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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화 8장. 혈란의 시대가 열리다(1)
텅텅!
초연운이 손등으로 의족을 두들겼다. 그러자 맑은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처음엔 이질감 때문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못했는데, 이젠 소리만 들어도 상태를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정이 들었다.
초연운은 의족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마지막까지 상태를 점검했다.
“괜찮군!”
그가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종아리까지 걷어 올렸던 바지춤이 절로 내려가 의족을 감췄다.
초연운이 스스로 내보이기 전까지는 누구도 그가 의족을 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문득 주위를 돌아봤다.
넓은 빈객청이 텅 비어 있었다. 담호가 떠난 후 빈객청은 늘 이렇게 비어 있었다. 이곳에 상주하는 이는 초연운 하나뿐이었다.
소천이나 청운, 해소월 등이 가끔씩 찾아올 뿐 외부의 누구도 이곳을 방문하지 않았다. 덕분에 초연운은 평안하다 못해 지루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조바심을 내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능입유기번(能入遊其樊) 하되, 이무감기명(而無感其名)이라더니 내가 딱 그 짝이군.”
들어갈 수 있으면 그 울안에서 놀되, 명예심에 마음을 움직이지 말라.
장자 내편에 나오는 명언이었다.
마음에 늘 담아 두었지만, 쉽게 행하지는 힘든 그런 말이었다.
강호인은 본능적으로 강함을 추구하게 되어 있었다. 평생을 노력해 원하는 만큼의 강함을 얻게 되면 그다음에 눈을 돌리는 것이 바로 명예였다.
구무룡이니, 사신성이니 하는 미사여구도 바로 명예심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한때는 초연운도 그에 집착한 적이 있었다. 취운룡이라는 별호에 만족한 것처럼, 혹은 초연한 것처럼 천하를 떠돌아다녔지만, 그의 마음속엔 항상 구무룡에 대한 질시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마음속의 응어리가 어느 정도 풀린 것은 구무룡의 일원인 천뢰무객(天雷武客) 남학을 쓰러트린 후였다.
남학을 넘어섰을 때 초연운은 비로서 지겹게 옭아매던 명예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고, 소화산에서 보낸 삼 년의 시간 동안 훌훌 벗어던졌다.
그는 오직 마교를 무너트리는 것만 신경 쓸 뿐, 더 이상 자신의 명성에 집착하지 않았다. 그래서 빈객청에 머물면서 무공만 수련할 뿐 다른 무인들과 깊은 교류를 하지 않았다.
예전이었다면 그런 자신의 행보가 답답하게 여겨졌겠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유롭다는 생각을 했다.
초연운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거참! 알다가도 모르는 것이 세상사라니까. 내가 이렇게 될 줄이야.”
그가 문득 하늘을 올려다봤다.
담호와 방진보가 곁에 없으니 외로움이 왈칵 밀려왔다.
‘사부!’
그래서 사부 장일산이 그리웠다. 그리고 자신을 원수처럼 따르던 사형제들도.
초연운은 한동안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아미타불!”
소천이 빈객청 안으로 들어왔다.
초연운이 상념에서 깨어나 그를 바라봤다.
“소천!”
“무슨 생각을 그리도 깊이 하는가?”
“아무것도 아니야.”
초연운이 미소를 지었다.
며칠 동안 많이 친해진 두 사람이었다. 덕분엔 이젠 말도 편하게 했다.
“그보다 무슨 일이지?”
“결사대에 소집령이 내려졌네.”
소천의 말에 초연운의 표정이 굳었다.
“정말인가?”
“그렇다네! 다른 사람들은 벌써 모였다네. 어서 가세.”
초연운이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드디어 시작인가?’
그는 소천을 따라 대웅전 앞 연무장으로 향했다.
연무장은 높은 담장으로 외부와 차단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 젊은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표정이 굳어 있는 젊은 무인들의 시선은 온통 단상에 집중되어 있었다. 때문에 소천과 초연운에게 누구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단상 위에는 유성월과 장진명을 비롯한 전대 무인들이 서 있었다. 그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귀엣말을 나누고 있었다.
그들의 표정을 통해 돌아가는 상황이 심상치 않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수많은 이들이 모여 있었지만 누구 한 명 함부로 떠들지 않았다.
“초 대협!”
“왔는가?”
초연운의 주위로 해소월과 청운 등이 모여들었다. 그들의 표정 역시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심각했다.
초연운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우리도 알지 못하네. 아직까지 별다른 말이 없거든.”
청운의 대답에 초연운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것은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방장님이다.”
“맹주님도 같이 나오신다.”
그들의 말처럼 소림의 방장인 광천과 무림맹의 맹주인 남천산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서둘러 단상 위로 올랐다.
광천에게 양해를 구한 남천산이 내공을 끌어 올리면서 말했다.
“오늘 이렇게 여러분들을 한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상황이 생각보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교가 안휘성을 피로 물들이고 있습니다. 벌써 수많은 문파들이 마교에 의해서 멸문지화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그 지경이 될 때까지 남궁세가는 무얼 하고 있단 말인가?”
이제까지 애써 침묵을 지키던 젊은 무인들이 경악하며 남궁세가를 성토했다.
“아마 남궁세가도 그들을 돌볼 여력이 없을 겁니다.”
“으음!”
“하기는…….”
이어지는 남천산의 설명에 많은 군웅들이 수긍했다.
“어차피 마교와 남궁세가의 충돌은 피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번 기회를 최대한 살려야 합니다. 일차 정마대전 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결사대가 강호를 살려야 합니다. 오직 여러분만이 강호의 위기를 종식시킬 수 있습니다.”
젊은 무인들이 주먹을 쥐었다. 본능적으로 다음에 나올 남천산의 말을 직감했기 때문이다.
남천산은 잠시 말을 멈춘 채 젊은 무인들을 둘러보았다. 한 명, 한 명 시선을 맞추다 초연운에게서 멈췄다. 그리고 말했다.
“안휘성으로 많은 전력이 빠졌으니, 지금 저들의 본진인 악양은 경계가 약화되었을 겁니다. 우리는 이 기회를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강호는 여러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
“결사대…… 출진하십시오. 여러 선배들이 당신들을 이끌 겁니다. 마교의 기를 꺾어 무림의 의기가 아직 죽지 않았음을 만 천하에 알리십시오. 여러분이 강호의 마지막 희망입니다.”
“우와아아!”
남천산의 말이 끝나는 순간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져 나왔다.
“마교를 물리치자.”
“결사대의 위용을 보여 주자.”
“마교도를 지옥으로…….”
초연운은 집단의 광기가 발현됐음을 직감했다. 남천산의 일장 연설이 젊은 무인들의 가슴에 잠재한 영웅심을 들끓게 만든 것이다.
초연운은 눈살을 찌푸린 채 남천산의 말을 끝까지 들었다. 그의 말을 요약하자면 결사대가 마교의 본진에 기습을 가해 타격을 입히는 동안 무림맹을 확실히 정비해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겠다는 것이었다.
남천산은 온갖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 젊은 무인들의 혼을 쏙 빼놨다. 그리고 젊은 무인들은 강호 정의를 구현하는 영광된 자리에 선봉으로 설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환호를 하고 있었다.
“휴!”
집단의 광기 속에서 초연운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갑자기 담호와 방진보가 보고 싶어졌다.
***
황산은 정적에 싸여 있었다.
살아남은 자들보다 죽은 자가 더욱 많았고, 아름답던 황산 곳곳은 피로 붉게 물들어 있었다.
피를 나눈 형제와도 같았던 동료들의 죽음에 녹림의 무인들은 하염없이 울었다. 무엇보다 그들을 슬프게 한 것은 바로 녹림의 총채주인 황경문의 죽음이었다.
황경문은 수만 녹림도의 정신적인 지주였고, 의지처였다. 그가 있었기에 녹림이 지금까지 버텨 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의 죽음은 상상 그 이상의 상실감을 가져왔다.
“크흑! 총채주님.”
“으허헝!”
녹림도들은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하다 말고 제자리에 주저앉아서 대성통곡을 했다. 울음은 역병처럼 순식간에 녹림도 전체로 퍼져 나갔고, 황산 전체에 울려 퍼졌다.
황혜령도, 묵일광도, 방진보도.
담호를 제외한 모두가 울고 있었다.
그렇게 슬픔은 황산을 집어삼키고 있었다.
그때 담호가 움직였다.
그는 먼저 황경문의 시신을 수습했다. 황산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봉우리 위에 황경문의 시신을 옮겼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녹림 무인의 시신을 어깨에 짊어지고 황경문의 시신 곁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황경문의 곁에 그의 시신을 나란히 뉘였다.
그런 담호의 모습을 지켜보던 녹림도들이 눈물을 닦으며 동료들의 시신을 수습해 황경문의 곁으로 옮겼다.
“크흑!”
눈물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그들은 애써 눈물을 참으며 동료들의 시신을 옮겼다.
“오라버니!”
황혜령이 담호의 곁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그녀의 눈은 붉게 충혈 된 채 퉁퉁 부어 있었다.
담호가 그녀에게 말했다.
“나무를 해 오거라.”
“네? 하지만…….”
담호의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황혜령이 잠시 망설였다. 담호는 이들을 모두 화장하려는 것이다.
화장하면 모든 것이 재로 돌아간다. 이들이 살았다는 흔적도, 남겨진 것도 없이 완전한 무(無)로 돌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친딸처럼 아껴주던 황경문의 흔적이 그렇게 사라진다는 사실이 두려웠다. 황혜령이 그렇게 망설이고 있을 때 묵일광이 앞으로 나섰다.
“제가 하겠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심적으로 힘들었지만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묵일광은 그 커다란 몸을 움직여 나무를 베러 갔다.
잠시 망설이던 황혜령이 황경문의 시신을 본 후 급히 묵일광을 따라갔다.
담호는 멀어지는 황혜령의 모습을 말없이 바라봤다.
위로해 주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그녀의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다른 무언가에 몰두하게 하는 것이 잠시라도 슬픔을 잊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이젠 담호가 굳이 시신을 운반할 필요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시신을 옮겨 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과 반나절 전까지 같이 웃고 떠들던 동료의 시신을 옮긴다는 것은 그들의 정신에 큰 상처를 남겼다. 그래도 그들은 억지로 참으며 계속해서 시신을 옮겼다.
담호는 황경문의 곁에 앉았다.
날이 더워서 벌써 부패를 시작해 악취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도 담호는 눈 한 번 찌푸리지 않고 황경문의 곁을 지켰다.
문득 담호가 입을 열었다.
“고마워!”
한평생 동생의 든든한 보호자가 돼 준 황경문에게 하는 감사의 인사였다. 담호가 할 수 있는 최고의 헌사를 보내는 것이다.
모든 시신이 수습된 것은 해가 질 무렵이었다. 그사이 묵일광이 나무를 산더미처럼 베어 왔다.
나무로 단을 만들고, 그 위에 시신을 차곡차곡 뉘였다. 그렇게 거대한 제단이 만들어졌다.
담호가 횃불을 들었다.
일렁이는 불빛이 사람들의 얼굴에 짙은 음영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의 시선이 담호에게 집중되었다. 모두가 그가 불을 붙일 거라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담호는 횃불을 황혜령에게 내밀었다.
“네가 붙여라.”
“네? 하지만…….”
“너는 녹림의 하늘이었던 남자의 딸이다. 그의 죽음에 어울리는 예우를 할 사람은 너밖에 없다.”
“알……겠어요.”
황혜령이 굳은 표정으로 담호에게서 횃불을 받아 들었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그녀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지 않았다.
언제나 그녀의 든든한 우군이 되어 주었던 묵일광조차 말없이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황혜령은 횃불을 든 채 천천히 제단을 향해 다가갔다. 제단 위에 누워 있는 수많은 이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담았다.
“절대 잊지 않을게요. 내가 죽기 전에는 절대로…….”
황혜령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하늘에 닿기를 염원했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멈춘 것은 황경문의 시신에서였다.
그녀는 말없이 황경문의 얼굴을 바라봤다.
주마등처럼 수많은 상념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이렇게 떠오르는 추억이 많은지. 왜 그때 조금 더 살갑게 대하지 못했는지. 왜 이렇게 후회는 많은지.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러내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손에 쥔 횃불을 놓지 않았다.
“잘 가! 아빠.”
황혜령은 마침내 작별을 고했다.
횃불이 제단에 옮겨 붙었다. 불은 순식간에 제단 전체로 번져 갔고, 곧 엄청나게 덩치를 불렸다.
화르륵!
어둠에 휩싸여 있던 봉우리에 화광이 충천했고, 모두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황혜령은 이 불길이 모두의 슬픔을 멀리 날려 주길 진심으로 기원했다.
황경문을 휘감는 새빨간 불길이 담호의 망막을 가득 채웠다.
“그리 오래 기다리지 않게 해 주지.”