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5
395화 7장. 녹림의 하늘이 무너지다(2)
푸르르!
말이 연신 거친 숨소리와 함께 콧김을 내뱉었다. 심장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뛰고 있었고, 전신에서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도 황혜령은 말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빠!’
장강을 건너자마자 한시도 쉬지 않고 황산을 향해 달렸기에 말들의 체력도 이젠 한계에 달했다. 그나마 멀쩡한 것은 담호가 타고 있는 흑귀뿐이었다. 나머지 말들은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거라면 황산에 거의 도착했다는 것이다. 황산 초입이 저 멀리 보였다.
카카캉!
바람에 무기가 부딪치는 소리가 실려 왔다.
“에잇!”
묵일광이 지친 말위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대로 경공을 펼쳐 앞으로 달려 나갔다. 이제까지 그를 태우고 오느라 지친 말이 등 뒤에서 쓰러지고 있었지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저 멀리 싸우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너무 멀어서 희미하게 형체만 보일 뿐이지만 묵일광은 단숨에 그들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평생을 함께한 녹림의 형제들이었다. 그들의 비명 소리가 그의 고막을 파고들고 있었다.
“이 간악한 마교놈들아. 절대로 패왕채에는 올라가지 못한다.”
“덤벼라!”
고함과 비명이 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많은 이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피를 흩뿌리며 죽어 가는 이들 대부분은 녹림의 형제들이었다.
“이놈들!”
묵일광의 눈에서 핏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형제들의 죽음 앞에 그는 이성을 잃었다. 어느새 그의 두 손에는 커다란 도끼 두 자루가 들려 있었다.
“이야아아!”
콰아앙!
커다란 기합성과 함께 그가 온몸을 내던졌다. 그에 마교의 무인들이 형성한 인간 방벽이 크게 출렁였다.
“형!”
“일광!”
방진보와 황혜령이 뒤늦게 합세했다.
패왕채의 위기 앞에 그들은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패왕채는 방진보에게도 좋은 추억이 남아 있는 소중한 곳이었다.
황혜령은 혼신의 힘을 다해 무공을 펼쳤다.
“으악!”
“이놈들!”
비명 소리가 가득했다.
바닥은 피로 젖어 질퍽했고, 주검이 켜켜이 쌓였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황혜령과 방진보도 아는 자들이었다.
방진보가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담호를 따라다니면서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했지만, 직접 혈전에 참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묵일광도, 황혜령도 혼신의 힘을 다해 싸우고 있었다. 그들이 무기를 휘두를 때마다 누군가 피를 흩뿌리며 쓰러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다른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미 무림이란 세계에 깊숙이 발을 디디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방진보는 달랐다.
담호가 사람을 죽이는 광경을 많이 보았지만, 방진보가 직접 누군가를 죽인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당면한 이 상황이 누구보다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방진보는 선택의 기로에 섰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방진보는 선택했다.
촤아악!
그의 주도가 매화를 만들어 냈다.
매화도(梅花刀)였다.
“커억!”
마교의 무인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방진보는 그의 생사를 확인할 여유도 없이 다음 상대를 찾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숙수이자, 무인이었다.
이제 자신의 정체성을 부인하지 않을 것이다.
담호가 흑귀에서 내려 방진보의 뒤를 지나갔다. 그는 방진보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만큼 믿고 있기 때문이다.
방진보는 그가 걱정을 해야 할 만큼 약하지 않았다. 마음 또한 굳건했다. 방진보를 걱정하는 것은 오히려 그를 모욕하는 행위였다.
담호는 패왕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가 향하는 길목에 수많은 마교의 무인들이 얽혀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담호에게 덤벼들지 않았다.
눈으로 확인하고 피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인들에겐 무인의 본능이 존재했다. 본능적으로 자신의 격에 맞는 상대를 알아보는 힘.
그 때문에 무인들은 난전 속에서도 자신의 격에 맞는 상대를 찾아 움직이고, 또 싸우는 한편 감당할 수 없는 상대는 피하게 된다.
누구도 담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가 자신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을 몸이 먼저 느끼고 피하고 있는 것이다.
담호의 앞에 길이 열렸다. 담호는 그 길을 걸었다.
주위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에겐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의 목적지는 바로 패왕채였다.
이미 한번 와 본 적이 있는 패왕채였기에 담호의 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패왕채로 향하는 내내 수많은 시신들이 눈에 띄었다.
패왕채의 무인들이 대다수였지만, 개중에는 마교의 무인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이 흘린 피가 황산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다, 담 대협!”
그때 누군가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호의 시선이 목소리의 주인을 찾아 움직였다. 목소리의 주인은 호피를 입은 중년인이었다. 그는 부러진 나무 밑동에 처박힌 채 힘없이 담호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지는 기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고, 복부에 난 커다란 구멍으로는 내장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죽었을 상처를 입고도 그는 끈질기게 숨을 부여잡고 있었다.
담호가 물었다.
“이름은?”
“처, 철웅채 채주 요, 용……철경입니다.”
그는 바로 황경문을 돕기 위해 달려온 철웅채의 채주 용철경이었다. 황경문 다음가는 고수라 할 수 있는 그가 이렇게 무참히 무너진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담호가 말없이 용철경을 바라봤다. 그러자 용철경이 겨우 입을 열었다.
“총……채주님을 부디 부탁…….”
실핏줄이 터져 온통 붉게 물든 눈으로 용철경은 담호를 간절히 바라봤다. 담호는 그의 눈빛에 담긴 의미를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무게 또한 느끼고 있었다.
덜컥!
용철경의 고개가 꺾였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숨이 끊어졌어도 용철경의 부릅뜬 눈은 감기지 않았다. 담호는 손을 뻗어 용철경의 눈을 감겨 주었다.
그때였다.
“꽤 괜찮은 무인이었어.”
등 뒤에서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담호가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방진보 또래의 소년이 보였다. 유난히도 하얀 피부가 인상적인 소년이 담호를 보며 해맑은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는 피부처럼 하얀 백의를 입고 있었는데, 절반 가까이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의 소매를 타고 선혈이 뚝뚝 흘러내렸다.
소년이 용철경을 보며 웃었다.
“꽤 강했어. 덕분에 위험할 뻔했어. 그래도 내 손에 죽었으니 그리 여한은 없을 거야.”
“…….”
“그래도 녹림십팔채의 채주 중 하나다웠어. 내 손에 죽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나 할까?”
소년은 해맑았다. 눈은 맑고 순수했으며, 목소리엔 호기심이 가득했다.
그가 담호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 이쪽에서 말을 했으면 그쪽도 말을 해야 하는 게 예의 아냐? 중원의 무인들은 정말 예의가 없네. 정말!”
콰아아!
순간 예고도 없이 엄청난 풍압이 그를 덮쳐 왔다.
“뭐, 뭐야?”
소년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나려 했다. 하지만 엄청난 인력이 일어나 그를 잡아끌었다.
쾅!
굉음과 함께 소년의 몸이 튕겨나갔다. 담호의 파성추가 터진 것이다.
단정하기만 하던 소년의 머리가 산발이 되고, 코로 피가 흘러나왔다. 두 눈의 실핏줄 또한 모조리 터져서 금방이라도 피눈물이 뚝뚝 흘러내릴 듯했다.
그나마 위기를 느끼고 호신강기를 끌어올렸기 마련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단 일격에 세상을 하직할 뻔했다.
해맑던 얼굴의 소년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졌다.
“네놈이 감히…….”
겉으로는 평범한 소년처럼 보였지만, 그는 흑익사왕 진도휘가 심혈을 기울여 키운 무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각종 대법과 영약을 섭취해 비정상적으로 고강한 내공을 소유하고 있었고, 인성이 말살되어 보편적인 감정을 느낄 수가 없었다.
그에게 살인이란 메뚜기나 개구리를 죽이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놀이였지, 죄책감을 느낄 만한 일이 아니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소년은 살의를 폭발시키며 반격하려 했다. 하지만 담호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콰직!
어느새 지척까지 접근한 담호의 팔꿈치가 소년의 관자놀이에 작렬했다.
강렬한 충격에 소년의 의식이 순간적으로 뚝 끊겼다. 눈을 뜨고 있고, 모든 광경이 똑똑히 보이지만 상황이 인식되지 않는 것이다.
그가 다시 의식을 차린 것은 목을 조여 오는 강렬한 손길 때문이었다. 담호의 양손이 어느새 그의 목덜미 깃을 부여잡고 있었다.
“뭐, 뭐야?”
소년이 놀라 경호성을 내뱉는 찰나 두 다리가 대지에서 순식간에 뽑혀져 올라갔다. 그 직후 아찔한 부유감이 엄습하고 머리와 다리의 위치가 역전됐다.
소년은 담호의 손에서 빠져나오려 몸부림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거꾸로 뒤집힌 그의 몸이 섬전처럼 바닥을 향해 내리꽂혔다.
“아, 안 돼!”
콰앙!
그 순간 소년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처박히며 산산이 부서졌다. 머리를 잃은 몸통이 힘없이 몇 차례 흔들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그제야 담호가 몸을 일으켰다.
담호는 소년의 시신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겼다. 그런 그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패왕채에 접근하자 매캐한 초연과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담호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죽음의 냄새였다.
화르륵!
패왕채가 불타고 있었다.
곳곳에서 비명과 울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은 불을 끄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하지만 패왕채에 붙은 불길은 너무 커서 겨우 몇 사람의 힘만으로는 끌 수는 없었다.
담호의 시선이 패왕채 한가운데 있는 공터로 향했다. 그곳에 황경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패왕도를 든 채 석상처럼 굳건히 서 있었다. 그리고 그의 맞은편에는 흑익사왕 진도휘가 팔짱을 낀 채 바라보고 있었다.
진도휘에게 고정되어 있던 황경문의 눈동자가 문득 담호를 향했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자네 왔군.”
“…….”
“다행……이야. 크으!”
쩌어엉!
그 순간 손에 쥐고 있던 패왕도가 터져 나가며 황경문의 몸이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그가 주저앉은 바닥 위로 순식간에 선혈이 번져 갔다. 마치 전신의 모든 피를 압착기로 쥐어짠 것처럼 흘러나오는 것이다.
담호가 황경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제야 진도휘가 뒤를 돌아봤다.
“영유에게 분명 아무도 올려 보내지 말라 했을 텐데.”
“…….”
“죽은 모양이군.”
진도휘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마교 최고의 고수 중 한 명이었다. 교주인 척관혈을 제외하면 그를 당할 자는 거의 없었다.
당연히 담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포악한 기세를 감지했다. 보통 사람은 감지할 수 없는 짐승 같은 분위기와 기운을.
그가 키운 소년은 분명 살인 병기라 해도 좋을 만큼 엄청난 무위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의 포악한 기세를 가진 자를 감당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의 눈길이 담호의 발로 향했다.
담호는 여전히 한쪽 발을 살짝 절고 있었다. 천하에 이렇게 극명한 특징을 가진 무인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네가 권마구나.”
“…….”
“설마 여기서 너를 만날 줄이야. 하늘의 뜻은 참으로 오묘하구나.”
진도휘가 웃었다. 그러자 그의 검은 피풍의가 마치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꿈틀거렸다. 놀랍도록 기괴한 모습이었다.
그가 담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보고 싶었다. 권마.”
“…….”
“도대체 어떻게 생겨 먹은 놈이기에 번번이 본교의 대업을 방해하는지 말이야.”
그가 다가올수록 피풍의가 검은 날개처럼 더욱 거세게 펄럭였다.
그 순간 담호가 입을 열었다.
“똑같군.”
“뭐가 말이냐?”
“말이 많은 것.”
“뭐?”
“그도 말이 많았거든.”
담호의 말에 진도휘가 코끝을 찡그렸다. 잠시 담호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의 얼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영유 말이냐?”
“그래! 수다스럽더군. 너처럼!”
“…….”
이번엔 진도휘가 입을 다물었다.
담호가 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죽였어.”
“너, 이 녀석!”
“그리고 너도 죽일 거야.”
“가능할 것 같으냐?”
“그도 죽기 전까진 너처럼 생각했을 거야. 그래도 죽었지.”
“감히!”
“너라고 다를 것 같아?”
순간 진도휘의 머릿속에서 이성의 끈이 뚝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