끼치게 울려 퍼졌다.
황경문이 공력을 끌어 올렸다. 그러자 패왕도에 붉은 빛무리가 형성됐다. 도강(刀罡)이었다.
“챠핫!”
날개를 향해 황경문이 도강을 휘둘렀다.
촤아앙!
쇳소리와 함께 다시 한 번 날개가 튕겨 나갔다. 거의 십여 장 정도 튕겨나간 날개는 그제야 멈춰 섰다.
날개를 저지한 황경문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았다.
그가 손에 쥔 패왕도를 바라봤다.
우웅!
도명이 아까보다 더 강해졌다.
그만큼 강한 내공을 주입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날개를 부수지 못하고 저지만 했을 뿐이다.
그때였다.
촤르륵!
날개가 접히며 그 안에 있던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날개와 달리 그는 새하얬다.
머리카락도 백발이었고, 피부도 평생 해를 보지 못한 사람처럼 창백했다. 심지어는 눈동자마저 하얬다.
검은 날개라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은 커다란 피풍의였다.
그의 실체를 확인하는 순간 황경문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섬뜩한 감정을 느꼈다.
그가 입을 열었다.
“녹림의 절대자라더니, 제법이군!”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공격하다니? 마교도답게 예절을 모르는군.”
“그 정도 공격도 막지 못하면 내 인사를 받을 자격이 없지.”
“광오하구나.”
“그럴 만한 자격이 있으니까.”
그의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휘어졌다. 웃고 있는 것이다.
황경문이 패왕도로 그를 겨누며 외쳤다.
“당신도 대장부라면 정체를 밝혀라.”
“큿! 그래도 녹림의 절대자라고 호기를 부리는군. 좋아! 그 정도 호기는 있어야지. 내 이름은 진도휘다.”
“진도휘?”
“교주를 보위하는 흑백사자 중 흑익사왕(黑翼死王) 진도휘가 바로 이 몸이다.”
“흑익사왕 진도휘.”
황경문의 눈빛이 깊이 가라앉았다.
정말 상대가 마교주를 근거리에서 보필하는 흑백사자 중 한 명이라면 거물 중에서도 거물이었다.
“생각보가 거물이 방문하셨군.”
“원래는 이곳에 올 생각이 없었지. 멀리 떨어져서 남궁세가와의 싸움을 지켜볼 생각이었거든.”
“그런데 왜?”
“남궁세가의 떨거지들 때문이지. 그들이 과연 그렇게 필사적으로 이곳으로 유인하려 한 이유가 궁금했거든. 그런데 이제 알겠군.”
자신의 말처럼 진도휘는 그저 멀리서 마교와 남궁세가의 싸움을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의 임무는 교주를 보좌하는 것이지, 직접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남궁세가가 마교의 무인들을 유인하기 위해 결성한 별동대가 습격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별동대가 습격한 것은 하필 진도휘가 이끄는 무인들이었다.
진도휘는 그들의 도발과 유인에 기꺼이 넘어가 주었다. 감히 그를 습격하고 유인한 이들을 모조리 갈아 버렸다. 그래도 갈증은 풀리지 않았다.
그게 그가 이곳까지 올라온 이유였다.
진도휘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 갈증을 풀어 줄 만큼 강했으면 좋겠군. 나는 강자의 피를 맛보는 것을 좋아하거든.”
“실망하지 않을 것이다. 나 패왕도 황경문 한평생 한 자루 도에 목숨을 건 무인이니까.”
패왕도를 꼬나 쥔 황경문의 손등에 굵은 힘줄이 솟아올랐다. 그리고 핏빛 아지랑이가 일렁였다.
“챠아앗!”
늙은 호랑이가 포효를 내지르며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