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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권마-396화 (396/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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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6화 7장. 녹림의 하늘이 무너지다(3)

츄화학!

진도휘의 몸이 길게 늘어났다. 검은 그림자가 그가 서 있던 곳에서부터 담호가 있는 곳까지 드리워지는가 싶더니 곧 하나로 합쳐져 있었다.

공간 이동을 하는 것처럼 순간적으로 자리를 바꾸는 절정의 경신술인 이형환위(移形換位)였다. 단지 통상의 이형환위와 차이가 있다면 훨씬 더 먼 거리를 이동했다는 것이다.

담호의 코앞에 나타난 진도휘의 눈에 살광이 번뜩였다.

“요망한 그 입을 찢어 주마.”

촤라락!

검은 날개 같은 피풍의가 쭈욱 늘어나며 담호를 휘감아 왔다. 물리적인 크기, 면적을 무시한 채 무시무시한 크기로 확장되는 검은 피풍의는 마교의 기보 중 하나인 마룡혈포(魔龍血袍)였다.

저 멀리 남만의 수림 깊은 곳에는 흑혈천잠(黑血天蠶)이라는 영물이 살고 있었는데, 흑혈천잠이 뿜어내는 실은 마치 강철과 같은 강도와 비단 같은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흑혈천잠사로 만든 실은 내공을 주입하면 늘어나는 특성이 있었는데, 구하기가 워낙 어려워 강호에 아는 자가 거의 없었다.

진도휘의 무공은 바로 흑혈천잠사로 만든 마룡혈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마룡혈포는 그의 의지에 따라 마음대로 변형이 되었다.

담호는 마룡혈포를 향해 파성추를 펼쳤다.

격중 되면 자연 뇌음이 터져 나오는 파성추였다. 하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부딪치는 순간 마룡혈포가 부드럽게 변하며 충격을 모조리 흡수했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을 친 것처럼 주먹에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담호가 미간을 찌푸리는 찰나 하늘거리던 마룡혈포가 철판처럼 꼿꼿하게 일어서서 다시 담호를 덮쳐 왔다.

촤르륵!

마치 새가 날개를 접듯 마룡혈포가 차곡차곡 접히며 담호를 조여 왔다.

진도휘가 담호를 비웃었다.

“그 어떤 공격도 소용없다. 내 마룡혈포는 모든 충격을 흡수하니까.”

담호처럼 강공일변도의 무공을 가진 자에게 마룡혈포는 상극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진도휘가 승리를 자신하는 이유였다.

공격이 통하지 않자 담호가 허공으로 몸을 뽑아 올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마룡혈포가 담호의 앞을 가로막았다.

쿠우우!

마룡혈포가 강기를 만들어 냈다.

일반적으로 피풍의와 같은 천으로 강기를 만들어 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하지만 마룡혈포는 가능하게 만들었다.

강기 어린 마룡혈포가 담호를 조여 왔다.

순간 엄청난 압력과 함께 발생한 칼바람이 담호의 피부를 베고 지나갔다.

‘그랬군.’

그제야 담호는 남궁세가 무인들의 시신이 왜 그렇게 으깨졌는지 알 수 있었다. 강기를 발산하는 마룡혈포가 압착기처럼 조였기 때문이다.

일단 마룡혈포에 갇히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반적인 무인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담호는 일반적인 무인이 아니었다.

그의 다섯 손가락이 쫘악 펴지더니 마룡혈포에 흡착됐다. 강기가 어린 마룡혈포는 쇳덩어리도 단숨에 쪼갤 만큼 날카로웠다. 하지만 은망수로 감싼 담호의 손에 상처를 입히지는 못했다.

장심과 다섯 손가락이 완전히 마룡혈포에 흡착됐다.

“소용없다니까.”

후웅!

진도휘가 비웃음을 흘릴 때 마룡혈포와 흡착된 담호의 손바닥이 나선형의 경력을 토해 냈다.

오지암파경이었다.

출렁!

나선형의 경력이 마룡혈포를 출렁이게 만들었다. 덩달아 마룡혈포에 어려 있던 강기도 요동쳤다.

진도휘의 눈이 부릅떠졌다.

‘이럴 수가!’

그의 공력이 주입된 마령혈포는 절대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적어도 진도휘가 마령혈포를 사용한 이래 그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크윽!”

처음으로 마룡혈포가 진도휘의 통제를 벋어나 요동쳤다.

그 순간 담호가 충보를 펼쳤다.

퍼엉!

파성추를 펼치기도 전에 공기가 터져 나가고, 요동치던 마룡혈포가 단박에 벗겨져 나갔다. 그리고 마룡혈포 뒤에 숨어 있던 진도휘의 몸이 드러났다.

파성추가 작렬했다.

쩌어엉!

쇳소리가 울려 퍼지고 진도휘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그런 그의 왼 손바닥은 퉁퉁 부어 있었다.

잔혈마수(殘血魔手)라는 수공을 이용해 방어했음에도 손바닥 뼈 전체가 으스러진 듯한 충격이 느껴졌다.

그야말로 가공할 위력이었다.

진도휘는 모골이 송연해지는 것을 느끼고 급히 뒤로 물러났다. 담호의 무력이 그의 예상을 훨씬 상회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담호는 그가 물러나도록 두지 않았다.

기이한 접인력이 일어나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마치 심해에 떨어져 엄청난 양의 바닷물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순간 다시 한 번 담호의 파성추가 터졌다. 똑같은 자세, 똑같은 초식이었다.

다른 무인이었다면 자신을 우습게 보는 거냐고 분통을 터트렸을 테지만, 진도휘는 달랐다.

그의 눈빛부터 변했다.

“챠합! 마룡회선강(魔龍回旋罡).”

순간 담호의 박력에 밀려났던 마룡혈포가 무서운 속도로 회전을 하며 담호를 향해 날아왔다. 마룡혈포에 어려 있던 강기도 엄청난 속도로 회전을 했다.

강기로 만들어진 거대한 추(錐)의 회전에 공기마저 밀려났다. 그리고 담호의 주먹과 격돌했다.

콰아앙!

순간 굉음과 함께 일대의 공기가 터져 나갔다. 광풍이 사방으로 휘몰아치고 공기가 밀려나면서 순간적으로 진공 상태가 되었다.

“…….”

믿을 수 없는 정적이 찾아왔다.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조용한 세계, 그 한가운데 담호가 존재했다.

고요는 오래가지 않았다.

콰아아!

공백을 채우기라도 하듯 밖으로 밀려 나갔던 공기가 한꺼번에 해일처럼 모여들었다.

담호의 옷자락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머리카락이 수만 마리의 뱀처럼 요동쳤다. 순식간에 빈 곳을 채우며 밀려오는 공기에 눈이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래도 담호는 눈을 감지 않았다.

그의 눈은 진도휘의 행적을 좇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서도 진도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대신 그의 목소리만 환청처럼 들려왔다.

―오늘은 이만 물러가겠다, 권마. 허나 우리는 곧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부분은 너무 희미해서 거의 들리지도 않았다. 그 짧은 순간 패왕채에서 멀리 벗어난 것이다.

그야말로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무시무시한 경공술이었다. 이미 그의 기척은 사라지고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담호가 진도휘가 사라진 방향을 노려볼 때였다.

“아빠!”

황혜령이 울음 섞인 음성으로 황경문을 부르며 달려왔다.

그녀는 바닥에 쓰러진 황경문을 안아 들었다.

“아빠, 아빠! 눈 떠 봐요.”

황혜령은 황경문의 명문혈에 급히 내공을 주입했다. 그런 그녀의 눈은 온통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그녀의 바람이 통했는지 황경문이 굳게 닫혀 있던 눈을 힘들게 떴다.

“혜령……이구나. 왜 돌아왔어?”

“아빠! 괜찮을 거야. 조금만 참아.”

“일광은?”

“곧 올 거야.”

“그를 믿고…… 의지하거라. 그를…….”

“아빠 말하지 마. 기가 흩어지잖아.”

황혜령의 울음 섞인 말에 황경문이 조용히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삼단같이 고운 머릿결이 느껴졌다. 황혜령이 어렸을 때 투박한 손으로 머리를 묶어 주었다가 얼마나 잔소리를 들었는지 몰랐다.

엉망이 된 머리를 보며 황혜령은 서럽게 울었고, 황경문은 어쩔 줄을 몰라 했었다. 그 이후 황혜령의 머리를 묶어 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오랜만에…… 너무 오랜만에 느껴 보는 딸의 머릿결이었다. 딸의 온기가 머릿결을 통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황경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는가 싶더니 그대로 모로 꺾였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황혜령은 황경문의 몸에 열심히 내공을 주입하고 있었다.

담호의 눈빛이 더욱 깊이 가라앉았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숨이 끊어진 황경문의 얼굴은 그를 향해 있었다.

―내 딸을 부탁하네.

생명의 빛을 잃은 그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는 듯했다.

담호는 입술을 까득 깨물며 뒤돌아섰다.

방금 전까지 맹위를 떨치며 타오르던 불길은 어느새 모두 꺼져 있었다. 담호와 진도휘의 격돌 때 일어난 진공의 여파에 불씨가 모두 소멸된 것이다.

담호는 황혜령을 뒤로한 채 산 아래로 걸음을 옮겼다.

진도휘는 사라졌지만, 그를 따라왔던 마교의 무인들은 미처 철수하지 못하고 아직도 녹림도들과 치열한 격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쾅!

그들에게 담호라는 이름의 죽음이 들이닥쳤다.

***

커다란 대전 안 남궁무진은 등불도 켜지 않고 홀로 앉아 있었다. 대전 안을 가득 채운 어둠 속에서 남궁무진은 검을 닦았다.

다섯 살 때 검을 익혔고, 일곱 살에 이미 진검을 사용할 정도로 그는 검의 천재였다. 남궁세가 전체의 기대를 한 몸에 받다 보니 중압감에 조급해하다가 주화입마를 당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남궁세가에서 그만큼의 무재를 가진 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심혈을 기울여 검을 닦았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닦은 검엔 조그만 먼지조차 없었지만, 그래도 그는 마르고 닳도록 닦고 또 닦았다.

검을 닦으면서 마음을 명경지수처럼 비워야 하건만 쉽지가 않았다.

“휴우!”

결국 그는 한숨을 내쉬며 검을 닦는 것을 끝냈다.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모든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정도를 걷는 게 아니라서 그런가?”

그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교의 전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패왕채를 이용했다. 그때는 그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꺼림칙한 마음만 들었다.

남궁무진은 이내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다. 내가 흔들려서 어찌하는가? 가문의 모든 이들이 나 하나만 바라보고 있는데. 흔들리지 말거라, 남궁무진. 어떤 오욕을 뒤집어쓰더라도 너는 앞만 보고 나아가야 한다.”

그것은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복수에 눈이 멀었다고 해도 좋았고, 가문의 영달을 위해 다른 누군가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것은 오로지 남궁세가를 지키고 번영시키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렇게 남궁무진이 각오를 다질 때였다.

“소가주님!”

대전의 문이 열리고 남궁세가의 무인 한 명이 뛰어 들어왔다.

“노, 놈들입니다.”

“놈들?”

“마교가 습격해 왔습니다. 정문 너머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벌써?”

남궁무진의 얼굴에 당혹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그의 예상보다 빠르게 적들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패왕채로 유인하는 것이 성공했다면 최소 삼사 일은 시간을 벌었어야 했다.

“놈들의 전력은?”

“그, 그게…… 전혀 분산되지 않았습니다.”

“유인지계가 실패했다는 건가?”

“그건 아닙니다만 예상외로 패왕채로 유인된 무인들의 수가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으음!”

무인의 대답에 남궁무진이 침음성을 흘릴 때였다.

“으아악!”

“놈들이다.”

밖에서 남궁세가 무인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교가 본격적으로 침공해 온 것이다.

안색이 변한 남궁무진이 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럴 수가!”

대전 밖으로 나온 그가 제일 먼저 본 광경은 화광이 충천하고 있는 정문이었다. 수백 년 동안 남궁세가의 위엄을 상징한 거대한 정문이 불에 타고,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해 주던 거대한 담이 무너지고 있었다. 무너진 담 사이로 수많은 검은 그림자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마교의 무인들이었다.

썰물처럼 밀려 들어온 마교의 무인들은 곳곳에서 남궁세가의 무인들과 충돌하고 있었다.

“놈들을 막앗!”

“한 놈도 이곳을 통과하지 못한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악을 쓰며 마교의 무인들을 막았다. 하지만 그들의 기세는 크게 꺾여 있었다.

남궁세가의 역사 수백 년 동안 그들이 타 문파를 공격한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본가가 타 문파의 습격을 받은 적은 몇 번 없었다. 그리고 몇 차례의 침공도 훌륭히 방어해 냈었다.

천하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짓밟히는 광경은 남궁세가 무인들의 기를 크게 꺾었다.

“남궁세가, 별거 아니었군. 겨우 이 정도였다니.”

신화전의 전주 남현소가 무참히 무너지는 남궁세가를 보며 조소를 피워 올렸다.

앞장서서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도륙하는 이는 바로 그의 수하들이었다.

“당장 멈춰라, 이놈들!”

남궁무진이 분노해 그들을 향해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그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마치 유령처럼 홀연히 나타난 여인 때문이었다.

마치 꿈꾸는 듯한 몽혼한 눈동자를 소유한 눈부신 미녀였다. 하늘색 장포를 입은 그녀의 등 뒤에는 비파가 걸려 있었다.

여인은 바로 요사란이었다.

“너는 내 몫이란다, 아이야.”

“비켜랏!”

남궁무진이 요사란을 향해 창궁무애검을 펼쳤다. 하지만 요사란은 너무 쉽게 남궁무진의 검을 피해 냈다.

남궁무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제야 요사란이 보통 무인이 아님을 직감한 것이다.

잠시 숨을 고른 그는 오직 가주만이 익힐 수 있는 제왕검형을 펼쳐 냈다. 어둠을 가르는 검, 부서지는 빛의 편린, 그 속에서 요사란이 입을 열었다.

“최선을 다하라, 남궁세가의 마지막 가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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